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의 핵심 방패, 미조항진(彌助項鎭)은군사와 행정 기능 아우른 복합 공간
미조항진은 성곽과 성내 건물, 굴항(掘港)과 선소(船所)를 기반으로 조선 수군의 핵심
해상 방어 및 군수 보급을 담당하며 군사와 행정 기능을 아우른 복합 공간이었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09월 12일(금)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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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오늘날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 자리한 미조항진(彌助項鎭)은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약 500년 가까이 조선 수군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하며, 왜구(倭寇)의 침탈을 막고 해상 방어를 수행하며 남해 바다를 지켜온 최전선이자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다. 미조항진은 1486년(성종 17) 설치되었으나 왜구의 공격으로 함락되자 폐지되었다가, 1522년(중종 17) 돌로 성곽을 축조한 이후 수군 작전뿐만 아니라 행정·통신·경제 기능이 결합된 복합 공간으로서 남해안 방어망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지방도 『미조항진지도(彌助項鎭地圖, 1872년)』와 『영남읍지(嶺南邑誌, 1871년)』를 통해 우리는 미조항진의 구조와 기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는 성곽(城郭)과 내부 건물, 군영(軍營)뿐만 아니라 굴항(掘港)과 선소(船所), 봉수대, 민가와 섬 지명까지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미조항진이 단순한 군사 요새를 넘어 지역 생활과 바다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첫째, 진성과 성내 건물, 둘째, 항만과 해상 방어 체계, 셋째, 봉수망과 지역 생활, 넷째, 미조항진의 역사적 의미'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미조항진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진성(鎭城)과 성내(城內) 건물 · 수군 지휘와 행정의 중심
조선 전기 남해안은 왜구(倭寇)의 잦은 침탈로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다. 일본 열도에서 군웅할거 속에 해적화된 무리는 남해안 연안을 습격하여 어민과 물자를 약탈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이미 남해 일대에 군선(軍船)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종 17년(1486년)에 소규모 보(堡)를 설치해 수군을 주둔시켰는데, 이것이 미조항진의 기원이다.
그러나 초기 방어선은 취약하여 왜구의 공격에 쉽게 함락되었다. 이에 중종 17년(1522) 조정은 돌로 성곽을 쌓아 미조항진을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하였다. 1786년(정조 10) 무렵 편찬된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6b 면에 따르면, 미조항진의 성곽은 둘레 2,146척(약 650m), 높이 11척(약 3.3m)으로 남해안의 거센 바람과 파도를 견디는 견고한 방어 시설이었다. 단순한 파수처(把守處)를 넘어 군영 체계와 지휘 기능을 갖춘 본격적 군사 거점으로 재편된 것이다. 성곽에는 동문·남문·서문과 함께 해군 기지 출입구 역할을 한 수문(水門)이 설치되어 육상과 해상을 동시에 연결하는 구조를 갖추었다.
성 내부 건물 배치는 군영이자 행정 관서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지도에는 첨사(僉使) 관아와 전패(戰牌)를 봉안한 객사가 '전각(殿閣)'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첨사의 집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아사(衙舍), 무기와 군수를 보관하는 군기고(軍器庫), 화약 보관소인 화약고(火藥庫), 포를 운용하던 포청, 간부 회의 장소인 교청(校廳) 등 핵심 군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행정 실무를 맡는 이청(吏廳)과 전선(戰船)·병선(兵船)이 정박하던 선소(船所)까지 기록되어 있다.
중종 39년(1544), 미조항진에는 첨사(僉使, 무관 종3품)가 파견되어 남해, 상주포, 사량진, 당포 등 연안 방어를 총괄했다. 그리고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1786, 6b)』에는 첨사 아래에는 군관(軍官) 3명, 진리(鎭吏) 29명, 지인(知印) 14명, 사령(使令) 8명이 배치되었다. 군사력으로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정찰용 시후선(伺候船) 2척이 운용되었다. 병력 편제는 노를 젓는 능노군(能櫓軍) 153명, 활을 쏘는 사부(射夫) 28명, 화포 담당 10명, 포수(砲手) 34명, 봉수군(烽燧軍) 20명이었다. 능노군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전선(戰船)의 기동력이 해전의 승패를 좌우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활과 화포 병력이 함께 배치된 점은, 기동성과 화력을 양축으로 삼아 해전을 수행했음을 잘 드러낸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미조항진은 남해 연안을 방어하는 실질적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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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과 항만 · 굴항(掘港)과 선소(船所)의 해상 기동력
성곽(城郭) 밖으로 나서면 미조항진이 단순한 육상 요새가 아님이 드러난다. 지도의 세밀한 묘사에서 확인되듯, 이곳은 바다와 긴밀히 연결된 군사 항만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시설은 굴항(掘港)이다. 이는 인공으로 판 군사 전용 항구로,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이 정박하며 출동 준비와 보급, 수리를 진행하는 핵심 거점이었다. 일상적인 어항과 달리, 군사 작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또한 선소(船所)가 자리하여 전선과 병선을 계류하고 군수품을 보급하였다. 선소에서 출발한 군선들은 곧바로 굴항을 거쳐 남해의 거친 바다로 나아가 방어망을 형성했다.
또한 지도에는 미조도(彌助島)를 비롯해 소조도(小鳥島), 대조도(大鳥島), 호도(虎島), 사도(蛇島), 와도(蛙島), 묘도, 갈도(葛島), 두도(豆島), 수우도(水牛島), 마안도(馬鞍島), 사량도(蛇梁島), 추도(楸島), 두미도(頭尾島), 노대도(櫓大島), 욕지도(欲智島) 등 주변 섬들이 빼곡히 표시되어 있다. 각 섬은 단순한 지리 표기가 아니라 해상 경계와 길잡이를 확보하기 위한 실용적 지명법이었다. 특히 욕지도와 그 너머 통영, 미륵산까지 표시된 점은, 미조항진이 미조 앞바다만이 아닌 남해안 전역과 통영 수군 본영을 연결하는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진 180리(自鎭 一百八十里)'라는 기록은 미조항진에서 통영까지의 거리로, 함대 이동과 보고 체계를 구체적으로 가늠하게 한다.
▲ 봉수망(烽燧網)과 생활 지형 · 정보와 일상의 연결
미조항진 지도는 군사 시설뿐 아니라 당시 지역 사회의 생활상까지 담고 있다. 먼저 봉수망 체계가 두드러진다. 금산(錦山) 봉수대(烽燧臺)가 미조항진과 연결되어 상주포·사량도를 거쳐 중앙까지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였다. 봉수는 단순 화재 연기 신호가 아닌, 남해 연안 정보망의 핵심이었다. 특히 「미조항진지도(彌助項鎭地圖)」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특히 미조 망산(望山) 정상(해발 286m)에 위치한 망산봉수대(望山烽燧臺)는 간봉(間烽) 기능보다는 영(營)과 진(鎭)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읍(本邑)과의 연락을 위해 운영되는 권설봉수(勸說烽燧)였다고 미조면지(彌助面紙, 2020년)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지도에는 "北鎭防禦營之古基社倉場市無(북진방어영지고기사창장시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북진 방어영의 옛터에는 사창(社倉)이나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군사적 변화와 함께 지역 경제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어민과 주민들은 성곽 주변에 거주하며 군사 활동을 지원하고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갔다. 군영과 민가가 뒤섞인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조선 후기 연해 항진이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군사·생활·경제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 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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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항진의 역사적 의미와 오늘
고종 32년(1895) 군제 개편으로 전국의 수군 진영이 폐지되면서 미조항진도 역사 속에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 말기까지 별포군(別砲軍) 50명이 주둔했다는 기록은 남해 연안의 안보 불안이 여전히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미조초등학교 인근에서는 성곽의 잔재가 발견되며, 무민사(武愍祠) 제향(祭享), 봉수대(烽燧臺) 터, 절충장군 권희학(權喜學) 외 여러분의 불망비(不忘碑) 등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 주민들에게 미조항진은 단순한 옛 성지(城址)가 아니라, 조상들이 바다를 지켜낸 '방패'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한 지방의 수군진(水軍鎭)을 넘어, 왜구의 침입에 맞서 국가와 백성을 지켜낸 남해 해역의 방파제(防波堤)였다. 『미조항진지도』와 『영남읍지』에는 성곽 구조, 병력 편성, 항만 시설, 군선 운용, 봉수망 연결 등 군영 운영 체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는 단순한 군사 기록을 넘어, 바다와 더불어 생존했던 조선인의 생활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제 과제는 남해군에 주어진다. 미조항진을 단순한 성지(城址)가 아니라 해양 국방사(國防史)의 현장 교육장으로 재조명하고, 축소된 성곽 복원과 유적 정비, 고문헌과 고지도의 전시를 통해 체계적인 보존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지역 관광을 넘어, 남해군민의 정체성과 해양 영토 의식을 함양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조항진은 단순한 폐허의 흔적이 아니라, 선조들의 지혜와 용기를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 교훈이자, 지역 문화유산 재생의 거점으로 거듭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지도와 문헌에 남은 세밀한 기록은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당시의 해상 방어 체계와 지역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며, 남해 바다의 역사를 미래로 잇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