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 '황금기' 누리던 시금치, 최근 '갈아엎기' 비극

농가, 설 이후 예견된 홍수출하 농협은 뭐 했나? '비판 확산'
경매장 중심 '수동적 유통' 벗어나 가공·저장 혁신 나서야

발행연월일 : 2026년 03월 20일(금) 12:07
남해군의 겨울철 효자 작목인 '보물섬 시금치'가 설 명절을 기점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3월 중순 최근, 산지 경매가가 1kg 200원을 기록하는 등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든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아예 상인들에게 전답을 내어주거나 애써 키운 자식 같은 시금치 밭을 트랙터로 갈아엎는 상황이다.
한 달 전만 해도 kg당 4,000~5,000원을 호가하던 '보물'이 이제는 껌값보다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설 명절 이전의 '호조' 1kg 5,000원 호가하던 시금치


지난해 10월 본격적인 출하가 시작된 이후, 남해보물초는 설 대목까지 유례없는 가격 호황을 누려왔다.
가을장마 여파로 평년보다 적은 초기 물량은 설 대목 전까지 호조를 보이며 농가소득을 견인했다.
여기에다 남해 특유의 해풍을 맞고 자란 뛰어난 품질 덕분에 대도시 공판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실제 설 명절 직전까지 시금치 경매가는 1kg당 평균 4,000원에서 최고 5,000원 선을 유지하며 농가 소득 증대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당시 농가들은 "올해만 같으면 농사지을 맛 난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고, 설 이후 재파종된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남해군 전체 경매 물량은 순조로운 수익 흐름을 이어왔다.



설 이후 '물량 폭탄', 그리고 80% 가격 폭락


그러나 설 연휴가 지나자마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설 대목 이후 평소보다 5배 이상 많은 물량이 한꺼번에 경매장에 쏟아지며 경매가는 1kg당 200~300원 선까지 곤두박질쳤다.
한 달 만에 이전가격의 80% 이상이 증발한 것이다.
지난해 9월 가을장마로 고사한 전답에 10월말, 11월 초 대규모 재파종이 이뤄진 물량이 설 이후 한꺼번에 '홍수 출하'로 이어지며 가격하락을 부추겼다.
아울러 경기 침체로 소비가 줄어든 상황에서, 재파종 농가들이 가격 폭락에 시금치를 갈아엎는 대신 헐값에 상인들에게 밭떼기로 넘겼고 이를 사들인 상인들이 시장에 물량을 유입하면서 전체 단가가 내려앉는 악순환이 반복된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농민들은 박스비(약 1,000원)와 인건비도 감당하기 어려워, 아예 상인들에게 밭을 통째로 넘기거나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는 실정이다.



"예상된 홍수출하 대책 마련에 실패한 농협"... 거세지는 책임론


농민들의 분노는 설 이후 예상된 홍수출하에 대한 대책 마련에 실패한 농협과 행정으로 향하고 있다.
관내 농협들이 시금치 경매를 통해 받는 수수료는 낙찰가의 약 4~5%다. 이와 관련 한 시금치 농가는 "관내 농협들이 경매 수수료(낙찰가의 약 4~5%)로 연간 대략 총 12억 원 의 수익을 올리면서도, 정작 가격 폭락 시기에는 '뒷짐지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당초 시금치 종자 판매량을 감안하면 파종면적 증대와 가을 장마에 따른 설 이후 홍수출하 문제는 농협도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기에 이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사전에 고민이나 했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정작 농민들이 고통받는 가격 폭락 시기에 농협의 수급 조절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어 "상인들이 인건비도 안 되는 가격에 밭떼기로 사들인 물량이 다시 경매장에 쏟아지며 전체 단가를 더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에서 공짜나 다름없는 물건이 시장을 장악하는데 농협은 경매 중단이나 수매 대책 없이 수수료 챙기기에만 급급한 것같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농협이 조합원의 고통을 분담하기보다는 '안전한 수수료 장사'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인 것이다.
그러면서 "신안군의 농협은 가락동 시장 등에 전담 인력을 상주시켜 물량을 능동적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수급조절 뿐 아니라 홍수출하를 대비한 거래처 확대 등에 노력해온 반면, 군내 농협들은 대부분 관내 경매장(집하장)에만 의존하는 '수동적 유통' 시스템에 매몰되어 있는 것같다"면서 "농협의 존재 이유는 가격이 무너질 때를 대비해 나름의 대책을 마련해 놓거나, 소득보전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농민의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책을 촉구했다.
'농협이 단순히 경매장만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신안처럼 시장 점유율을 바탕으로 가격을 컨트롤할 수 있는 유통 전문가를 양성하고 현장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매장 운영' 한계 벗고 가공·저장 혁신 나서야


가격 폭락 시 물량을 흡수할 수 있는 가공 인프라 구축도 시급한 과제다.
현재 남해 시금치는 홍수 출하 시 이를 저장해 유통하거나 가공할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후 변화에 따른 가을장마와 수급 불균형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농협과 행정이 머리를 맞대고 근본적인 유통 구조 혁신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재파종 또는 늦파종에 따른 설 이후 예견된 홍수출하로 인한 가격폭락과 농가의 한숨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유통에 대한 1차적 책임이 있는 농협은 시금치 가공산업 개척과 판로 다각화로 시금치 생산농가의 소득을 보전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시스템이다. 농민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거나, 행정에 보상금만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반복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2차 가공을 통한 시금치 파우더(분말) 생산과 거래선 확보로 가격폭락에 대처하거나 가격 폭락기에 농협이 시금치 물량을 수매해 데친 후 급속 냉동 보관했다가 시금치가 귀한 여름철 대형 김밥 프랜차이즈나 식자재 마트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농가소득을 보전해야 한다.
아울러 농협 수수료 수익의 일부를 적립해 기금을 만들고, 생산비 이하로 가격이 폭락할 경우 이 기금을 투입해 농가의 최소 생계를 보장하고, 과잉 물량을 산지 폐기하는 등 수급 조절의 마중물로 삼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이런 이유로 농협이 거둬들이는 수수료 수익의 일부를 적립하여 '가격 안정 기금'을 조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남해 시금치 산업이 '1차원적 경매'를 넘어 '고부가가치 가공·저장 산업'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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