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이태인, 홍성진 기자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10일(금)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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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FM공동체라디오와 남해미래신문은 지역 공동체와의 진솔한 소통을 위해 특집방송 [남해인 초대석]을 진행했다. 이번 [남해인 초대석]은 후보자의 차가운 공약이나 날카로운 정책 대결의 장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사가 지닌 깊은 무늬와 그 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온기를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공인으로서의 외면적 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한 시대, 한 세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자 함이다. 공통 주제인 남해에 대한 기억과 남해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역사회를 훈훈하게 만들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심어주길 기대한다. 이번 기획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역할을 넘어,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는 소중한 소통의 시간이길 바랄 뿐이다. <편집자 주>
[남해인 초대석].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군수 출마 예정자들의 정치적 수사가 아닌 '인간적 생애'를 들여다보는 이 자리에 두 번째 손님으로 고원오 예비후보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이 자리에 오면서 고민이 많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제 정장은 문밖에 벗어두고 대신 여러분과 소주 한 잔 나누고 싶은 진심만 입고 왔다."고 인사한다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격식을 걷어낸 이웃집 아저씨의 투박하고도 따뜻한 진심이 묻어났다.
이날만큼은 후보자 고원오가 아닌, 고현면 초가집에서 태어나 남해의 파도를 견디며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남해라는 대지 위에 뿌리 내린 한 인간의 생애를 추적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고향의 기억] 일곱 형제가 부대끼던 한 방, 그리고 인생의 설계도
고원오 후보의 인생 뿌리는 그가 태어난 집, 지금도 그가 매일 밤 잠을 청하는 바로 그 방에 닿아 있었다. 70년대 고현면, 초가집에서 3대가 모여 살던 시절, 그는 5남 2녀 중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의 남해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늘 그를 따라다녔고, 그 결핍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일찌감치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새겨 넣었다.
"저에게 남해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지독한 가난을 견디게 해 준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 하나를 꺼내 놓았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던진 "원오는 동생이 다섯이나 되는데 누가 시집 오겠노..."라는 무심한 말 한마디였다.
그 말은 어린 가슴에 깊은 손톱자국을 남겼지만, 동시에 "내 동생들은 절대 굶기지 않겠다"는 평생의 다짐을 일깨운 원동력이 되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 방에서 일곱형제가 칼잠을 자던 그 좁고 눅눅했던 공간은, 역설적으로 그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가장 단단한 심지를 만들어준 장소였다고.
고향 남해를 떠나 처음으로 자신만의 아지트를 가졌던 곳은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기숙사였다.
47년 전, 시골에서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모여든 전국의 가난한 인재들 사이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구체화했다. "가난 때문에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선택한 국립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해결하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900명의 동기 중 360명과는 지금까지도 단톡방에서 안부를 묻는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 기숙사 방에서 그는 '원오'라는 인생의 설계도를 처음 그렸고, 그 설계도는 훗날 그가 사회에서 어떤 풍파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파도] 조선소 노동자에서 농협 지부장까지
졸업도 하기 전, 고원오는 거제 대우조선소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80년대 초반, 철야 작업과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던 거친 노동의 현장이 그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함께 갔던 동기들이 하나둘 학업을 위해 현장을 떠날 때, 그는 홀로 갈등했다. "월급을 받아 집에 보내줘야 하는데, 이걸 그만두면 우리 가족은 어떡하나." 장남이라는 무게는 그를 현장에 붙잡아두었고, 그는 동기들이 공부하는 동안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거대한 철판 사이를 누볐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춥고 외로웠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그 고집스러운 성실함으로 노동자의 시간을 견뎠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후 농협에 몸담으며 서울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는 삼성그룹 임원 출신 상사들을 모시며 '경영'의 본질과 인사 관리의 엄정함을 배웠다. 특히 인사 업무를 담당하며 채용 면접 위원장으로 일할 때의 소신은 지금까지도 회자 될 만큼 단단했다.
"5명을 뽑는데 25명이 오면 20명은 떨어져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찾는 건 가장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이 업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니 상처받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가라고 격려했습니다." 노동의 고통과 현장의 언어를 알기에, 사람의 가치를 단순히 성적표나 스펙으로만 매기지 않았던 그의 인간 중심적 철학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의 경영 방식까지 두루 섭렵하며, 남해를 위한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묵묵히 쌓아 올리고 있었다.
[가치와 인연] 흑마늘을 팔던 팀장과 장모님의 사위
그의 인생에서 '인연'은 곧 '책임'과 동의어였다. 농협 카드 우수 고객 관리팀장 시절, 그는 고집스럽게 공산품 대신 고향의 농산물을 사은품으로 선택했다.
새남해 농협의 흑마늘 수천 박스를 팔아주고, 사투리가 심해 서울 직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고향 농협 직원의 설명을 직접 통역하며 남해의 맛과 가치를 알렸다고 한다.
강원도 농협의 참기름 2만 병을 발주 내고 받은 조합장의 고맙다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는 그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는 삶의 훈장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특히 우리 농민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가장 깊은 곳의 인연은 역시 가족이었다.
신장이 나빠 이식이 필요했던 동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주려 했던 장남의 희생, 그리고 결혼 후 35년 동안 장모님께 매달 잊지 않고 보냈던 작은 용돈의 기록은 그의 성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장모님 별세 후, 처가 형제들이 만장일치로 그 정성을 기려 부의금을 다시 건넸을 때, 그는 부끄러움과 함께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고 한다.
"그 돈을 아내에게 주었더니, 장모님이 사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 당신이 가지라고 하더라." 그의 삶은 이처럼 거창한 구호가 아닌, 35년의 용돈과 같은 꾸준하고도 조용한 진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찰과 소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노력파의 독백
혼자 있는 시간, 팬티 차림이 가장 편안한 복장이라는 인간 고원오는 책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충전했다.
한 번 읽어서는 작가의 의도를 다 알 수 없다며, 마음에 드는 책은 평균 서너 번, 많게는 아홉 번까지 반복해서 읽는 지독한 독서가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자유론'과 '토지'를 다시 읽으며 인생의 본질과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되새김질했다고 한다. 책 속의 문장들은 그에게 때로는 채찍이 되고 때로는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은 단호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어린 시절, 이동면 친구들과 함께 어장의 고기를 '서리'하려다 겨울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 허벅지까지 차는 찬물을 헤치고 나왔던 고생스러운 기억이 그 밑바탕에 있었다.
그 에피소드는 그에게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
"공짜를 바라면 노력하지 않게 된다. 저는 오로지 노력, 노력, 노력뿐이었다." 특별한 학벌이나 배경은 없지만 조직에서 인정받고 지부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이 '공짜 없는 인생'에 대한 확신과 실천이었다.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 정직한 땀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미래와 유산] 군민들의 곁에 남을 '괜찮은 사람'
방송을 마무리하며 그는 어떤 형용사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괜찮은 사람 고원오"였다. 그가 생각하는 '괜찮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돈을 밝히는 사람,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 등 세상에는 많은 평가가 있지만, 저는 그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가 말하는 '괜찮은'이라는 수식어는 조직과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부대끼며 검증된 진실함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그것은 화려한 성취보다 더 얻기 힘든 인격적 완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군민들에게 약속했다. "길을 걷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이며 고민할 수 있는 이웃으로 남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동네 뒷산 녹두산 등산을 하고, 고향 친구 7명과 함께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남해의 진정한 파수꾼이었다.
남해의 흙을 밟고, 남해의 바람을 맞으며 자라온 그는 이미 남해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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