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존혁(劉存奕)은 1258년 무오정변에 참여 위사보좌공신으로 책록되었고,
1270년 삼별초 항쟁 당시 좌승선(左承宣)으로 임명되어 남해현에서 활동했다
2026년 01월 16일(금)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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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三別抄)는 13세기 고려 무신정권기 최우(崔瑀, ?~1249)의 사병 조직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자주적 항몽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특수 군사 집단이다. 이들의 항거는 단순한 무장세력의 반발 차원을 넘어, 40여 년에 걸친 대몽항쟁의 마지막 불꽃이자 고려인의 자주정신이 응축된 역사적 투쟁이었다. 지난해 남해군 서면 서호리 산 178-1번지에서 열린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2025.10.27.)에 따르면, '남해 대장군지(大將軍址)'는 삼별초 항쟁의 지리적 범위와 전략적 네트워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강화도·진도·제주도로만 한정해 이해되던 항몽사의 지평을 새로운 단계로 확장시키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이 글은 삼별초의 성격과 항몽 봉기의 전개, 남해 지역의 전략적 의의, 그리고 최근 이루어진 발굴 및 학술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삼별초 항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삼별초(三別抄)의 태동과 복합적 성격, 사병에서 호국군으로 나아간 과정
삼별초의 기원은 최우(崔瑀) 집권기에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였다. 야간 도적 방지와 치안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창설된 이 부대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며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편입되면서 삼별초라는 명칭이 완성되었다. 초기 삼별초는 본질적으로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사병(私兵) 성격을 띠었으며, 정변의 실행과 정권 유지의 핵심 무력을 담당하는 군사 기구였다. 당시 중앙군 조직인 2군 6위는 무력화된 상태였고,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실질적 군사 기반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반복된 몽골의 침략은 삼별초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국가적 위기가 심화되자, 삼별초는 단순한 권력의 무력 기구를 넘어 국가 방어와 사회 질서를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호국군(護國軍)으로 역할을 확장하였다. 특히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국왕과 조정의 방호 임무까지 담당하며 국난의 최전선에서 몽골과 싸웠다. 이처럼 삼별초는 사병·치안 세력·호국군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특수 군사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삼별초를 일방적으로 '정의의 군대'로만 보거나, 반대로 '사병 집단'으로 단순화하는 해석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군사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 개경 환도 반대와 자주적
항몽의 기치
삼별초 항쟁의 결정적 분기점은 1270년 조정이 강화도 천도(遷都)를 중단하고 개경으로 환도(還都)하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이는 약 40년간 유지해 온 항몽 체제를 포기하고 사실상 몽골 지배를 공식 수용하는 조치였다. 삼별초는 이를 '국권 포기'로 인식하였고, 고려의 자주적 체제를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가 되겠다는 결의로 독자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독자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를 떠나 남하하였고, 진도(珍島)에 용장성(龍裝城)을 축성해 새로운 항전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진도를 중심으로 한 삼별초 정부는 전라도 연안을 장악하며 강력한 해상 항전을 전개하였고, 몽골과의 직접 교전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 공격, 연안 거점 확보 등을 통해 독립적 국가 체제 수립을 시도하였다. 삼별초 항쟁은 무신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요소가 존재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삼별초의 봉기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의 항몽(抗蒙)은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국권 회복 의지, 그리고 몽골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당시 조정이 굴복을 선택한 상황 속에서, 삼별초는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무장세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유존혁과 남해가 지닌
제2의 항몽 거점으로서의 전략적 의의
그동안 삼별초 항쟁은 강화도·진도·제주로 이어지는 해상 전투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삼별초가 더욱 광범위한 남해안 해상 네트워크를 활용해 항몽 전쟁을 전개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유존혁(劉存奕)이다. 그는 1258년 무오정변에 참여해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270년 삼별초 항쟁 당시 좌승선(左承宣)으로 임명되어 남해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삼별초 정권이 진도에 수립될 때 고위 지휘관인 좌승선을 맡아 배중손(裵仲孫, ?~1271)과 함께 항전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43 배중손'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에 보이는 「"存奕據南海縣, 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八十餘艘從之"(존혁거남해현, 표략연해, 문적둔입탐라, 역이팔십여척종지, 유존혁은 남해현을 거점으로 연해 지역을 노략질하였는데, 적이 탐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뒤따랐다.」 이 기록은 그가 남해현(南海縣)을 근거로 연해 지역을 공격하며 항전을 이어갔고, 탐라로 이동하는 적을 추격하기 위해 대규모 선단을 직접 지휘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존혁이 남해에서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경상도 연안을 실질적으로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80척 선단' 기록이 당시 남해 주둔 병력 규모를 추산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선박 운용 능력과 병력 수용 규모를 고려할 때 남해 일대에 3천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주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며, 이는 학계에서도 학술적 추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더불어 최근 남해군 '대장군지(大將軍址, 서면 서호리)' 발굴에서 삼별초 성곽 추정 유적과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면서, 이곳이 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삼별초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으며 3천여 명 상당의 병력이 실제로 주둔했을 가능성이 국제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남해는 동서 해안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조운선(漕運船)이 오가는 핵심 항로로, 이를 확보하는 것은 전국적 항몽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유존혁(劉存奕)은 이 거점을 기반으로 조운선 공격, 군량 보급, 경상도 연안 장악 등 실질적 전쟁 수행을 담당하며 삼별초의 작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항쟁이 진도 중심의 단일 구조가 아니라, 진도-남해-제주로 이어지는 다층적 해상망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특히 1271년 진도 용장성(龍藏城)이 함락된 이후에도 유존혁이 8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탐라로 이동해 항전을 이어갔다는 기록은 남해가 삼별초 전략의 핵심 축이자, 지속적 항몽 의지의 기반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 남해 대장군지 발굴의
학술적 성과와 가치
남해군 서면 서호리 산 178-1번지에 위치한 대장군지(大將軍址)는 오랜 세월 지역 주민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유적이었으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 삼별초(三別抄)의 항몽 지휘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입증하였다.
5단 계단식 대지 위 대형 건물지와 견고한 축대는 이곳이 지휘·통제 기능을 갖춘 군사 시설이었음을 보여주며, 건물 배치가 진도 용장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1270년경 유존혁(柳存奕) 중심의 남해 삼별초 근거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청자 상감문병, 귀목문 막새 등 13세기 고려 유물의 다량 출토는 중앙 지휘층이 머물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시사한다. 이를 통해 삼별초 활동 범위가 강화-진도-제주를 넘어 남해 연안까지 확장되었음이 드러났고, 지역에서 전해오던 '대장군터' 전승이 고고학적 자료와 결합해 새로운 연구 기반이 마련되었다. 2024년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는 약 3천 명 규모의 삼별초 병력이 남해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조사에서는 3.5m 높이의 성곽 흔적, 5단 계단식 건축 공간, 배수로·담장 등 시설과 더불어 진도 용장성 출토품과 유사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는 남해가 진도와 함께 삼별초 정권을 지탱한 양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유존혁 장군 관련 유적이 없었으나, 2024년 발굴은 연구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유존혁은 진도 삼별초 정부와 연계해 경상도 연안을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며, 1271년 진도 함락 후 약 80척의 선단을 이끌고 제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남해에 약 3천 명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장군지'는 이를 모두 수용하기엔 규모가 작아 별도의 본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24년 조사로 확인된 계단식 대지와 유물은 '대장군지'가 13세기 고려 요새의 특성을 갖춘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청자와 막새, 전돌 등 고급 유물은 중앙 지휘부와 연계된 인물이 체류했음을 뒷받침한다. 향후 보존·활용을 위해 주변 토지 매입, 전면 발굴조사, 핵심 유구 정비가 필요하며, 전시·교육 공간 조성과 대몽항쟁 관련 유적의 통합 연구도 요구된다. 지역민의 구전과 학술 성과가 만나 '대장군지'의 가치가 새롭게 확인된 만큼, 남해를 삼별초 항몽사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는 그동안 강화도·진도·제주도로만 한정해 이해되던 항몽사의 지평을 새로운 단계로 확장시키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이 글은 삼별초의 성격과 항몽 봉기의 전개, 남해 지역의 전략적 의의, 그리고 최근 이루어진 발굴 및 학술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삼별초 항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삼별초(三別抄)의 태동과 복합적 성격, 사병에서 호국군으로 나아간 과정
삼별초의 기원은 최우(崔瑀) 집권기에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였다. 야간 도적 방지와 치안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창설된 이 부대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며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편입되면서 삼별초라는 명칭이 완성되었다. 초기 삼별초는 본질적으로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사병(私兵) 성격을 띠었으며, 정변의 실행과 정권 유지의 핵심 무력을 담당하는 군사 기구였다. 당시 중앙군 조직인 2군 6위는 무력화된 상태였고,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실질적 군사 기반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반복된 몽골의 침략은 삼별초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국가적 위기가 심화되자, 삼별초는 단순한 권력의 무력 기구를 넘어 국가 방어와 사회 질서를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호국군(護國軍)으로 역할을 확장하였다. 특히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국왕과 조정의 방호 임무까지 담당하며 국난의 최전선에서 몽골과 싸웠다. 이처럼 삼별초는 사병·치안 세력·호국군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특수 군사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삼별초를 일방적으로 '정의의 군대'로만 보거나, 반대로 '사병 집단'으로 단순화하는 해석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군사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 개경 환도 반대와 자주적
항몽의 기치
삼별초 항쟁의 결정적 분기점은 1270년 조정이 강화도 천도(遷都)를 중단하고 개경으로 환도(還都)하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이는 약 40년간 유지해 온 항몽 체제를 포기하고 사실상 몽골 지배를 공식 수용하는 조치였다. 삼별초는 이를 '국권 포기'로 인식하였고, 고려의 자주적 체제를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가 되겠다는 결의로 독자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독자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1,0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를 떠나 남하하였고, 진도(珍島)에 용장성(龍裝城)을 축성해 새로운 항전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진도를 중심으로 한 삼별초 정부는 전라도 연안을 장악하며 강력한 해상 항전을 전개하였고, 몽골과의 직접 교전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 공격, 연안 거점 확보 등을 통해 독립적 국가 체제 수립을 시도하였다. 삼별초 항쟁은 무신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요소가 존재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삼별초의 봉기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의 항몽(抗蒙)은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국권 회복 의지, 그리고 몽골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당시 조정이 굴복을 선택한 상황 속에서, 삼별초는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무장세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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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존혁과 남해가 지닌
제2의 항몽 거점으로서의 전략적 의의
그동안 삼별초 항쟁은 강화도·진도·제주로 이어지는 해상 전투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삼별초가 더욱 광범위한 남해안 해상 네트워크를 활용해 항몽 전쟁을 전개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유존혁(劉存奕)이다. 그는 1258년 무오정변에 참여해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270년 삼별초 항쟁 당시 좌승선(左承宣)으로 임명되어 남해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삼별초 정권이 진도에 수립될 때 고위 지휘관인 좌승선을 맡아 배중손(裵仲孫, ?~1271)과 함께 항전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43 배중손'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에 보이는 「"存奕據南海縣, 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八十餘艘從之"(존혁거남해현, 표략연해, 문적둔입탐라, 역이팔십여척종지, 유존혁은 남해현을 거점으로 연해 지역을 노략질하였는데, 적이 탐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뒤따랐다.」 이 기록은 그가 남해현(南海縣)을 근거로 연해 지역을 공격하며 항전을 이어갔고, 탐라로 이동하는 적을 추격하기 위해 대규모 선단을 직접 지휘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존혁이 남해에서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경상도 연안을 실질적으로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80척 선단' 기록이 당시 남해 주둔 병력 규모를 추산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선박 운용 능력과 병력 수용 규모를 고려할 때 남해 일대에 3천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주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며, 이는 학계에서도 학술적 추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더불어 최근 남해군 '대장군지(大將軍址, 서면 서호리)' 발굴에서 삼별초 성곽 추정 유적과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면서, 이곳이 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삼별초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으며 3천여 명 상당의 병력이 실제로 주둔했을 가능성이 국제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남해는 동서 해안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조운선(漕運船)이 오가는 핵심 항로로, 이를 확보하는 것은 전국적 항몽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유존혁(劉存奕)은 이 거점을 기반으로 조운선 공격, 군량 보급, 경상도 연안 장악 등 실질적 전쟁 수행을 담당하며 삼별초의 작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항쟁이 진도 중심의 단일 구조가 아니라, 진도-남해-제주로 이어지는 다층적 해상망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특히 1271년 진도 용장성(龍藏城)이 함락된 이후에도 유존혁이 8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탐라로 이동해 항전을 이어갔다는 기록은 남해가 삼별초 전략의 핵심 축이자, 지속적 항몽 의지의 기반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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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대장군지 발굴의
학술적 성과와 가치
남해군 서면 서호리 산 178-1번지에 위치한 대장군지(大將軍址)는 오랜 세월 지역 주민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유적이었으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 삼별초(三別抄)의 항몽 지휘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입증하였다.
5단 계단식 대지 위 대형 건물지와 견고한 축대는 이곳이 지휘·통제 기능을 갖춘 군사 시설이었음을 보여주며, 건물 배치가 진도 용장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1270년경 유존혁(柳存奕) 중심의 남해 삼별초 근거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청자 상감문병, 귀목문 막새 등 13세기 고려 유물의 다량 출토는 중앙 지휘층이 머물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시사한다. 이를 통해 삼별초 활동 범위가 강화-진도-제주를 넘어 남해 연안까지 확장되었음이 드러났고, 지역에서 전해오던 '대장군터' 전승이 고고학적 자료와 결합해 새로운 연구 기반이 마련되었다. 2024년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는 약 3천 명 규모의 삼별초 병력이 남해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조사에서는 3.5m 높이의 성곽 흔적, 5단 계단식 건축 공간, 배수로·담장 등 시설과 더불어 진도 용장성 출토품과 유사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는 남해가 진도와 함께 삼별초 정권을 지탱한 양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유존혁 장군 관련 유적이 없었으나, 2024년 발굴은 연구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유존혁은 진도 삼별초 정부와 연계해 경상도 연안을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며, 1271년 진도 함락 후 약 80척의 선단을 이끌고 제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남해에 약 3천 명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장군지'는 이를 모두 수용하기엔 규모가 작아 별도의 본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24년 조사로 확인된 계단식 대지와 유물은 '대장군지'가 13세기 고려 요새의 특성을 갖춘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청자와 막새, 전돌 등 고급 유물은 중앙 지휘부와 연계된 인물이 체류했음을 뒷받침한다. 향후 보존·활용을 위해 주변 토지 매입, 전면 발굴조사, 핵심 유구 정비가 필요하며, 전시·교육 공간 조성과 대몽항쟁 관련 유적의 통합 연구도 요구된다. 지역민의 구전과 학술 성과가 만나 '대장군지'의 가치가 새롭게 확인된 만큼, 남해를 삼별초 항몽사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