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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 속 남해현(南海縣)의 지리와 역사
1871년 『영남읍지』 남해현의 역사·행정·지리·읍성 구조·방리 체계·호구와 전결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기록,
당시 남해현의 시대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

남해미래신문
2025년 11월 17일(월) 10:04
▲1871년 『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조선 후기 지역사회와 행정, 그리고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서 편찬된 읍지(邑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읍지는 단순히 지리와 행정 구획만이 아니라, 농업과 어업, 교통과 군사, 사회와 문화까지 당시 지역의 총체적 실상을 담아낸 기록이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남해현읍지(1786년, 서울대학교 奎 17464)』에는 경상도 남해현에 관한 각종 기록이 집약되어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1871년 『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현 읍지 도입 부분
▲ 「1871년 『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 읍성 기록


조선 후기의 읍지(邑誌)는 한 지역의 역사와 지리, 사회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지방 백과사전이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영남읍지(嶺南邑誌)(1871년, 奎 12173, 2책 102a~121b)』는 1871년에 편찬된 읍지로,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의 현황을 자세히 담고 있다. 이 읍지는 당시 지역사회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로서,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연혁, 행정 조직, 방리 체계, 호구와 전세(田稅), 군사·해방(海防) 체계, 문화·교육 시설, 향토 인물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특히 맨 앞에 첨부된 채색 지도는 남해읍성과 주변 진보(鎭堡), 선소(船所), 도로망까지 시각적으로 보여 주며, 남해가 단순한 작은 고을을 넘어 해방(海防)의 거점으로 기능했음을 잘 보여 준다.
본 글에서는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기록된 남해현의 모습을 네 가지 큰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남해현의 역사 연혁과 행정 체계, 둘째는 읍성 규모, 지리와 방리, 호구와 전결 현황, 셋째는 군사·해방 체계와 진보(鎭堡)의 역할, 넷째는 문화·교육·인물과 지역 인식의 변화이다. 이를 통해 남해현의 전반적 실상을 살피는 동시에, 남해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남해현의 역사 연혁과 행정 체계

「남해현(南海縣)」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창선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邑治)는 오늘날 남해읍 서변리와 북변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해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690년)하였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에 지금의 이름인 남해로 개칭(757년)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대에는 현령(縣令, 종5품)을 두어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조선 태종(太宗) 대에는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후에 하동현을 다시 복설(復設) 하면서 진주에 속해 있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남해로 편입시켜 해양현(海陽縣)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양부곡을 다시 진주에 환속시키고, 본래의 이름인 남해현으로 돌아갔다.
세종(世宗) 대에는 곤명현(昆明縣)과 합하였다가 다시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남해현은 조선 후기까지 독립된 행정 단위로 존속하다가,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남해군(南海郡)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1896년)되면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06년 9월 28일에는 진주에 속했던 창선도(昌善島)가 남해군에 편입되면서 오늘날 남해군의 행정구역이 형성되었다. 『영남읍지』는 1871년 이전의 연혁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남해가 단순히 외딴섬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 특히 하동과의 병합과 분리, 곤명과의 통합과 분리는 남해가 행정적 경계에서 유동적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조선 후기까지 남해가 해양 방어와 지역 통치의 요지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읍성의 규모와 지리 및 방리, 호구와 전결 현황

1871년 『영남읍지』는 남해 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城池縣城石築 周二千八百七十六尺 高十三尺 女墻五百九十 擁城十八 有南北東西門 內有井一泉五 四時不渴我(성지현성석축 주이천팔백구십척 고십삼척 여장오백구십 옹성십팔 유남북동서문 내유정일천오 사시불갈아)"」 이를 풀이하면, '성지현(성곽과 성안의 못)의 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2,876척(약 1,340m, 1布帛尺 46.66cm,), 높이는 13척(약 6m)이다. 여장이 590개가 있으며, 옹성이 18곳이며, 남문·북문·동문·서문 네 곳에 문(門)이 있고, 성안에는 우물 하나와 샘 다섯 개가 있어 사계절 내내 백성들이 물이 마르거나 목마름을 겪지 않았다.'라며 나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편 『남해현읍지(1786)』에는 "有南北門(유남북문)"이라 하여 남문·북문 두 곳에 문(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1871년 『영남읍지』에는 남해읍성이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을 갖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문과 서문은 그사이에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남해읍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1450년) 9월 5일 경자 6번째 기사'의 원문 내용이다. "「南海縣邑城, 周回二千八百六尺, 高十二尺, 女墻高三尺, 敵臺十三, 門三有擁城, 女墻五百五十三, 城內泉三, 小渠一, 海子周回三千三十七尺」" 이 문구를 풀어보면 '남해현 읍성(南海縣邑城)은 성 둘레가 2천 8백 6척, 높이가 12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며, 적대(敵臺)가 13개소, 문(門)이 3개소인데 옹성(擁城)이 있고, 여장이 5백 53개, 성안에 샘이 3개소, 작은 도랑이 1개소 있고, 해자(海子)의 둘레는 3천 37척입니다.'
 또한 1871년 『영남읍지』는 남해현의 지리와 방리(坊里) 체계, 그리고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의 수치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먼저 방리 항목을 보면, 남해현은 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현내면(縣內面),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天面)이다. 각 면에는 여러 개의 리(里)가 있었으며, 읍성 내 관아로부터의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행정 관리 체계를 잘 보여 준다.
 호구 수를 보면, 전체 호수는 3,909호였고 인구는 17,335명이었다. 남자는 8,689명, 여자는 8,646명으로 비교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786년 남해현의 인구는 25,791명이었으나, 그로부터 85년 뒤인 1871년에는 약 8,456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인구 감소의 원인은 문헌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전결(田結)은 원장부(元帳簿) 기준으로 2,469결이었다. 이 수치를 보면 남해현은 조선 후기 기준으로 작은 고을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규모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남해는 비록 호구와 전결의 규모는 작았으나, 해상 교통과 군사 방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읍지에는 또 산천(山川)과 도서(島嶼), 도로(道路)와 교량(橋梁), 제언(堤堰, 제방과 방축) 등의 항목이 있어 남해의 자연 지리적 특징과 생활 기반을 보여 준다. 남해가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읍지 기록에는 도로와 교량, 제언 등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해 주민들의 생활상이 엿보인다.
 

△ 군사·해방(海防) 체계와 진보(鎭堡)의 역할

 남해현은 단순한 소읍이 아니라 조선 후기 해방(海防)의 요충지였다. 읍지 맨 앞에 실린 채색 지도에는 읍성과 진보(鎭堡), 선소(船所), 도로망이 그려져 있다. 특히 미조항진(彌助項鎭), 평산포진(平山浦鎭), 곡포(曲浦), 상주포(尙州浦)의 성곽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며,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곡포와 상주포 옆에는 "혁파(革罷)"라고 적혀 있어, 이 두 진보는 당시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邑治) 남쪽에는 선소(船所)가 표기되었고, 미조항진과 평산포진, 선소에는 각각 전선(戰船)을 그려 넣어 수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당시 남해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는 미조항진과 만호(萬戶)가 파견되는 평산포진이 있었다. 이는 남해가 왜구(倭寇) 침입을 막고 해상 방어를 책임지는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남해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지역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해방(海防) 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1871년 『영남읍지』의 군기(軍器) 항목에는 "경오(庚午, 1870년) 조 월과(月課) 연환(鉛丸, 납으로 만든 탄환)"이라 기록이 되어있어, 당시 군수품 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창고(倉庫) 항목에는 대원군 집권기에 설치된 사환미(社還米)가 기록되어 있어, 군량 확보와 관련한 새로운 제도의 반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군사와 방어체계는 남해현이 단순한 작은 읍이 아니라 조선 후기 국가 안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 문화·교육·인물과 지역 인식의 변화
남해향교대성전
보리암 전경

 1871년 『영남읍지』는 통치 기초 정보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교육, 인물에 관한 항목도 고르게 배치하였다. 항목에는 학교(學校, 향교), 단묘(壇廟), 능묘(陵墓), 불우(佛宇, 보리암, 화방사, 용문사, 망운암), 궁실(宮室), 공해, 누정(樓亭), 장시(場市), 역원(驛院), 목장(牧場), 형승(形勝), 고적(古蹟),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 관적(官蹟), 과거(科擧), 인물(人物), 제영(題詠), 비판(碑板), 책판(冊板)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남해현이 단순히 군사적 기능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을 유지해 왔음을 보여 준다. 과거 응시자와 향토 인물에 대한 기록은 지역 엘리트 집단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며, 단묘와 불우 항목은 유교와 불교의 종교적 기반이 공존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장시(場市)와 목장(牧場)의 기록은 남해 주민들의 생업 활동과 경제 기반을 알려준다.
 『영남읍지(1871년)』에 수록된 「남해현읍지」는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남해현읍지」와 항목 구성과 기술 내용 면에서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호구(戶口), 전부(田賦), 창고(倉庫)의 곡수(穀數), 군기(軍器) 등은 당시의 사실에 맞게 새로 기술되었다. 예컨대 전부(田賦) 항목은 균세전에서 "무오총(戊午摠)"이라고 하여 무오년(1858년)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적(官跡) 항목의 마지막 기사는 "조희춘 신미(1871) 8월 도임(趙羲春辛未八月到任)"이라 하여, 이 읍지가 1871년 8월까지 기록되었음을 보여 준다.
 현재 규장각에는 이 외에도 여러 종의 남해읍지가 소장되어 있다.
  1786년경 편찬된 『남해현읍지』, 1832년경 『경상도읍지』 수록본, 1899년경 『남해읍지』, 1907년경 『남해군읍지』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비교하면 남해(南海)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읍지가 주로 기초 정보 위주라면, 19세기 후반 읍지는 군사와 경제, 문화의 세부 항목이 강화되었다. 이는 대원군 집권기와 근대 전환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남해라는 지역의 기록에도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1871년 『영남읍지』 속 남해현의 역사적 의의

 1871년에 편찬된 『영남읍지』 속 남해현 읍지는 단순한 지방행정 문서가 아니라, 역사와 지리, 군사와 문화, 생활과 인물을 두루 기록한 종합적 자료이다. 이 읍지는 남해가 작은 섬 고을이면서도 해방(海防)의 거점으로서 조선 후기 국가 체제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대 상황에 따라 호구·전결, 군기, 창고 기록 등이 변화하는 양상은 지방 사회가 결코 정체된 공간이 아니라, 국가적 변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1871년 『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현 읍지는, 다른 여러 읍지와 비교해 볼 때 통치의 기초 정보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와 역사, 인물에 대한 인식까지 점차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영남읍지』 속 남해현은 단순히 과거의 한 고을이 아니라, 조선 후기 지방 사회의 축소판이자 해방(海防)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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