▷기고◁ <南海聞見錄(남해문견록> 다시 읽기-①

  • 즐겨찾기 추가
  • 2024.03.22(금) 21:41
▷기고◁ <南海聞見錄(남해문견록> 다시 읽기-①

-상례·혼례 양면보기: 운명공동체의 연대성 확인-

2021년 03월 12일(금) 11:29
정 문 열 (인문학당문항 운영자)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역사학도 그러합니다. 서구 중심의 역사학, 남성 중심의 역사학, 지배자 중심의 역사학이었습니다.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계층인 유배자들의 기록에 의존한 나머지, 통치 이념과 제도에 귀속시키려는 궁색한 합리화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남해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지 못했습니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남해문화를 설명하고 평가했습니다. 우리 남해에도 지배계층과 비슷한 이러저러한 문화가 있었다. 아니면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양반문화의 양식이 남해에도 있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어쨌거나 자기를 외부적 조건과 기준에 맞추려는 자는 자기세계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짝퉁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진짜와 닮을 것인가에 있고, 진짜의 고민은 자기세계의 창조에 있다고 합니다. 남해의 문화는 남해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조건과 기준에 의해 기술해야 합니다. 남해의 지리적 환경, 사회경제적 여건 같은 장기지속적인 조건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 생활습관 같은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남해 문화의 특징이 되겠지요.

『남해문견록』은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남해의 산수(山水), 생리(生利), 인심(人心), 풍습(風習)을 기술하고 평가한 기행문입니다. 이 기록물에 담긴 남해 사람들의 인심과 풍습은 한마디로 '야만적'인 모습에 가깝습니다. 계몽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미개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유학자의 입장이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서 남해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해사람들은 남해사람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양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의양 선생의 시선에 담긴 남해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남해 사람들의 삶의 태도, 생활 규범, 집단적 가치 등을 읽어내 보겠습니다. 계측이 가능한 외면의 사실이 아니라 내면의 여러 층위에 숨어 있는 다양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의양 선생의 시각이 아니라, 대상인 남해사람들의 입장에서 『남해문견록』의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작자 시각 중심의 일면보기가 아니라, 대상의 입장을 고려한 '양면보기'입니다. 앞으로 연재될 내용은 '양면보기'를 통해서 남해에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재구성하는 작업입니다.

250년 전 남해 조상들의 정신문화는 그 전 조상들에게서 상속돼 온 것이었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해의 문화적 양식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가 의식하든 아니하든 문화의 한 특징으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비투스란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하는 단어로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고 합니다.

18세기 당대 지식인이었고, 양반 귀족이었고, 홍문관 수찬을 지낸 유의양 선생의 『남해문견록』을 통해서 250년 전 남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1. 상례(喪禮)와 혼례(婚禮)

다음은 『남해문견록』의 상례(喪禮) 기록입니다. 원본의 예스러움을 살려내려고 완전히 현대국어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도중(島中, 남해) 풍속은 준준하기(蠢蠢, 어리석고 무지하여 사리를 판별하지 못함)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어버이 영장(靈葬, 안장하다)할 때 수일(讐日, 부모가 돌아가신 원망스러운 날)을 기하여, 집에 차일을 치고,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동네 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당과 경쟁이를 모아 아침부터 밤이 되기까지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때 북과 장구치며 피리와 저(대금)를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산까지 가니, 장수(葬需, 장례 지내는 물품)는 부조하는 일이 없고, 현훈(玄?, 산신에게 드리는 폐백)하는 이 없고, 선비라 칭하는 이라도 신주(神主, 위폐를 받들어 모심)하는 이 없고, 돌아와 제 한번 지내니 제 이름은 넋제라 하니,

대범 장사에 주육(酒肉)과 풍류를 착실히 한 후에야 이웃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사를 잘 지내니 그 상인(喪人)이 착하다 하고, 장수(葬需)를 약간 잘 차려 지내도, 풍류와 주육(酒肉)이 착실치 못하면 장사를 잘못 지냈다 하고 꾸지람이 많다 하니,

들으니 우습기도 우습고 해연하더라(駭然, 몹시 이상스러워 놀랍다).]



유의양 선생의 주관적인 의견이나 평가를 걷어내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당이 경쟁이(경을 읽어주는 사람)들을 동원해 굿을 하고, 발인할 때에는 악사들을 상여 앞에 세운다. 풍물놀이 악기 구성과 비슷하다.

둘째, 동네 사람들을 각별히 초대하여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융숭하게 접대한다.

조선이 건국하고 400여년이 지난 시기에도 「가례(家禮)」가 규범으로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1648년 성리학자 신의경이 주자의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학자들(김장생, 김집)의 예설을 참고하여 상례의식을 알기 쉽게 기술한 예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편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가례(家禮)」의 보급과 인식이 조선 사회에서 충분히 정착되지 못하였고, 전통적인 속례(俗禮)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계몽하기 위하여 「상례비요」를 엮었다고 합니다. 유의양 선생도 서울에서조차 「상례비요」대로 상례를 치르는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적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남해의 상례는 같은 조선에 사는 한 나라의 백성이면서도, 양반계급의 상례와 아주 다릅니다. 남해 사람들의 속례(俗禮)는 나름대로 오랜 습속으로 자리 잡아 계승되어 왔을 것입니다.

남해의 상례 문화는 엄숙한 슬픔과 애도 분위기보다는 어찌 보면 축제 같기도 하고, 특히 이웃사람 접대가 중심이 되는 행사입니다. 이는 죽은 조상의 음덕을 산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어버이의 한 평생 살이와 자식들의 평안한 삶이 동네 사람들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조상의 감사심을 그 자손이 대신하여 표현합니다. 이런 문화는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요?

남해는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계속하여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린 곳입니다. 그래서 남해는 조선시대 16세기 초반까지 행정단위가 독립하지 못하고 하동, 곤양, 금양 등과 통합 분리되었던 역사를 겪었습니다. 하남군, 곤남현, 해양현 등으로 불렸습니다. 현재 남해읍에 '해양'이라는 명칭이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동 지역과 합한 근본적인 이유가 왜구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기간엔 아예 남해섬이 텅 비어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행정조직이 없고, 그러니 관군이 정규군으로 주둔하지 않을 때, 누구를 의지하고 살았을까요? 남해의 조상들은 당연히 이웃사람들과 일심 단결하여 왜구와 항쟁하며, 이 바다와 농토를 지켜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동네 이웃들은 단순히 마을 주민이 아니라, 운명공동체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개인의 삶과 생명이 이웃사람에게 달려 있었을 것입니다. 농사지을 때나 물질할 때는 품앗이의 경제협력체요, 유사시에는 전우애로 뭉쳐진 이웃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다 죽었을 때는 당연히 그들을 피붙이처럼 대접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마을의 이웃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융숭하게 대접함으로써 공동체적 연대감은 공고해졌을 것입니다.

유의양 선생의 평가처럼, '풍속이 준준하기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우습고 해연할' 것까지는 없겠지요. 사람의 생명이 걸린 엄중한 상황에서 관군이 출동하기에는 너무도 다급한 순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든든한 이웃 간의 단결이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남해의 조상들은 이웃과의 연대라는 생활양식과 의식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정신은 마치 축제와도 같은 독특한 상례문화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상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혼례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남해문견록』의 혼례 문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장례가 이러하거늘 혼인하는 모양은 더욱 이를 것 없더라. 혼인날 신랑이 오면,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내달아 얼굴에 먹칠도 하는 등 매우 곤하게 보채어, 급제한 선달을 선진이 보채는 듯이 보채고, 딴 방에 종일토록 앉혔다가, 납채(納采,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구함)하는 일도 없고, 전안(奠雁,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함)하는 일도 없이, 신랑 신부가 낮에 보는 일도 없고, 동네 잔치하는 일도 없이, 밤에 신랑 있는 데 처녀를 들여보내고, 다른 예절이 없다 하니,

도중(島中, 남해)의 칭명 양반이라 하는 것도 장사 지내는 예절과 혼인하는 의례가 이렇듯 망측하니, 이 땅이 비록 서울서 천 리가 넘은들 예의지방의 교화가 아니 미친 데 없건마는,

이 땅이 어찌 이렇듯 무도하고(無道,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됨) 측연하기(惻然, 가엾고 불쌍함)가 심하더라.]



돋보이는 부분이 이른바 '신랑달기' 문화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막 '급제한 선달을 선진이 보채듯이 보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달은 벼슬하지 않은 급제자이고 선진이란 선배 관원을 말합니다. 선배 관원들이 신참 급제자들에게 가혹한 신고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를 일러 '면신례(免新禮)'라고 합니다. 일종의 통과의례이지요.

한 인간이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 종류의 집단에서부터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합니다.

개인의 중대사인 혼인마저도 마을 사람들이 관여해서 입사식(入社式)을 치릅니다.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신고하고 알아주고 인정받는 중요한 의례 행위입니다. 여기에서도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모든 역할을 담당합니다. 철저하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연대성이 중요합니다.

결국 250년 전, 남해의 상례?혼례 문화의 특이성은 남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왜구와의 항전' 과정에서 형성돼 계승된 연대성이라는 정신문화의 결과물입니다. 나라도 포기해버린 땅을 왜구로부터 지키기 위한 몸부림, 이런 남해 사람들의 연대성은 '아비투스'로 현재까지 상속되었을 것입니다. 대도시에 가 보면 남해사람들만큼 향우회나 초등학교동창회가 잘 운영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또 남해에서 발행되는 신문에는 모두 향우회 소식이 여러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확실히 남해의 특징적인 정신문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공고한 연대성은 타지인에 대한 배타심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눈치보기라는 폐단을 낳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기기사 TOP 5
남해
자치행정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