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임진성 교훈, 남해를 지키는 힘은 민·관·군 공동체 협력이었다
"전쟁의 위기 속 민·관·군이 함께 지켜낸 기억은 지역 정체성과 연대의 귀중한 자산이다"
"작은 산성이지만, 해상방어의 핵심 역할을 해왔으며,집수지(集水池)와 수천 개의 석환(石丸)이 그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0월 02일(목) 09:51
▲ 「동문지(東門址)에서 바라본 임진성 외부 성곽모습」
▲ 「동문지(東門址)에서 바라본 평산포만(平山浦灣)의 모습」



▲ 임진성 집수지 모습
▲출토된 석환(石丸, 투척용 몽돌) 모습




남해군 남면 상가리의 구릉 정상에는 사람 머리보다 조금 큰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성곽(城郭)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약 6m, 둘레 286m에 불과한 아담한 작은 산성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날 경상남도 기념물 제20호(1974년 12월 28일 지정)로 보호되고 있는 임진성(壬辰城)은 임진왜란 때 급히 축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 조사(2014~2016년)와 다양한 문헌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 기원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임진성은 바다와 백성을 지켜낸 산성으로써 오랜 세월 남해를 지켜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성벽 주변에서는 당대 산성의 축조 기법과 특유의 유물, 투석용 몽돌(석환) 등도 확인되어, 우리나라 성곽사(城郭史)의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평가를 받는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임진성(壬辰城)은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켜낸 생존의 현장이었다.
성안에서 발견된 석환(石丸, 둥근 몽돌)과 집수지(集水池), 그리고 '민보성(民堡城)'이라는 이름은 임진성이 단지 돌로 쌓은 산성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협력과 연대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그 의미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통일신라에서 조선까지 이어진 해상 방어(海上防禦)의 맥



임진성은 해발 108m 기림산(起林山) 제2봉 정상에 자리한다. 이곳에 오르면 서쪽으로 평산포만(平山浦灣), 남쪽으로는 한때 바다였으나 오늘날 간척으로 매립된 옥포(玉浦)가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여수까지 조망할 수 있다. 입지 자체가 왜구(倭寇)의 침입을 감시하고 바닷길을 통제하기에 적합했던 것 같으며, 전략적 요충지로 군사적 가치도 매우 높았다.


발굴 결과 성벽(城壁) 하단부는 장방형(長方形) 다듬돌을 정연히 쌓은 바른층쌓기(돌의 층을 일직선으로 맞추어, 수평 줄눈이 연속되게 쌓아 올리는 건축 방식)로, 통일신라 시기의 축성 기법을 보여준다. 상단부는 깬돌을 쌓은 허튼층쌓기(돌의 층을 맞추지 않고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로, 조선 후기 보수 흔적이 확인된다. 또 성벽 기저부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산성에서 보이는 보축 구조를 따르고 있어, 임진성이 한 시기만의 산성이 아님을 분명히 증명하며, 오랜 세월 여러 시대에 걸쳐 활용되었음을 알려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임진성은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직자(軍職者)인 권관(權管, 종9품의 守將)이 파견되었으나,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주민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 기능은 단순한 피난의 공간에만 그치지 않았다. 기록에는 성내(城內)에 망대(望臺)·성루(城樓)·감시사(監示舍)·훈병사(訓兵舍)·탑대(塔臺)·서당(書堂)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완만한 경사지에 건물터와 집수지(集水池)만이 확인될 뿐이다. 이러한 흔적은 임진성이 실제로 방어 거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임진성은 통일신라를 기원으로 하여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시대마다 개축과 수리를 거듭해 온, 남해 해상 방어 체계의 '연속성의 산성'이었다.

따라서 민보성(民堡城)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수식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성내(城內)에서 발견된 석환(石丸)은 주민이 직접 방어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임진성은 권력의 도구로 쌓은 성벽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명과 삶을 지켜낸 '민의 성'이었다. 필자는 '민보성'이라는 별칭 역시 임진왜란 발발 당시 방치되어 있던 성을 민·관·군이 힘을 모아 보수하고 다시 축성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이 명칭은 공동체적 연대와 협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임진성은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을 통해 완성된 산성으로,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을 넘어 공동체 정신과 민중의 역량이 집약된 상징적 공간이다. 따라서 후대에도 반드시 계승·보존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임진성을 굳건히 지켜낸 한 사람, 고(故) 하주형(河柱亨) 옹을 기리며

오늘날 임진성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그 뒤에는 묵묵히 성(城)을 지켜온 한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바로 고(故) 하주형(河柱亨, 1924~1982) 옹이다. 행정이나 학계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던 1968년, 하주형 옹은 「임진성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어 1975년에는 전액 사비(私費)를 들여 블록조 2층 규모의 『임진성기념관(壬辰城記念館)』을 세웠다. 그는 학자도 공무원도 아니었지만, 마을 주민으로서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과 집념으로 임진성을 알리고 보존하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또한 그는 남해군 학생들에게 임진성의 유래와 이충무공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남해군 초·중등 임진성 백일장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 세대가 글과 시를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와 충무공 정신을 배우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하주형 옹에게 임진성은 돌로 쌓은 산성이 아니라, '민보성'이라는 이름처럼 지역 주민들의 삶과 정신을 이어주는 터전이었다. 특히 그는 유물과 자료를 모아 전시하고 연구를 지원하며 성곽(城郭)의 가치를 알리고자 했다. 문화재 보존이 국가의 몫으로만 여겨지던 시대에, 한 개인의 의지로 공동체의 기억을 지켜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임진성기념관'의 유물은, 유족의 전언에 따르면 중요한 유물은 남해군청 문화과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지만, 나머지는 도난당하거나 훼손되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고 한다. 「임진성기념관」 건물 또한 관리 부실과 노후화로 1999년 철거되어 지금은 터만 쓸쓸히 남아있으며, 옛날의 기억과 흔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는 그분의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그가 흘린 땀과 정성은 여전히 성벽 곳곳에 스며 있고, 지역민의 기억 속에 조용히 살아 있다. 늦었지만 남해군은 이분의 고귀한 뜻을 기려 임진성 성문 입구에 고(故) 하주형(河柱亨) 옹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그 숭고한 정신이 세월이 흘러도 오래도록 전해지게 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바람이 스치는 성곽을 바라보며, 후손들이 그의 삶과 헌신을 마음 깊이 되새기길 소망한다.
▲ 임진성 발굴 조사로 밝혀진 모습
▲ 임진성 발굴 조사로 밝혀진 모습
▲ 임진성 발굴 조사로 밝혀진 모습
▲ 임진성 발굴 조사로 밝혀진 모습



공동체가 지켜낸 역사, 오늘날 우리가 배울 교훈

오늘날 임진성은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 구간은 이미 보수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남해군은 성곽 주변에 오방기(五方旗)를 세우고 잡목을 정비하는 등, 역사적 가치를 살리면서 관광 자원으로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비록 '임진성기념관'은 사라졌지만, 고(故) 하주형 옹의 뜻은 지금도 지역민의 마음속에 이어지고 있다. 임진성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지역을 지키는 힘은 공동체의 협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민·관·군이 함께 지켜낸 기억은 오늘날에도 지역 정체성과 연대의 귀중한 자산이다.
작은 산성이지만, 임진성(壬辰城)은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해상 방어 체계, 수천 개 석환(石丸)과 집수지가 보여주는 방어 전략, 임진왜란 당시 '민보성(民堡城)'의 기억까지 품고 있다. 임진성은 단순한 옛 성터가 아니라, 남해 지역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상징하는 현장이자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제 우리의 몫은 분명하다. 돌 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 깃든 이야기를 올바로 계승하고 기록하며 후손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임진성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길이며, 우리 시대가 짊어진 소중한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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