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일연 선사와 남해, 그리고 대장경 뿌리를 찾아서
일연 선사가 남해에서 수행한 재조대장경 감수와 '중편조동오위' 편찬은
국난 속에서 문화적 자주성과 불교사상의 심화를 동시에 이뤄낸 중대 전환점

남해미래신문
2026년 01월 02일(금) 09:36
▲ 파손이 심한 보각국사비와 2006년 새로 세워진 보각국사비

고려 후기 승려 일연(一然, 1206~1289) 선사는 민족의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 가운데 1249년부터 약 12년간 남해(南海)에 머문 시기는 사상적 깊이와 국가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기간 일연(一然)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즉 팔만대장경 판각 사업에서 학문적 검수와 정오 작업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불력(佛力)을 통한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또한 남해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는 동안에는 선종 사상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집필하며 학문적 정진을 이어갔다. 본 글에서는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일연 선사의 남해(南海) 체류 활동을 되짚고, 그가 남긴 업적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일연 선사 표준영정(1985년 지정)




△ 일연 선사와 남해의 인연, 국난 속 재조대장경의 서막과 시대적 배경



일연(一然) 선사가 남해에 머물렀던 시기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때이다.
국가적 존망(存亡)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실과 무신정권은 불력에 의지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재조대장경 조성 사업에 담아 추진했다.
현종(顯宗, 991~1031) 때 거란 침입에 맞서 제작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 몽골군의 방화로 소실되자, 고려는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재조대장경 조성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단행한다.
이 사업은 단순한 불경의 집성을 넘어 고려 후기 문화 역량을 집대성한 상징적 유산이자, 국난 극복을 향한 민족적 의지가 담긴 거대한 문화 프로젝트였다.
일연 선사의 남해 주석(駐錫)은 바로 이 대역사의 후반부와 맞물려 시작되었다.
1249년(고종 36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이(崔怡, 1166?~1249, 고려 무신정권 제2대 집권자로 최씨 무신정권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의 처남이자 재조대장경 조성 사업의 핵심 인물이었던 정안(鄭晏)의 공식 초청으로 남해에 내려왔다.
▲ 파손이 심한 보각국사비와 2006년 새로 세워진 보각국사비

『인각사보각국사비문(麟角寺普覺國師碑文)』에는 당시의 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己酉, 鄭相國晏捨南海私第爲社, 曰定林, 請師主之."(기유, 정상국안사남해사제위사, 왈정림, 청사주지, 기유년(1249년)에 정상국 정안이 남해에 있는 자신의 사저를 사(社)로 기증하여 정림(定林)이라 이름하고, 스님에게 그 일을 주관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 기록은 일연의 남해행이 단순한 피신이나 휴양 목적이 아닌, 국가적 대역사의 학술적 중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공식적 초빙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정안은 자신의 사저를 정림사(定林社)로 희사하고 일연에게 주지를 맡겼는데, 이 정림사는 바로 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을 총괄했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위치한 핵심 현장으로 기능하였다.



△ 정림사에서 펼쳐진 대역사, 일연 선사와 팔만대장경 실질 완성 이야기



남해 정림사에 주석(駐錫)하며 수행한 일연 선사의 역할은 대장경 조성 사업의 학술적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추였다. 그는 대장경 조성 실무를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인 증의(證義)를 맡았다. 증의는 불경을 번역하거나 간행할 때 내용의 정확성과 적절성을 검증하고 판별하는 권위 있는 역할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일연의 교학적(敎學的) 수준과 학문적 식견이 고려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았다는 방증이다.
대규모 국책사업에서 일연 선사는 학승(學僧)으로서 대장경의 내용적 신뢰성을 책임지는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업무는 단순한 명예직에 머무르지 않고, 팔만대장경의 결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일연은 판각이 완료된 경판을 세밀히 감수하여 오탈자를 바로잡고, 불경의 내용이 정확하게 반영되었는지 검토하는 정오(正誤) 작업을 수행했다.
이는 불교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저한 고증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둘째, 인경(印經)과 제책(製冊) 과정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서 지도를 맡아, 완성된 경판을 활용해 경전을 인쇄하고 책으로 엮는 전 과정을 감독했다.
셋째, 기존의 초조대장경에 누락되어 있거나 새롭게 포함할 필요가 있는 문헌을 선별하여 보판(補板) 작업을 주도함으로써, 대장경의 체제를 한층 더 견고하게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인각사보각국사비문』에는 일연의 문도(門徒) 12명이 조직적으로 판각에 참여하여 590여 장의 경판을 새겼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일연 선사가 단순한 초청 승려나 관리자를 넘어, 남해 분사대장도감 운영의 학문적·조직적 구심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일연의 이러한 치밀하고 헌신적인 활동은 고려 후기 혼란 속에서도 문화적 역량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의 완결성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 일연 선사가 길상암에서 이루어낸 학문적 정진과 『중편조동오위』 저술


일연 선사의 남해 활동은 단순히 대장경 사업이라는 공적 영역을 넘어, 그의 학문적 정진이 집약된 사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대장경 판각 작업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후원자였던 정안(鄭晏)이 무신정권 내부의 권력 다툼 속에서 피살되자, 남해 분사대장도감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이에 일연 선사는 정림사를 떠나 남해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그는 불교 철학을 정리하고 심화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실이 바로 선종(禪宗) 사상서인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이다.
 이 책은 조동종(曹洞宗)의 핵심 교리인 조동오위설(曹洞五位說)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작으로, 일연의 폭넓은 경학 이해와 깊은 사유가 응축된 중요한 저술이다.
 특히 서문에는 집필 과정과 그 의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문헌적·학술적 의의를 더욱 높여 준다. 아래는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서문에 등장하는 윤산 길상암(輪山 吉祥庵)에 관한 내용이다.
 "『越丙辰夏 寄錫輪山吉祥菴 因有餘閒 乃將舊本三家語句 務便檢閱 錯綜其辭 隨門夾入 依舊離爲冊』「월병진하 기석윤산길상암 인유여한 내장구본삼가어구 무편검열 착종기사 수문협입 의구리위이책」- 병진년(丙辰年, 1256년) 여름, 윤산 길상암(輪山 吉祥庵)에 머무는 동안 여가가 생기자, 옛 판본에 실린 세 스승의 어구를 가져와 독자가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재정리하였다. 복잡하게 얽힌 문장들을 분류하여 항목별로 배치하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두 권으로 나누어 완성하였다."
 
 이 기록은 일연이 1256년(고종 43년) 남해 윤산 길상암에서 이 중요한 불서를 편집·정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문헌이다. 그는 길상암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당호(堂號)를 '봉소헌(鳳巢軒)'이라 지었으며, 『중편조동오위』 서문에서도 "봉소헌에서 회연(晦然, 일연의 개명 전 이름)이 서문을 쓰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1899년 편찬된 『남해읍지』에 길상암의 위치가 윤산(남해의 별칭)에 자리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길상암의 실제 위치를 추정(推定)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근거가 된다.

 


△ 일연 선사의 남해 활동이 이룬 사상적 승화와 『삼국유사』 집필의 원천 및 시대정신

 
 일연 선사가 남해에서 보낸 약 12년의 경험은 그의 개인적인 행적을 넘어, 훗날 민족의 정신적 기반이 된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의 사상적 원천을 이룬다. 남해에 머문 시기 일연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대립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는 국가적 사업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을 통한 불력 구국(佛力救國)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혼란 속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통한 심오한 선종 사상의 탐구이다. 이러한 공적 활동과 사적 정진의 융합 과정에서 일연의 역사의식은 깊이를 더한다.
 대장경 조성에 참여하며 느꼈던 고려의 절체절명 위기감과 불력에 대한 염원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 민족의 자긍심과 역사의 주체를 재인식하려는 자주적 역사관으로 승화된다. 후에 집필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왕실 중심의 관점이었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달리, 불교적 관점을 바탕으로 우리의 고대사(古代史)를 기록하고 민간 설화, 전설, 신이(神異)한 기록 등을 광범위하게 보존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훼손되었던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역사의 주체를 백성과 신앙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일연(一然) 선사의 남해 활동은 그가 대선사 법계를 받은 후 강화도 선원사, 개경 운해사 주지를 거쳐 비슬산 인흥사에 머무르기까지 국가와 백성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삼국유사』 곳곳에 스며든 독창적 역사관과 설화 해석의 근저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남해에서 이루어진 그의 학문적 성과와 구국적 실천은 시대를 초월하여 『삼국유사』의 학술적, 역사적 가치를 뒷받침하는 굳건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 일연 선사 유산의 재조명을 통해 남해의 미래 가치를 역사 관광과 교육 자원으로 확장
 

 일연 선사가 머물렀던 정림사(定林社)와 길상암(吉祥庵)은 현재 정확한 위치가 부분적으로만 추정되고 있다.
 특히 정림사지(定林社址)는 분사대장도감이 설치되었던 남해 고현면 일대의 핵심 유적으로, 보다 체계적인 조사와 정비가 요구된다. 길상암의 위치는 1899년 간행된 「남해읍지」의 기록―"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는 현의 동쪽 5리 윤산(輪山) 남대 아래에 있으며, 천남대(天南臺)는 윤산 위에 있다"―를 근거로, 남해읍 차산·선소마을 일대의 윤산 주변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해군은 대장경판 판각지에 대한 학술 조사를 진행 중이나, 유적 복원이나 관광 프로그램 개발은 대부분 제안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일연 선사의 업적을 기리고, 남해가 지닌 역사적 정체성을 활용하는 데 있어 분명한 한계로 지적된다. 따라서 남해는 일연 선사와의 역사적 인연을 교육적·문화적 자산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역사 체험 공간 조성이다. 길상암 추정지와 정림사지 추정지를 연결하는 '일연 대장경 순례길'을 조성해, 방문객들이 걸으며 일연의 발자취와 대장경 조성의 의미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첨단 기술을 활용한 역사 복원이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유적의 모습을 VR·AR 기술로 복원하면, 대장경 판각과 일연의 저술 활동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어 교육 효과가 높아진다.
 셋째, 『삼국유사』를 활용한 스토리텔링과 축제다. 수로왕·박혁거세 등 남해와 연관된 설화를 발굴하여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활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매년 '일연 문화축제'를 개최하면 학술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동시에 지역 문화관광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처럼 남해의 정림사(定林社)와 길상암(吉祥庵) 유적을 활용한 프로그램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일연 선사의 학문적 깊이와 구국 정신을 기리며 지역 역사 교육과 민족 문화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남해 활동은 한 승려의 개인적 행적을 넘어, 국가적 위기 속에서 문화적 자주성을 지키고 민족 역사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중심지였다.
 남해 정림사에서 완성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길상암에서 집필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는 일연 선사(一然禪師)의 학문적 성취와 구국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현재 남해군에서 진행되는 학술 심포지엄과 유적지 조명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중요한 노력이다. 앞으로 일연 선사 순례길과 같은 역사 체험 공간을 개발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정신을 담은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면, 남해는 일연 선사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민족 역사와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사 교육의 산실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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