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기고 - 변승규 동의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스마트 위스키 양조장, 남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2025년 08월 22일(금) 10:32
남해에 살고 있는 사촌형들이 좋았던 나는 초등학생 시절 방학마다 남해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곤 했다. 물론 실제로 언어를 배우러 간 것은 아니지만 남해 특유의 문화와 사투리에 익숙해져 돌아온 경험을 현재에 와서 그렇게 농담 삼아 표현한다. 그만큼 남해는 나에게 있어서는 애착 장소와도 같은 곳이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남해는 교통이 지금만큼 편리하지 않아 오히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며 풍경과 맛을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해를 찾아오는 관광객도 그러했고, 관광객으로 찾아온 누군가는 이곳이 좋아 정착을 위해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남해를 방문하는 방식은 내가 알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외가가 있던 상주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민박집에 머물며 하루, 혹은 며칠씩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금산 보리암이나 삼동면, 미조면 등의 인근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교통 인프라가 개선되면서 머무는 시간은 짧아졌고 빠르게 섬을 둘러보고 떠나는 여행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는 지역 경제 측면에서 아쉬운 변화다. 관광객의 체류 시간이 짧아지면 소비도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해에 다시 '머무는 관광'을 유도할 수 있는 차별화된 콘텐츠가 절실한 지금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스마트 위스키 양조장'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고 싶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품질의 술을 맛보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요구에 맞추어 여러 사설 양조장이 등장하고 있고 주종은 다르지만 남해에도 몇 군데의 양조장이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이곳들을 찾아가 술을 시음하고 구매하며 덩달아 주변 환경까지 즐기는 투어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은 남해가 관광지로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먼저 입지와 자원을 살펴보면 남해는 온난 습윤한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 약 14℃, 연평균 강수량 1,700mm 이상을 기록해 위스키 숙성에 적합하다. 일본 산토리 야마자키 증류소가 위치한 오사카부의 기후는 연평균 기온 17.1℃, 연평균 강수량 1,338.3mm로, 남해와 기후 특성이 유사하며 위스키 숙성에 적절한 환경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만의 카발란 증류소는 연 기온이 21.3℃로 높고, 연평균 강수량이 약 3,300mm에 달하는 고온다습한 환경을 활용해 빠른 숙성으로 풍부한 맛을 만들어낸다. 일본 북해도의 요이치 증류소는 연평균 기온 약 8℃, 연평균 강수량 1,320mm의 한랭 다우기후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스타일을 구현한다. 남해는 이들 세 지역의 기후대 사이에 위치하며, 위스키 숙성에 다양한 전략을 실험할 수 있는 입지적 특수성을 가진다.



또한 남해는 지하수를 비롯한 수자원이 풍부하고 수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위스키 생산에 있어 물의 품질은 풍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이는 지역 자원의 고유성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은 보리와 홉 재배에도 일정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남해는 이미 보리 재배 경험이 있으며, 농가와의 협력을 통해 일부 원재료의 자급도 고려할 수 있다.

홉은 위스키에는 사용되지 않지만, 독일 마을의 맥주 제조와 연계하거나 남해발 주류 브랜드로의 확장 가능성을 가진 상징 자원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입지적 강점 위에 기술과 사람을 더하는 것이 다음 과제이다. 남해군은 스마트팜, 환경 모니터링 등 IoT 기반 영농 혁신을 선도해 온 경험이 있다. 이 기반 위에서 스마트 양조장 또한 구체화될 수 있다. IoT 센서와 AI 분석 기술을 접목하면 숙성 과정의 온도, 습도, 공기 흐름 등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고, 이를 관광 콘텐츠로 확장해 방문객이 숙성 공간을 직접 체험하며 제조 과정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제조 이력 추적, 디지털 시음 기록, 블록체인 기반 출하관리 등도 향후 적용이 가능하다.



세계적으로도 지역 양조장이 지역 경제에 기여한 사례는 많다. 대만의 카발란 증류소는 연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일본 홋카이도의 요이치 증류소 역시 지역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이 남해군도 '기후-수자원-기술'의 삼박자를 갖추게 된다면, 차별화된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최근 국내에서도 위스키 수요와 관심이 급증하고 있어, '지방의 프리미엄 위스키'라는 콘셉트는 충분한 시장성과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2022년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증류주 시장은 최근 5년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위스키의 경우 2022년은 2021년도 대비 229%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출고량은 증류식 소주와 위스키가 각각 4,829kl와 382kl에서 133,171kl와 19,162kl로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템과 영역에 깊게 파고드는 디깅(Digging) 소비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프리미엄 수제 위스키와 같은 고부가가치 주류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추세는 남해가 지역 특성을 살려 고품질 증류주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현실적 과제도 있다. 전문 인력 확보, 초기 투자비용, 오크통 및 원재료의 수입 의존도, IoT 설비 유지비용 등이 그 예다. 공급망 안정화와 판로 개척 등도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기존 국내 위스키 브랜드와 협력해 남해에 숙성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초기 시설 활용도를 높이고 투자 부담을 분산하는 방식이다.

둘째, 증류주 스타트업이 입주할 수 있는 공용 생산·숙성 공간을 조성하여 창업 실험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수익 기반을 마련해 스마트 위스키 양조장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해군 행정의 적극적 지원과 지역사회의 공감대 형성이 뒷받침된다면 이러한 구상은 현실화될 수 있다. 스마트 위스키 양조장이 남해의 경제와 관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다시금 사람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정을 쌓는 문화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마치 멋진 술을 마시듯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지역, 남해가 그렇게 다시 기억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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