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로 읽는 남해현의 역사와 공간
동국여지지 남해현 기록은 해양과 산악이 결합된 공간 속에서 형성된
역사·경제·군사적 특징을 통해 지역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03일(금)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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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선구자이자 평생을 제도 개혁에 헌신한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이 1656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는 우리 국토를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私撰) 전국 지리지이다. 이는 단순히 고을의 지리 정보를 나열한 나열식 지지(地誌)가 아니라, 임병양란 이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고 무너진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저자의 고통스러운 고뇌와 학문적 탐구가 응축된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남해안의 요충지이자 영남의 관문이었던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에 대한 기록은 당시 선구적 지식인이 지녔던 자국(自國) 중심의 국토 인식과 실천적 사회 개혁 의지를 가장 생생하고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유형원은 이 책을 통해 관념 속에 머물던 강토(疆土)를 실재하는 삶의 터전으로 끌어올렸으며, 이는 후대 실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 글에서는 『한국고전종합DB』에 수록된 경상도 남해현의 구체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그 지리적 특성과 인문 환경의 실상을 고찰하고, 기존의 관찬(官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의 서술 방식 및 관점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속에 담긴 실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섬으로 둘러싸인 공간, 남해현의 지리적 위상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는 남해현의 위치를 서술하며 "해도(海島) 가운데 있다"라고 간결하게 특정한다. 이 한 문장은 남해현의 공간적 정체성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남해현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육지 및 주변 지역과의 연결성을 정밀한 수치로 기록하였다.
본문 기록에 따르면 동쪽 해안까지 40리, 서쪽 15리, 남쪽 36리, 북쪽 노량(露梁) 해안까지 38리라는 구체적인 거리 표기가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정보를 넘어, 이 지역이 독립된 생활권을 유지하면서도 노량과 같은 핵심 통로를 통해 육지와 긴밀히 연결된 해상 교통의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서울(한성부)과의 거리를 1,045리로 명시한 것은 중앙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를 확인하고, 국가 공간 질서 속에서 남해가 차지하는 물리적·심리적 위치를 규정한 것이다.
유형원(柳馨遠)의 이러한 서술 방식은 당시 실학자들이 추구했던 '자기중심적 공간 인식'을 반영한다. 그는 남해를 변방의 쓸쓸한 섬으로 보지 않고, 사면이 바다에 면해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하동 및 광양과 접하는 역동적인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실증적 태도는 관념 속에 머물던 국토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2. 역사적 변천과 행정 체계의 변화
남해현(南海縣)의 역사는 외세(外勢)의 침입과 그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끈질긴 재건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동국여지지』 건치연혁(建置沿革) 조항을 보면, 본래 신라의 전야산군(轉也山郡)에서 시작하여 경덕왕 때 '남해(南海)'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고려 현종 대에 이르러 남해현으로 정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의 기록이다. 당시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섬을 비워 두는 공도(空島)정책이 시행되었고, 주민들은 육지인 진주 선천부곡(鐥川部曲)으로 옮겨가 임시로 거주해야 했다. 이는 해안 접경 지역이 외부 세력의 침략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픈 역사이다. 조선 태종 6년(140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민들이 본래의 땅으로 돌아와 현(縣)을 복구할 수 있었으며, 세종대에는 인근 곤명현과의 병합과 분리를 거치며 오늘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유형원(柳馨遠)은 이러한 연혁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지역 행정 체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하였다. 현령(縣令)과 교육을 담당하는 훈도(訓導)를 각각 1인씩 배치한 관원 조항은 지방 행정과 교화 기능이 결합된 통치 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전야산(轉也山)'이라는 고명(古名)을 군명(郡名) 조항에 명시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려 노력하였다. 이는 지역의 뿌리를 명확히 함으로써 향촌(鄕村) 사회의 결속력을 다지려 했던 실학자의 배려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 방식은 후대 행정 운영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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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과 해양 공간이 이루는 자연환경
남해현의 자연환경은 산세와 바다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적인 구조를 띤다. 『동국여지지』는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을 비롯하여 소흘산(所訖山), 원산(猿山), 녹두산(鹿頭山), 금산(錦山) 등을 차례로 나열하며 이들이 단순한 지형물이 아님을 강조한다. 특히 동쪽의 금산은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목장(牧場)이 설치되어 경제적·군사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자연 지형이 곧 국가 운영의 기반이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남해의 자연은 '국방의 현장'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노량(露梁)에 대해서는 "선조(宣祖) 대에 이순신이 왜병을 이곳에서 격파하였다"라고 기록하고, 관음포(觀音浦)는 "고려 말 정지(鄭地) 장군이 왜(倭)를 섬멸하여 패전의 고리를 끊은 첫 승전지"로 규정하였다. 이는 산천 조항이 단순한 풍경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토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물임을 보여준다.
해안선을 따라 배치된 미조항(彌助項), 적량(赤梁), 상주포(尙州浦) 등 수많은 포구와 곶(串)들은 남해현이 지닌 해양적 특성을 극대화한다. 유형원은 각 포구의 위치와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면서, 이곳들이 어업의 기지인 어량(魚梁)이나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鹽所)로 활용되고 있음을 밝혔다. 결국 남해의 자연은 산과 바다, 그리고 그사이를 잇는 봉수와 나루터가 하나의 거대한 방어 체계이자 생존 공간으로 얽혀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 경제 구조와 토산(土産)의 특징
경제적 측면에서 『동국여지지』 기록의 가장 큰 혁신은 한전(旱田)과 수전(水田) 항목을 읍지의 최상단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주창된 전제(田制) 개혁안의 실천적 의지를 반영한다. 비록 남해현 필사본에는 항목만 설정되고 수치가 비어 있지만, 이는 당시 통용되던 결부법(結負法)의 폐단을 지적하고 새로운 면적 단위인 경무법(頃畝法)으로의 전환을 기다리는 저자의 개혁 정신을 상징한다.
토산(土産) 항목은 남해현의 풍부한 물산과 지역 경제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유자(柚), 석류(石榴), 비자(榧) 등 귀한 과실류와 함께 닥나무(楮), 화살의 재료인 궁간상(弓幹桑)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산물로는 대구(大口魚), 전복(鰒), 문어(文魚), 청어(靑魚), 해삼(海參) 등 20여 종이 넘는 수산물이 나열되어 있어, 남해가 전국적인 해산물 공급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소금(鹽)의 생산과 유통은 남해 경제의 핵심이었다. 가을곶포(加乙串浦)를 비롯한 여러 포구에 설치된 염전은 국가 재정과 지역 주민의 생계에 직결되는 자원이었다. 유형원은 이러한 물산의 목록을 통해 지역의 자립 가능성을 타진하고, 세금 징수의 근거가 되는 생산력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관념적인 도덕 정치가 아닌, 구체적인 물적 기반 위에서 국가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실용적 경제관의 발로이다.
△ 군사·행정 시설과 생활 공간
남해현은 왜구의 침입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전방 지역이었기에, 군사시설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미조항 첨절제사진(彌助項僉節制使鎭)과 평산포 만호진(平山浦萬戶鎭)은 강력한 수군 방어망의 핵심이었으며, 유형원은 이들 진(鎭)의 성곽 둘레와 설치 연혁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특히 성벽의 길이와 높이, 성안의 우물 숫자까지 기록한 것은 실전에 대비한 실용적 정보 제공에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지리 기록을 넘어 군사 대비 체계의 구체적 실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생활 공간으로서의 면모 또한 체계적이다. 행정의 중심인 현성(縣城)을 비롯하여, 교통의 요지인 덕신역(德新驛)과 노량원(露梁院)은 지역 내외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또한 지방 교육의 전당인 향교(鄕校)와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와 같은 제례 시설은 유교적 통치 질서가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증명한다. 이는 행정·교통·교육·제례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생활 공간의 구조를 보여주며, 지역 사회의 질서와 안정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주목할 점은 사찰과 고적에 관한 서술이다. 금산(錦山)의 보리암(菩提菴)과 같은 사찰을 기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현산성(古縣山성)이나 옛 보루(古堡)와 같은 폐기된 시설들의 흔적을 꼼꼼히 찾아냈다. 이는 과거의 영광이나 상흔이 현재의 방어 체제에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살피려는 실학자의 탐구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남해현(南海縣)은 이처럼 성곽과 포구, 학교와 사묘(祠廟)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삶의 터전이자 국가 방위의 보루로서 『동국여지지』에 각인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지역의 역사성과 현실적 기능을 동시에 조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실학적 사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6. 『신증동국여지승람』과의 차이와 실학적 의의
유형원의 『동국여지지』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기존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뚜렷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국가의 위엄을 세우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성씨(姓氏)와 화려한 시문(제영, 題詠) 위주의 서술에 치중했다면, 『동국여지지』는 이를 과감히 덜어내고 '사실'과 '실용'을 채워 넣었다.
첫째, 항목 구성의 변화이다. 유형원은 장식적인 문학 항목을 삭제하는 대신 지형, 거리, 호구, 토지 면적, 군사시설 등 통치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전면에 배치했다.
둘째, 역사 지리적 고증의 강화이다. 『동국여지지총서』에서 보여주듯, 그는 우리 영토의 변천사를 실증적으로 고찰하여 자국 중심의 공간 인식을 정립하였다. 남해현 기록에서도 고대의 지명과 성터를 추적하는 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 비판적 서술과 정직한 공백이다. 『동국여지지』는 완벽한 체하는 관찬 지리지와 달리, 저자가 가보지 못한 곳이나 정보가 부족한 곳을 솔직하게 밝히고 앞으로 보충해야 할 과제로 남겨두었다. 특히 토지제도의 변화 없이는 채울 수 없었던 경무법 단위의 빈칸은 사회
개혁을 갈망하는 저자의 무언의 외침과도 같다.
결론적으로 『동국여지지』 속 남해현은 단순한 지리 정보의 집합체를 넘어, 17세기 조선이 직면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더 나은 사회를 설계하고자 한 실천적 사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유형원이 남긴 이 실증적 기록은 이후 조선의 실용 지리학을 완성한 신경준(申景濬, 1712~1781) 등 후대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우리나라 지리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 책을 다시 주목하는 이유 역시 국토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공동체의 삶과 연결하려 했던 실학적 태도가 여전히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남해현의 바다와 산천에 담긴 기록은 국토 인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처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나타난 남해현은 지리적 특성, 역사적 변천, 자연환경, 경제 구조, 군사 체계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공간으로 파악된다. 동시에 이러한 서술은 지역의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정책과 제도의 개선 방향을 모색하려는 실학적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동국여지지』는 지역 이해를 넘어 국토 인식과 사회 개혁을 연결한 중요한 사료로서, 오늘날에도 학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실증적 조사와 체계적 기록을 통해 국가 운영의 기초를 다지고자 했던 실학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성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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