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그 좁은 기표칸, 노령층에게는 장벽이자 공포
홍성진 선임기자
발행연월일 : 2026년 06월 19일(금) 15:29
선거철만 되면 투표소 앞은 이른 아침부터 유모차와 지팡이에 의지한 어르신들로 장을 이룬다. 허리는 굽고 걸음은 느릴지언정,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겠다는 농촌 유권자들의 참정권 열정은 대도시 그 어느 곳보다 뜨겁다.
그러나 막상 투표소 안으로 들어선 어르신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좁은 기표소 안에서 돋보기를 고쳐 쓰고 숨을 죽인 채 손을 떠는 노년의 유권자들. 그들에게 투표는 권리 행사이기에 앞서, 하나의 거대한 신체적 심리적 '장벽'이다.
최근 서천호 의원이 투표용지 기표칸 규격을 가로·세로 최소 2cm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명시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단순히 투표용지 속 네모칸 몇 밀리미터(㎜)를 늘리자는 기술적 제안이 아니다. 본격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 특히 소멸 위기와 초고령화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농어촌 지역의 일그러진 투표 환경을 바로잡으려는 실질적인 '인권 법안'에 가깝다.
현재 중앙선관회 규칙에 규정된 기표칸은 고작 1.5cm에서 2cm 안팎이다.
이 좁은 공간은 눈이 밝고 손끝이 야무진 젊은 유권자들에게도 꽤나 신경 쓰이는 크기다.
조금만 방심해도 도장이 경계선에 걸치거나 칸 밖으로 삐져나가 무효표가 될까 봐 긴장했다는 젊은 층의 후담은 선거 때마다 SNS를 달군다.
하물며 평균 연령이 이미 60~70대를 훌쩍 넘어선 농어촌 지역의 현실은 어떠하겠는가. 시력 저하로 후보자의 이름과 번호조차 흐릿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수전증이나 손떨림을 겪는 어르신들에게 이 바늘구멍 같은 기표칸은 장벽이자 공포다.
단지 손이 떨렸다는 이유로, 혹은 도장이 경계선에 살짝 물렸다는 이유로 소중한 표는 차가운 '무효표' 상자로 던져진다.
이 모순이 가장 극명하고 참혹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바로 '지방선거'다. 도지사부터 시장·군수, 교육감, 광역의원, 기초의원, 그리고 비례대표까지 유권자 한 사람이 무려 7장의 투표용지를 받아 들어야 한다. 두툼한 종이 묶음의 무게만큼이나 고령의 유권자들이 느끼는 심리적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제 선관위의 과거 지방선거 개표 통계를 뜯어보면 문제는 더욱 명백해진다. 대도시 지역에 비해 고령 인구 밀집도가 높은 농어촌 군 단위 지역의 무효표 발생 비율은 확연하게 높다. 특히 후보자가 난립하는 기초의원(군의원) 선거로 내려갈수록 무효표 비율은 시 단위 대도시보다 2배 이상 치솟기도 한다. 복잡한 다표제 속에서 가뜩이나 좁은 기표칸에 정확히 도장을 찍지 못했거나, 투표 도중 혼란을 느껴 기표를 누락해 버린 결과다.
결국 농촌 어르신들의 소중한 표심이 제도적 배려 부족으로 인해 무더기로 '사표(死票)'가 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농어촌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정치권과 정책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게 막는 왜곡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모든 유권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투표용지 칸이 너무 좁아 내 표가 무효가 될까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환경이라면, 그것은 이미 평등한 투표라 부를 수 없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맞춰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예산을 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을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이 투표소에서 당당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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