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 그리고 공동체를 지켜낸 남해의 성곽 이야기 (2)
남해미래신문
2025년 12월 19일(금)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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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城郭)은 단순한 담장이 아니라 나라와 지역을 지키며 백성의 삶을 품은 공동체의 울타리였다. 남해군에는 삼국~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23곳의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대국산성·임진성·남해장성·금오산성 등은 경남 기념물로 지정됐다. 성곽의 구조와 재료는 시대와 지형에 따라 달랐고, 출토 유물과 배치를 통해 당시 사회 조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 판각과 목장 기록에서도 성곽은 전략적 요충이자 백성 생활과 맞닿은 핵심 공간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복원·보존되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상당수는 훼손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앞서 다룬 16개 성곽을 제외한 7개 성곽을 소개하며, 우리 지역 군사 방어망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비자당산성, 남해 내해(內海)와 외해(外海)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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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비자당 배후의 구릉(해발 51.9m) 8~9부 능선을 두른 비자당산성은 '미자당산성'으로도 불리며, 남해도의 방어체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성곽이다.
성은 지족해협을 거쳐 사천만으로 이어지는 길목, 그리고 강진만을 향해 돌출된 반도형 독립 구릉 정상부에 자리하여 내해와 외해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산성의 북쪽은 완만하나 동·서·남쪽은 급경사로 되어있어 방어에 유리하였으며, 성고개성(城古介城)과 불과 2km 남짓 떨어져 서로 연계된 방어망을 형성하였다.
비자당산성은 대국산성, 성산토성, 임진성 등과 함께 남해 전역을 둘러싼 군사적 거점으로, 남해도를 지키는 테뫼식 산성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성곽의 축조 수법은 후대의 훼손으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남쪽 성벽은 편축식(片築式)으로, 외벽은 바른층쌓기 방식이 확인된다.
이는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체성은 등고선을 따라 내탁 형식의 석축으로 쌓았으며, 내부를 성내로 삼았다. 현재는 대부분 지형이 해안 매립으로 농경지로 변했으나 입지 조건만큼은 탁월하다.
성내에는 비자목이 인공 조림되어 있으며, 정상부 비자림 사이에는 계단식 건물지 유구(遺構)가 남아있고 주변에서는 기와편, 토기편, 인석(藺石) 등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는 성곽이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생활과 행정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유물과 축조 수법을 종합할 때, 비자당산e성은 통일신라를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 이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해상 교통로가 아닌 국가 방위의 최전선이었음을 말해준다.
오늘날 성터에 들어서면 바다와 내해가 한눈에 펼쳐져, 그 위용과 역할이 생생히 다가온다.
오랜 세월 풍파에 흔적은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남해의 하늘과 바람 속에서 성은 우리에게 묵묵히 말을 건넨다. 그것은 지켜야 할 바다와 고향, 그리고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역사이다.
△ 창선목장토성(昌善牧場土城), 바다 위 목마장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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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창선면 상죽리 토성골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운영되었던 창선목장토성이 자리하였다.
창선목장은 남해 창선도의 남서쪽 말단부에 위치하며, 남쪽에는 지족고성이 자리하고 있다.
『진주목창선도지도(晉州牧昌善島地圖)』에 따르면 목장의 범위는 상죽리와 옥천리 배후 일대로 추정되며, 상죽리 배후에는 목관(牧官)이 설치되고 토성골 일대에는 점마장(點馬場)이 운영되었다.
또한 지도에는 남산제마당(南山祭馬堂) 등 관련 시설도 묘사되어 있어 이곳이 단순한 방목지가 아니라 제의(祭儀)와 행정(行政)이 함께 이루어졌던 종합적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조사 결과 토성골 일대에서는 와편, 도기편, 자기편 등이 채집되어 이곳이 실제로 말(馬)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창선목장(昌善牧場)의 운영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목관(監牧官) 선정비(善政碑) 등을 통해 조선 후기 18~19세기에 이 목장이 크게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이 정책적으로 운영된 것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대(文武王代)에는 '거( 목장)'라 불린 목마장이 174개소에 달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군사·교통·통신의 필요로 전국 각지에 국영 마장이 설치되었다. 특히 원 간섭기 충렬왕대(忠烈王代)에는 일본 정벌을 위해 도서 지역에 대규모 도거를 설치하여 산마개량에 힘썼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국방을 위한 산마사업(産馬事業)이 활발히 추진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점차 쇠퇴하여 조선 말기에는 대부분 폐장되었다. 창선목장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운영된 도거의 한 사례였다. 농경에 불리한 도서 지역에 목장을 두어 말을 기르는 것은 섬과 반도의 지형적 조건을 활용한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오늘날 비록 토성의 흔적은 경지 조성과 개발로 인해 사라졌지만, 바다와 맞닿은 창선도의 산곡(山谷)에서 말을 기르던 옛 풍경은 지도와 유물을 통해 되살아난다.
바람이 스쳐 가는 토성골 언덕에 서면, 그 위를 달리던 말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듯하다. 사라진 흔적은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우리의 역사와 삶이 바다와 맞닿아 이어져 있음을 일깨운다.
△ 지족고성(只簇古城), 해안을 따라 뻗은 돌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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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신흥마을에 위치한 지족고성(只簇古城), 일명 지족해변성(只簇海邊城)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사용된 석축성으로, 남해 당저리 해창마을에서 신흥마을까지 해안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城)은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어 평면 형태가 부정형이며, 장성(長城)에 가까운 모습이다.
현재 확인되는 성곽의 길이는 약 3.3km에 이른다.
지족고성(只簇古城)의 남쪽은 지족해협에 면하며, 맞은편으로는 창선도가 자리 잡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입지였다.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성벽(城壁)은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방패막이었으며, 남해 해역의 요충을 지키는 전초선의 역할을 하였다.
성곽 축조 수법은 지대석 위에 대형 할석(割石)을 한 단 들여 수직에 가깝게 쌓고, 면석 사이의 틈은 잔돌로 채워 견고함을 더했으며, 적심(積心) 또한 할석으로 메워져 있다. 이는 조선 전기에 축조된 연해 읍성과 동일한 기법으로, 지족고성이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신흥마을 서쪽 말단부 선착장에는 굴강(掘江)이 남아있어, 당시 성곽이 단순한 방어선을 넘어 해상 교통과 군사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조사에서도 성벽의 기단석과 허튼층쌓기 기법이 확인되며, 읍성이나 영진보성과 유사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벽의 폭과 높이에서는 차이를 보여 지족고성만의 독자적 성격을 드러낸다.
지족고성(只簇古城)은 문헌에 직접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남해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성벽의 위용은 당시 방어체계의 긴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도로와 마을 사이에 남아있는 성벽이 옛 흔적을 말없이 전할 뿐이지만, 그 속에는 파도와 맞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의지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바다와 나란히 이어진 돌의 장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변함없는 울림을 준다. 그것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역사의 파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수호의 정신이다.
△ 노량산성(露梁山城), 남해를 품은 기억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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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산성(露梁山城)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산54번지, 표고 158.3m의 산성산 정상부에 위치한 조선시대 산성(山城)이다. 이곳은 남해도의 북서쪽 끝에 해당하며, 하동과 맞닿은 노량해협(露梁海峽)을 굽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산성산은 교통과 군사적 가치가 높아 조선 태종대(太宗代)에 만호(萬戶)가 설치되었고, 인근에는 덕신역(德新驛)과 노량원(露梁院)이 자리하여 남해로 드나드는 첫 관문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입지는 해상과 육지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산성(山城)은 자연석을 활용한 테뫼식 석축으로, 둘레는 약 1.5km에 이른다.
축조 수법은 내탁식 허튼층쌓기를 기본으로 하고 상부는 협축하여 일반 담장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성 내부 중앙에는 건물지 초석이 남아있으며, 남쪽 경사면에는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개구부(開口部)가 확인된다.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성곽의 규모는 동서 약 68m, 남북 약 200m, 둘레 약 484m로 조사되었다.
현존 성벽은 대체로 높이 1~2m 정도이나 일부 구간에서는 4m 이상의 체성이 확인되어 원래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민묘와 참호 등 근대의 시설로 인해 성곽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노량산성(露梁山城)은 비록 지금은 폐허처럼 남아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남해현 역원조, 德新驛, 在縣北三十五里, 露梁院, 在露梁南岸. 去縣北四十里.』과 『태종실록(太宗實錄), 권14, 7년 정해 7월 27일, 慶尙道兵馬節制使姜思德以各浦事宜上書』의 기록은 이곳이 과거 군사·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증언한다.
성벽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는 임진왜란의 치열한 전장을 떠올리게 하며, 돌마다 새겨진 세월의 숨결은 옛 군사들의 호흡을 전하는 듯하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노량산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남해의 역사와 기억을 품은 산성으로써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구도성(龜島城), 임진왜란의 숨결을 품은 섬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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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성(龜島城)은 남해군 창선면 부윤2리에 축조된 조선시대 진성(鎭城)으로,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 좁은 해협 중앙에 위치한 구도(龜島)에 세워졌다. 성곽은 섬 중앙과 서쪽을 감싸듯 축조되었으며,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입지를 지녔다. 특히 섬 북쪽의 석축부는 '예방끝'이라 불리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조선 수군이 매복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은 구도성이 단순한 석축이 아니라 남해 바다를 지켜낸 방어 거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구도성에는 부속시설로 굴강(掘江)이 있었으나, 현재는 매립되어 논으로 변했다. 성 내부 또한 대부분 경작지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경 경작 과정에서 대완구(大碗口)와 동전(銅錢) 등이 출토되었다는 기록은 구도성이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생활의 흔적도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물은 구도성이 단순한 진성의 성곽을 넘어, 섬 주민들의 삶과 맞닿아 있었던 생활사적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구도성은 대부분 훼손되어 옛 위용을 찾기 어렵지만, 섬의 지형과 전승은 여전히 그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석축의 흔적은 조선 수군의 숨결을 떠올리게 하며, 평범한 경작지로 변한 성터에서도 시간의 깊은 결이 묻어난다. 구도성은 지금은 잊힌 듯 서 있지만, 바다의 바람과 파도 속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우리에게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 옥기산성(玉琦山城), 바다와 육지를 굽어본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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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기산성(玉琦山城) 또는 호포진성(湖浦津城)은 남해군 서면 대정리 382번지, 옥기산(玉琦山, 해발 252m) 정상부 외곽을 따라 축조된 조선시대 석축 산성이다.
산성은 테뫼식 타원형으로, 서쪽 소형 만과 남해도 서쪽 바다를 조망하기 유리한 위치에 자리한다. 입지적 정황으로 볼 때, 서상에서 평현을 거쳐 남해읍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차단하거나, 대정리 일대 둔전(屯田)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주민들이 방어를 위해 축성했다는 전승도 전하지만, 문헌상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성곽의 잔존 상태는 불량하여 성기(城基)와 축조 방법을 관찰하기 어렵다.
성석(城石)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할석을 사용하였고, 체성은 양쪽에서 마주 쌓는 허튼층쌓기 방식을 취했다. 남측은 해안이 가장 잘 관찰되는 지점으로, 망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300m, 최고 높이 2m, 폭 1.5m이며, 남쪽에 문지 흔적이 확인된다. 전반적 축조 수법은 전기 노량진성과 유사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산성으로 짐작된다. 옥기산성은 현재 대부분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산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서쪽 바다와 동쪽 남해읍을 연결하는 지형은 당시 방어와 관망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산성과 바다가 만나는 풍경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조선 수군과 주민들의 긴장된 호흡이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지만, 돌 하나하나에 깃든 역사의 숨결이 옛 방어 거점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남해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 남해 선소왜성(船所倭城), 전란의 흔적을 간직한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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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선소왜성(南海 船所倭城)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재발의 불길 속에서 남해읍 선소리 윤산(輪山) 천남대(天南臺)에 축조된 왜성(倭城)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축성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소 요시토시가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약 1년간 주둔하였다. 성은 본환(本丸, 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핵심 공간)을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외성이 도로와 주택으로 훼손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천남대 일대의 내성 석축은 여전히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전란의 상흔을 전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남해문화유산(1988), p132~133, 남해문화원』에 따르면, 왜군이 철수하면서 병장기를 매몰하였다는 토총형(土塚形) 봉토가 전해지나 이는 왜성의 본환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언덕 정상부에는 세 겹의 성곽을 올리고 지휘부 역할을 했던 천수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소왜성은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남해의 바다를 장악하려는 일본군의 전략 거점이었으며, 당시 조선 수군과의 치열한 대립 현장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선소마을 부둣가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남아있다. 바다 끝자락의 커다란 바위에는 가로 131cm, 세로 253cm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새겨진 남해 장량상 동정마애비(南海 張良相 東征磨崖碑)가 자리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이 비석에는 덩굴 문양인 당초문(唐草文)이 둘러 새겨져 있어 전란 속에서도 문화적 흔적이 함께 남아있음을 알려준다. 오늘날 논과 밭, 해안도로로 변한 왜성지(倭城址)를 거닐다 보면, 전란의 비극과 함께 세월을 넘어선 역사의 숨결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결론적으로 남해군의 성곽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시대마다 지역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품어온 공동체의 중요한 유산이다. 대국산성·임진성에서 남해장성·고현산성에 이르기까지 성곽은 군사·행정·생활 기능이 어우러진 지역 거점으로 작동했다. 비록 많은 성곽이 훼손되었지만, 남아 있는 성벽과 터는 옛 지혜와 공동체적 삶의 흔적을 전하며, 오늘 우리에게 역사적 기억의 의미를 일깨운다. 이러한 성곽 유산은 남해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자, 후대가 보존하고 연구해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성곽을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적 가치의 재해석과 활용은 지역의 미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