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오 '남해현기(南海縣記)'의 사료적 가치와 남해읍성 위치 고찰
정이오(鄭以吾)의 '남해현기'는 조선 초기 남해현의 행정·군사·경제 상황과 방어 체계를
상세히 기록, 당시 지역사회와 국가 방어의 연계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
읍성의 축성과 수군의 운용, 주민 보호 사례와 제반 문헌 자료를 검토하면,
남해현기는 읍성의 정확한 위치를 실증적으로 고증하는 데 중요한 근거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2월 27일(금) 13:40
|
『남해현기(南海縣記)』는 정이오(鄭以吾)가 조선 초기 남해현의 행정·군사·경제 실태는 물론, 읍성 축조의 경과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늘날 '남해읍성기(南海邑城記)'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통용되면서, 문헌의 본래 성격과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다소 흐려진 측면이 있다. 이에 본고(本庫)에서는 해당 기문(記文)을 국역하여 그 내용을 충실히 제시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련 사료를 면밀히 대조하여 옛 읍성 고현성(古縣城)의 축성 연대와 역사적 의미를 재검토하고, 이를 통해 『남해현기』가 지닌 사료적 성격과 위상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남해현기』를 통해 현성(縣城) 조성의 경위를 전한 정이오(鄭以吾, 1347~1434)는 진주(晋州)를 본관으로 하며,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이다.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조선 건국기에 이르러 태조 즉위년(1394) 지선주사에 제수되었고, 정종 2년(1400)에는 성균관 악정을 거쳐 태종 3년(1403) 대사성에 오르는 등 관학 정비와 학문 진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1418년, 72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世宗)의 명에 따라 태실증고사(胎室證古事)에 참여하여 진주 곤명(昆明)을 태소(胎所)로 확정하는 등 국가 의례와 왕실 제도 정비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는 그가 단순한 관료를 넘어 조선 초기 제도적 기반 형성과 문화적 질서 확립에 기여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이오가 집필한 『남해현기』는 단순한 지리지나 지역 안내서의 성격을 넘어, 당시 남해현이 처한 사회·지리적 환경과 방어 체계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남해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국가 재정의 주요 기반을 형성하였으나, 지형이 협소하고 험준한 데다 왜구의 빈번한 침탈이 계속되어 민생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정이오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만호(萬戶)와 관아(官衙)가 긴밀히 협력해 성곽을 정비하고 수군을 운용하며 봉수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외침에 대비하고 지역사회를 안정시킨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이처럼 군사·행정·경제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방어 전략을 역사적 사례와 연관 지어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오늘날 군사사(軍事史)와 지방사(地方史)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에 본문에서는 먼저 『남해현기』의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독자의 이해를 돕고,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쟁점들을 관련 사료와 면밀히 대조함으로써 문헌적 근거에 기반한 재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아울러 연구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글의 말미에 글의 원문을 수록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남해현기(南海縣記) 번역문
「정이오(鄭以吾)가 기록하기를, 남해는 현(縣)으로, 바다 섬 가운데에 있으며, 이른바 진도(珍島)와 거제(巨濟)가 서로 솟아 버티고 있다.
그 땅은 기름지고 비옥하며, 그 생물은 크고 또 번성하니, 나라가 이를 통해 얻는 자원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고을의 경계가 왜도(倭島)와 가까이 있어, 경인년(공민왕, 1350)부터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백성들은 사로잡히거나 혹은 흩어져 떠나가니, 현(縣)에 속한 평산(平山)과 난포(蘭浦)는 쓸쓸히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8년이 지나 정유년(丁酉年, 1357)에 이르러,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와 진양(晉陽)의 선천(鐥川)에 머물며 들에 거처하였다. 토지를 지켜 조세를 바치지 못하였고, 호적에 기록된 자와 재물이 나오는 땅은 모두 초야와 사슴이 노니는 벌판에 버려졌다. 그리하여 왜구의 근거지가 된 지 46년(태종 3년, 1403년)이 되었다.
모사(謀士)하는 신하와 지혜로운 장수들이 계책을 세움에 빠뜨림이 없어서,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수전(水戰)을 대비하고, 성곽을 세워 육지의 방비를 엄중히 하니, 적의 기세는 떨치지 못하고 날로 쇠하였다. 임금이 즉위한 지 4년째(태종 4년, 1404년)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천거하여 구라량(仇羅梁, 현 삼천포)의 만호로 임명하고, 아울러 남해현도 겸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현령이 부임하자, 계획을 세워 은혜를 베풀고, 이익을 증진하며 폐단을 제거하였다. 군무가 이미 정비되자, 민정 또한 바로잡혔다.
그러나 땅이 좁고 험하여, 사람들은 옛 고향(故鄕)을 그리워하였다. 현령(縣令)이 이를 듣고 여러 사람과 협의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 최유경(崔有慶, 1343~1413)에게 청하여, 모든 사정을 조정(朝廷)에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인접한 하동·사천·거제·고성·진해 다섯 고을의 백성을 동원하여, 고현(古縣)의 외딴섬 가운데 성을 쌓고, 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 견고하게 하며, 해자(塹)를 이용하여 못(池)을 만들었다.
공사(工事)는 2월에 시작하였고, 그리고 3월의 길일에 모든 일을 마쳐 보고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 밭은 밭대로, 집은 집대로 정비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겁고 화목하게 살았다.
어업과 소금, 곡식과 벼에서 얻는 이익으로 이전 날의 부(富)를 회복하려 하는데,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령이 급히 글을 올려 나에게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내 생각에는 '왕공이 험지를 마련하여 나라를 지킨다'라는 말은 『대역(大易, 주역)』의 교훈이고, '이 성(城)을 쌓고, 이 못을 파면서, 목숨을 바쳐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맹자(孟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는 북방에 성을 쌓았으나 험윤의 난은 없어지고, 정(鄭)은 호뢰(虎牢)에 성을 쌓아 초(楚) 사람의 환난을 그치게 하였으며, 우리 조정은 연해의 군(郡)에 성을 쌓아 왜구(倭寇)의 해를 그치게 하였다.
대게 성보(城堡)를 지키는 일은, 약한 자도 강한 자를 제어할 수 있고, 적은 수(數)로도 많은 적을 막을 수 있으며, 편안히 쉬면서 피로한 적을 기다릴 수 있다.
하물며 이 현(남해현)은 천남(天南)의 경승지이며,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의 자원이 많아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곳인데 말이냐?
그리고 진도와 거제 두 고을의 회복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물은 배를 운용하는 데 쓰이고, 성곽에는 누각과 방패로 방어할 수 있으며, 봉수는 밤낮으로 철저히 관리되니, 폭력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수단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말하겠는가, 외딴섬의 고립된 성(城)이라 하여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하더라도, 편안히 걱정 없이 눕지 못하리라고! 나는 이제 배를 저어 남해의 옛터를 깊이 탐구하고, 누각 위에서 술을 올리며, 나라가 인재를 얻게 된 것을 축하하려 한다고 한다.」
△ 정이오의 기록, 읍성 축성 연대의 사료(史料) 비교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각종 지리지(地理志)의 기록과 상호 대조해 보면, 그가 언급한 성(城)이 현재 남해군청 소재지인 남해읍성(南海邑城)인지, 아니면 고현면 비란리 정태마을의 고현성(古縣城)인지를 보다 명확히 규명할 수 있다.
본고(本庫)는 관련 사료를 교차 검토하여 기록의 내용과 지리적·시대적 정황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해당 성곽의 실체를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거와 분석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왜구(倭寇)의 소굴이 된 지 46년이 지났다는 점과 '상(上) 즉위 4년'이 언제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작 시점은 고려 공민왕 6년인 1357년이며, 그로부터 46년이 지난해는 조선 태종(太宗) 3년인 1403년이다. 한편, '상 즉위 4년'은 태조 즉위 4년(1395년)으로 추정된다.
둘째, 도관찰출척사 최유경(崔有慶, 1343~1413)에게 청(請)한 기록이다. 최유경은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경지, 호는 죽정이다.
그는 태조 3년부터 6년까지(1394~1398)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를 지냈다. 그러므로 최유경은 태종 4년(1404)에는 도관찰출척사직에 있지 않았다.
셋째, 공사(工事)가 2월에 시작되어 3월에 끝났다는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석성(石城)을 축성하는 데에는 수년이 소요되지만, 이 기록에는 공사가 불과 두 달 만에 완료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는 새로 축성했다기보다, 기존에 사용하던 성을 보수해 활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넷째, 임덕수(任德秀)를 추천하여 구라량(仇羅梁) 만호 겸 남해 현령으로 임명(태종 4년, 1404)했다는 기록이다. 임덕수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문신으로 1342년에 1등 공신이 된 임자송의 아들이며, 익제 이제현(1287~1367)의 사위이다.
다섯째, 현 남해군청이 위치한 남해읍성 축성 연대 기록이다.
남해읍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 21년(1439) 11월 20일 조에는 "경상도 장기·영일(迎日)·남해(南海)·김해(金海) 등지에 성을 쌓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96)에는 석축 둘레 1,740척, 높이 10척, 폭 11척으로 고현(古縣) 화금현(火金峴, 비란리)에 임오년(태종 2년, 1402)에 축성하였으며, 기미년(세종 21년, 1439)에 죽산리로 이거(移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남아 있는 남해읍성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세종 13년(1431)에는 남해 본도 중앙에 성을 쌓고 무인을 임명하여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세종 16년(1434) 8월에는 경상·전라·충청 3도에서 지난해 착수한 성이 완성되지 않은 경우, 금년에 반드시 마치도록 명하였다.
남해에 쌓은 성은 선군(船軍)을 동원해 건축하되, 추위와 장마, 더위 등 방어에 긴요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공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세종 19년(1437) 6월 23일에는 남해에 주민이 많지만, 관할할 관청이 없어 현을 설치해야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상의 사료를 종합할 때, 정이오의 『남해현기(南海縣記)』에 등장하는 성(城)은 고현(古縣) 화금현(火金峴, 비란리)에 위치했던 고현성(古縣城)에 관한 기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고현성의 규모(석축 둘레 1,740척, 높이 10~11척) 기록과도 일치하여 신빙성을 더한다. 일반적으로 기문(記文)은 성(城)이 완공된 뒤 작성되므로, 만약 죽산리에 축성한 남해읍성을 기록한 것이라면 이미 1434년에 사망한 정이오가 쓴 것이 되어 시간적 모순이 발생한다.
실제로 남해읍성은 세종 15년(1433)에 축성을 시작해 세종 21년(1439)에 죽산리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이 기록은 남해 지역이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을 거쳐 다시 남해로 돌아온 시기가 태조 3년(1396) 혹은 태종 3년(1403)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이후 새로운 읍성(邑城)으로 읍치(邑治)를 옮기기까지 약 30년 동안, 지역민들은 평산·노량 수군만호의 비호 아래 고현성(古縣城)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남해현기』는 현재의 남해군청 소재지인 남해읍성과 고현면 비란리에 있었던 옛 남해읍성(고현성)의 실질적 위치를 고증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핵심 사료다.
△ 남해현기(南海縣記)의 사료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
정이오(鄭以吾)의 『남해현기(南海縣記)』는 조선 초기 남해현의 행정·군사·경제 상황과 방어 체계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핵심 사료이다.
기문(記文)의 서술을 『조선왕조실록』 및 각종 지리지 자료와 상호 대조하면, 남해읍성(南海邑城)은 고현(古縣) 화금현의 고현성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계획·축성되었으며,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단기간 내 완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덕수(任德秀)의 부임 이후
이루어진 수군 운용과 성곽·봉수망의 정비는 왜구 방어와 주민 보호 체제를 한층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 나아가 『남해현기(南海縣記)』는 남해읍성(南海邑城)의 축성과 이전 과정은 물론, 약 30년간 단절되었던 지역사(地域史)의 공백기까지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를 통해 당시 중앙과 지방의 정책 집행 과정, 해안 방어 체제의 운영 방식, 그리고 지역사회의 대응 양상을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결국 이 기문(記文)은 조선 초기 연해 방어 정책의 구조와 성격, 그리고 그 변동 과정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근거를 제공한다.
△정이오(鄭以吾)의 남해현기(南海縣記) 원문(原文)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