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에 깃든 이이명의 삶과 사상
「봉천사 묘정비」는 유배의 고난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를 지킨 이이명의
삶을 통해 충절(忠節)과 인본(人本)의 가치를 오늘에 전하는 역사적 유산
남해 유배지에서의 삶과 교육 활동을 기리는 봉천사 묘정비는
지역공동체가 기억하는 충의(忠義)와 교화(敎化) 정신의 상징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30일(목) 12:39
▲ 이이명의 매부(梅賦) (남해 유배문학관)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는 남해 유배지에서의 삶을 통해 드러난 이이명의 충절(忠節)과 인본주의적 가르침을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를 실천한 이이명의 정신은 봉천사 묘정비에 새겨져 지역 공동체의 기억과 문화적 자긍심으로 계승되고 있다. 남해군 남해읍 죽산리, 지금은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에 과거 '봉천(鳳川)'이라 불리던 시내가 흐르고 그 상류에는 '봉천사(鳳川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숙종·경종 연간의 거목이자 노론의 영수였던 소재(疎齋) 이이명 (1658~1722)의 영정을 모셨던 공간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세월의 흐름 속에 사당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역사의 증언자가 된 유물이 바로 『봉천사 묘정비』다.
비(碑)에 새겨진 문장은 비바람에 마모되었지만, 그 속에 깃든 정신은 오히려 더욱 선연(鮮然)하다. 2011년, 오랫동안 잡초와 넝쿨에 덮여 있던 이 비석은 '남해유배문학관'으로 이전되었다.
방치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지역의 기억 체계 안으로 복원된 것이다.
유형의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은 곧 무형의 정신을 되살릴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이제 묘정비(廟庭碑)는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남해 유배사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중심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 가문의 영광과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비극


이이명은 명문가의 후예로,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숙종(肅宗) 대 정치적 격랑 속에서 그는 노론(老論)의 핵심으로 활동하며 국정 전면에 섰다.
특히 1721년(경종 1)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문제에 앞장선 일은 그의 정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권력의 균형이 민감하게 흔들리던 시점에서 그의 선택은 곧 정치적 책임으로 돌아왔고, 남해(南海)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거처(居處)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둘러 외부와의 접촉을 엄격히 차단하는 형벌로, 육체적 구금보다 정신적 고립을 가중시키는 조치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함몰되기보다 학문으로 자신을 단속했다.
이듬해 사약(死藥)을 받고 생을 마쳤으나, 3년 뒤 복관(復官)되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는 그의 행위가 단순한 당쟁의 산물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문제였음을 후대가 공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고난 속에서 피어난 가르침, 습감재(習坎齋)의 의미


이이명 에게 남해는 정치적 유배지이면서 동시에 사색과 교육의 공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지감재(止坎齋)'라 불렀고, 이후 '습감재(習坎齋)'로 고쳐 불렀다.
『주역』의 '습감(習坎)' 괘는 거듭되는 험난함 속에서도 도(道)를 잃지 말라는 뜻을 지닌다.
이는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체념하지 않고, 수양의 장으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유배 기간 남해의 유생(儒生)들과 교류하며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가치를 설파했다.
중앙 정치의 중심에 섰던 대신이 섬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숭고하다. 이러한 교육 활동은 단순한 강론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준 실천이었다.
그래서 남해 사람들은 그를 '귀양 온 대신'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스승'으로 기억했다. 그가 떠난 뒤 100여 년이 흐른 1800년(정조 24), 지역 유림(儒林)이 힘을 모아 봉천사를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축적이 빚어낸 결실이었다.



▲ 금석문(金石文)에 새겨진 집단 기억의 결정체


1828년에 건립된 봉천사 묘정비는 한 개인의 행적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비문은 당대 명망가들이 참여하여 완성되었으며, 그의 가계와 관직 경력, 정치적 시련과 복권의 과정, 그리고 남해에서의 교화 활동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특히 비문에서 그의 절의(節義)를 중국 송나라 충신 구준(寇準)에 견준 대목은 정치적 평가를 넘어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서술 전략으로 읽힌다.
이 비(碑)는 조선 후기 사림(士林) 사회가 어떻게 충절의 기억을 제도화하고 제향으로 승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史料)다. 금석문은 문헌 사료와 달리 물질로 남는 역사다.
마모된 부분조차 시간의 흔적으로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묘정비 보존은 단순한 문화재 관리가 아니라, 지역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서포(西浦)와의 인연, 매화에 담긴 문학적 승화


이이명은 『구운몽(九雲夢)』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김만중의 사위였다. 장인 또한 남해 노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다.
사위가 다시 같은 섬으로 유배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남해 유배 문학사를 관통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가 장인의 매화 두 그루를 옮겨 심고 돌본 일, 그리고 꽃이 피자 '매부(梅賦)'를 지어 추모의 뜻을 표한 일은 정치적 인물을 넘어 한 인간의 정서와 의리를 보여준다.
매화는 추위 속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절개의 상징이다. 남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피어났을 그 매화는 그의 삶과 겹쳐진다.
오늘날 묘정비 주변에 매화 정원을 조성하고 관련 시문(詩文)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는 역사·문학·교육을 아우르는 살아 있는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
봉천사 묘정비는 한 대신의 공적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을 지키다 고난을 겪은 한 인간의 기록이며, 그를 기억하려는 지역 공동체의 윤리적 선언이다.
우리는 눈부신 기술 문명 속에 살고 있지만, 가치의 혼란과 공동체 해체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묘정비(廟庭碑)가 전하는 메시지는 더욱 또렷하다.
험난한 '습감(習坎)'의 상황에서도 도(道)를 잃지 않는 태도,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나 유배지에 있을 때나 다름없는 자기 수양,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교육의 실천. 이것이 봉천사 묘정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비석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 정신을 우리 사회 속에서 되살리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남해의 바다처럼 깊고 푸른 절개, 매화 향기처럼 은은한 인본의 가르침이 오늘의 삶 속에서 되살아날 때, 봉천사 묘정비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우뚝 설 것이다.


▲ 봉천사 묘정비 모습(남해유배문학관)

▲ 남해 봉천사 묘정비 번역
 

 『봉천사 묘정비』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성균관 춘추관사 규장각검교제학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영안 부원군 김조순은 비문을 짓고, 가선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김난순은 글씨를 쓰고,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조정철은 전액을 하다.」
 남해현은 해도 중에 있다. 남해현의 동쪽에는 죽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봉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있다.
 내의 위쪽에 '봉천사'가 있는데, 소재 고(故) 좌의정 충문공 이선생 이이명의 초상을 정성스럽게 봉안한 곳이다.
 섬의 인사들이 무슨 일로 공을 제사하는 것인가? 공은 백강선생 이경여의 손자로, 전대의 영광을 안고 태어나 유훈을 계승하여 도의와 문장으로 당시 세상에서 추앙을 받은 뛰어난 군자였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29세에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30세에 통정대부에 올랐고, 39세에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44세에 정경에 올랐고, 49세에 의정부에 들어갔다.
 경종 신축년에 영의정 충헌공 김창집과 충익공 조태채, 사촌 동생 충민공 이건명과 함께 성상 앞에서 영종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가 곧바로 남해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에 체포되어 한강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3년 뒤에 종전의 관직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노량(鷺梁, 서울)에 사당을 세우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네 충신은 세상에서 이른바 왕세제를 세운 네 대신이라고 하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이 뜻을 세움에 있어서는 정도를 보호하고 사도를 물리치는 것으로 자임하였으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모든 지혜와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리하여 군자들은 공을 믿고 두루 어울렸으며 소인들은 공을 꺼리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므로 영명하신 임금의 지우를 받아서 몸이 삼정승의 자리에 이르렀으나 정유년 이후로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이 항상 마음이 불안하였다.
 기사년 사화 때에 영해로 귀양 보내졌다가 5년 만에 남해로 옮겨 유배되었다. 마침내 조그만 집 한 채를 짓고 가이의 '복부'에 나오는 말을 취하여 '지감재'라고 편액하였다.
 왕세제를 세운 일로 화가 일어나서 다시 남해로 귀양 가게 되어서는 옛날에 지었던 집을 수리하고 이름을 '습감재'라고 고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가 미쳤다. 공이 전후로 이 섬에 귀양 와서 지낸 4, 5년 동안 충신과 효제의 도리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섬의 인사들이 공이 살아있을 때는 스승처럼 따르고 섬겼으며, 공이 죽어서는 어버이처럼 슬퍼하며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100년 동안에 그 은택이 오래될수록 더욱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잊히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을 제사하게 된 계기이다.
 정조 경신년에 섬의 인사들이 진양의 선비들과 힘을 합해서 습감재의 옛터에서 2, 3리 떨어진 곳에 사당을 세웠고, 근래에 이윽고 또 먼 길을 걸어 서울로 달려가 노량에 있는 사당의 초상을 베껴서 돌아와서 봉안하고서는 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으니, 참으로 군자이다. 생각건대, 하늘이 사람을 탄생시킴에 있어서 다만 이익에만 밝은 자는 자기의 본성을 해치고 소인이 되며, 도를 위해 순절하는 이는 군자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하늘에 부끄럽지가 않다. 신축년과 임인년의 위태로운 때가 되어서는 임금에게 병이 있어서 세자를 낳지 못하여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져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좌지우지되었다. 저 흉악한 역당들은 애당초 어찌 인심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상황을 틈타 악행을 마구 저지르고 끝내 충신을 도살하고 윤리를 범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들이 일시적인 이익만을 이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 공이 세 대신과 함께 몸이 주륙을 당했으나 상심할 줄을 모르고 집안이 망했는데도 보살필 줄을 몰랐으며, 오직 나라를 보존하고 왕세제를 보호할 줄만을 알고 그 이외의 것은 몰랐으니, 거의 이른바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 사직을 편안하게 한 자는 종종 몸은 편안하고 집안이 두터운 은전을 입었으며, 뒷날의 재앙이 없어서 오형을 갖추고 칠족을 멸하는 근심이 있지 않았다. 그런 뒤에야 사직을 편안히 하는 데 힘쓸 수 있었다. 오형을 갖추고 칠족을 멸하는 것이 어찌 공이 기뻐하고 원하는 바이겠는가. 그러나 미워하는 것이 그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몸과 집안은 망할 수 있어서 마음은 하늘에 부끄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흉악한 역당들의 계획이 시행되었더라면 왕세제의 자리를 반드시 보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왕세제의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면 여러 사람들의 원통한 마음을 아뢸 수 없었을 것이다.
 공도 그러한 사실을 환히 알고서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마음속에서 의(義)와 이(利)를 분명하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세제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흉악한 역당이 마침내 폐하였으며, 여러 사람의 원통한 마음을 모두 다 아뢰어 국시가 크게 정해졌으나 이것이 어찌 공과 세 대신이 기필코 이룩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국가의 영원한 복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방탕한 사람에게 화를 내리는 하늘은 참으로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반드시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의이다. 그리고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이다. 군자가 의를 취하고 인을 이루었으니 또 어찌 유감이 있겠는가. 옛날에 구래공 구준이 소인들에게 무함을 당하여 뇌 땅에서 죽었는데 뇌 땅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하니, 이 섬에서 공을 제사하는 것 또한 마땅하다. 또한 공이 곤욕을 당한 것도 구래공과 같은 점이 있다. 처음에 네 공이 귀양을 갔을 때 경종이 병이 들어 모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경종이 연석에서 갑자기 주위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흰 수염을 가진 상신이 연석에 오르는 것을 항상 보아왔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공이 여러 상신 가운데서 머리카락이 가장 하얗기 때문이었다. 흉악한 무리가 모두 목을 움츠리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일은 송나라 진종이, "내 눈으로 오래도록 구준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한 일과 몹시 서로 유사하다. 저 흉악한 무리가 비록 한사코 경종을 속였으나 결국에는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천대가 지난 후대에 그들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했음을 보게 될 것이로다. 아! 숭정 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1828) 5월 일에 세우다.
 


▲ 봉천사 묘정비, 시간 속에서 깨어나는 충문(忠文)의 정신
 

 봉천사 묘정비는 단순히 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도(道)를 지키고자 했던 한 지식인의 결단과 그를 기억하려는 지역 공동체의 도덕적 의지가 응축된 역사적 상징물이다.
 남해라는 유배지에서 이이명은 좌절에 머무르지 않고 학문과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세웠고, 그 정신은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봉천사와 묘정비로 형상화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가치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봉천사 묘정비가 전하는 메시지는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험난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잃지 않는 태도, 개인의 안위를 넘어 공동체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 그리고 사람을 향한 믿음과 가르침의 실천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당은 사라졌지만, 묘정비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오늘의 삶 속에서 실천할 때, 봉천사 묘정비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로 남을 것이다.
▲ 봉천사 묘정비 원문(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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