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규장각 소장 고지도로 읽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인식과 전략적 위상(1)
조선 후기 제작된 『해동지도』·『여지도』·『광여도』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는 남해가 군사·행정·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종3품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미조항진(彌助項鎭),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파견된 평산포진(平山浦鎭), 종9품 권관(權官)이 파견된 곡포진·상주포진(曲浦鎭·尙州浦鎭)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남해안 전략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6월 29일(월) 14:44
▲ 『해동지도』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및 기록

조선시대의 고지도는 단순히 지리 정보를 평면적으로 시각화한 그림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 이념과 행정 체계, 군사 전략은 물론 지역사회의 공간 구조까지 입체적으로 담아낸 중요한 역사 사료이다. 그중 남해현은 남해안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자, 끊임없이 이어진 왜구의 침입에 전방위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최일선의 군사 요충지로서 국가 안보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도서 지역이라는 특성상 육지보다 바다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정교한 해상 방어 체계와 조운·교통망의 반영은 남해 지도 제작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남해현의 전략적 면모와 지리적 실상은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 『광여도(廣輿圖)』, 『지승(地乘)』을 비롯하여 1832년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에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근대적 격변기와 대한제국기로 이어지는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 1899년 『남해읍지(南海邑誌)』, 1907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의 지도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및 말기를 대표하는 주요 지도집과 읍지들에 빠짐없이 수록되었다.
이들 자료는 제작 시기와 구체적인 필사 및 판각 방식에서 저마다 고유한 차이를 보이지만, 고을의 행정 중심지인 읍치(邑治)와 성곽을 비롯하여 산천과 도서, 그리고 조밀하게 구축된 해안 방어 시설을 중심으로 남해만의 공간적 특성을 공통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지도상에 표현된 진산(鎭山)과 읍성, 진보(鎭堡), 역원(驛院), 나루터 등의 유기적 표기는 당시의 통치자들과 지식인들이 변방의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국가를 운영해 나갔는지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결과적으로 고지도에 새겨진 고유한 지명과 독특한 방위 체계, 그리고 촘촘한 군사시설의 배치는 조선 후기 남해가 지녔던 독보적인 전략적 가치와 지역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따라서 규장각에 소장된 총 11종에 달하는 다양한 남해 고지도들을 비교·검토하는 작업은 시기별 남해의 공간 구조 변화와 군사·행정 체계의 실상을 다각도로 복원하는 데 탁월한 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이에 본 글에서는 앞으로 총 3회에 걸쳐 이들 11종의 남해 고지도를 중심으로 「규장각 소장 고지도로 읽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인식과 전략적 위상」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 18C 중반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2008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된 『해동지도(海東地圖)』는 조선 영조 대 국가 통치와 지방 행정 운영을 위해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官撰) 지도집이다.
천하도(天下圖)를 비롯해 외국 지도, 조선 전도, 도별 지도, 군현 지도, 관방 지도 등을 집대성한 종합 지리서로, 단순히 지형만을 묘사한 일반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특히 각 군현 지도 여백에 해당 고을의 연혁과 인구, 군사, 재정, 토산물 등 읍지(邑誌) 내용을 함께 수록한 점은 『해동지도』만의 독창적인 특징이다. 남해현(南海縣) 지도 역시 이러한 편찬 의도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당시 남해현은 오늘날 남해군(南海郡)에서 창선면(昌善面)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邑治)는 현재 남해읍 서변리·남변리·북변리 일대에 자리하였다.
지도는 남쪽을 상단, 북쪽을 하단에 배치하는 독특한 방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행정 중심지와 산천의 관계를 중시한 조선 후기의 공간 인식을 반영한다.
읍치 서쪽의 망운산(望雲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금산(錦山)·소흘산(所屹山)·성현(城峴) 등을 배치한 모습은 남해가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해양 고을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에 기록된 남해읍성(南海邑城)은 둘레 2,876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읍성(邑城) 안에는 우물 한 곳과 샘 다섯 곳이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호수는 4,210호, 인구는 약 1만 9천 명에 달했으며, 2,933결이 넘는 전답과 대규모 군량미를 보유하고 있어 군사·재정적 기반 또한 탄탄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속 남해현(南海縣)은 무엇보다 남해안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평산포진(平山浦鎭), 곡포보(曲浦堡), 상주포보(尙州浦堡), 미조항진(彌助項鎭) 등 해안 방어 시설이 촘촘히 설치되었고, 금산봉수(錦山烽燧)를 중심으로 소흘산봉수와 원산봉수가 연결된 봉수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덕신역(德申驛), 노량원(露梁院), 지족암진(只族巖津) 등은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교통·군사 거점이었다. 특히 관음포(觀音浦)는 고려(高麗) 우왕 때 원수(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왜구를 크게 격파한 곳으로, 남해 해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장소이다.
남해가 왜구의 침략으로 고려 공민왕 때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으로 옮겨야 했던 역사 역시 이 지역이 오랫동안 해상 방어의 최전선에 놓여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도에는 고현산성(古縣山城), 관당성(官堂城), 미조항고진(彌助項古鎭) 등 방어 유적도 함께 표시되어 있어 남해의 군사적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문어, 전복, 홍합, 해삼, 유자, 비자 등 풍부한 토산물과 동백나무가 울창한 소도(蘇島)와 조도(鳥島), 노도(櫓島) 등의 섬은 남해가 풍요로운 해양 문화의 터전이었음을 일러준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일부 오기(誤記)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남해읍성의 높이를 실제 13척이 아닌 3척으로 적거나, 평산포영(平山浦營)을 산포영(山浦營)으로 표기한 사례가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를 활용할 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다른 사료와 상호 대조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해동지도』 속 남해현은 조선 후기 남해 사람들의 삶과 국방, 그리고 바다를 지켜온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 『여지도(輿地圖)』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여지도(輿地圖)』는 2008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된 총 3책으로 이루어진 전국 지도집으로, 1728년과 1767년 사이에 제작된 조선의 군현 행정 체계와 군사적 배치를 상세히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남해현 지도와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읍성 안의 창(倉)을 제외하면 모두 「해동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반대로 「해동지도」에 나오지만, 본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명이 여러 개 있다.
 게다가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다르게 기록된 지명도 보인다.
 왼쪽 아래에는 해도(蟹島)가 2개나 적혀 있는데, 아래쪽의 것은 「해동지도」에 저도(楮島)로 되어있다. 읍치 위쪽의 비자도(榧子島) 역시 「해동지도」에는 비자산(榧子山)으로 되어있다.
 필사 중에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성과 진보(鎭堡)의 성곽이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본 지도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해동지도」와 동일한 크기의 비율로 그리면 정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변화는 섬에 대한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창선도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대체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 섬들은 실제로 상당히 작지만 「해동지도」와 같은 크기의 비율로 그리면 섬의 존재 자체를 표현하기 어렵다.
 기타 창선도는 남해현의 땅이 아니라 진주에 속해 있었음에도 본 지도에 그려져 있다.
 

▲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 『광여도(廣輿圖, 1737~1776년)』 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조선시대의 『광여도(廣輿圖)』는 1737년부터 1776년 사이에 제작된 전국 군현 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南海郡)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邑治)는 남해읍 남변리·서변리·북변리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서쪽에 위치한 고을의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의 좌향(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방위 설정은 자연 지형을 중심으로 행정 공간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조선 후기 지도 제작의 관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진산(鎭山)을 기준으로 공간을 배열한 점은 풍수적 인식과 행정적 위계를 동시에 고려한 결과로, 고을의 중심성과 권위(權威)를 시각적(視覺的)으로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진주계(晉州界)라 표시된 지역은 진주의 월경지(越境地)였던 현 창선도(昌善島)의 모습을 담고 있으나, 실제 지형에 비해 다소 과장된 표현이 관찰된다.
 이는 행정 경계상의 특수성과 군사적(軍事的) 중요성을 지도상에서 부각하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도의 오른쪽 곤양계(昆陽界)로 표시된 지역은 이순신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순국(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으로, 1663년(현종 4)에 사액(賜額)을 받은 충렬사(忠烈祠)가 세워져 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고을 남쪽에는 종3품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미조항진(彌助項鎭),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파견된 평산포진(平山浦鎭), 종9품 권관(權官)이 파견된 곡포진·상주포진(曲浦鎭·尙州浦鎭)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남해안 전략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다만 상주포진(尙州浦鎭)의 '鎭'이 '津'으로 잘못 표기된 점은 기록상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 밖에도 국가 선재(船材) 확보를 위해 벌목이 금지된 봉산(封山) 두 곳과 노량원(露梁院), 지족진원(只簇津院) 등 나루터에 설치된 원(院)의 표기가 상세히 확인된다.
 이는 군사·교통·자원 관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된 공간 구조를 보여주며, 당시 남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과 행정 운영의 실상을 함께 전해준다.
 세 지도는 제작 시기와 목적에 따라 표현의 왜곡과 강조를 달리하며 남해의 전략적 면모를 부각한다.
 우선 방위 설정에서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남쪽을 상단에 두는 독특한 구도를 취한 반면, 『광여도』는 진산인 망운산의 좌향을 고려해 서쪽을 위로 배치했다.
 이는 풍수적 권위와 행정 중심지의 질서를 시각화하려는 조선 후기 지도 제작의 관행을 반영한다. 또한, 『여지도』는 작은 크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곽과 섬의 크기를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군사 정보의 가독성을 높였다. 국방 측면에서 남해는 거대한 연해 방어 기지였다.
 종3품 첨사가 파견된 미조항진을 비롯해 평산포진, 곡포보, 상주포보 등 다수의 진보가 촘촘히 전개되어 남해안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낸다.
 더불어 노량해전의 전적지이자 이순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사액 사당인 충렬사가 하단에 선명히 기록되어 영토 수호의 상징성을 더한다.
 이 외에도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으로 나르는 출발점인 노량조창의 해운 항로, 교통망인 덕신역과 나루터의 원(院), 선박 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봉산(封山)의 표기는 군사와 교통, 자원 관리가 긴밀히 연결된 남해의 행정 실상을 증명한다.



△ 『해동지도』·『여지도』·『광여도』로 읽는 남해현의 역사와 공간 인식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남해현(南海縣) 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기록을 넘어 조선 후기 남해 지역의 정치·군사·행정적 특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세 지도는 제작 시기와 목적에 따라 표현 방식과 방위 체계, 지명 표기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읍성(邑城)을 중심으로 한 행정 질서와 해안 방어 체계, 교통망을 상세히 담고 있다. 특히 미조항진(彌助項鎭)·평산포진(平山浦鎭)·곡포진(曲浦鎭)·상주포진(尙州浦鎭) 등 해안 방어 시설과 충렬사(忠烈祠), 덕신역(德申驛), 노량원(露梁院)의 존재는 남해가 단순한 도서 지역이 아니라 국가 방위와 해상 교통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을 중심으로 산천과 취락을 배치한 지도 구성은 자연환경과 행정 질서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조선 후기 사람들의 공간 인식을 잘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들 고지도가 단순히 지형과 시설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생활상과 경제 구조까지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도에 기록된 봉수망(烽燧網), 포구와 나루, 토산물과 군사 시설은 남해 사람들이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삶의 흔적을 생생하게 전한다.
 문어와 전복, 유자와 비자 등 풍부한 해양·산림 자원은 남해의 경제적 기반을 보여주며, 촘촘한 진보(鎭堡) 체계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바다를 지켜낸 지역민들의 역사를 증언한다.
 결국 이들 고지도는 당시 남해현의 실제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국가 운영 체계와 지역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창(窓)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지도를 통해 선조들의 뛰어난 지리 인식과 국토 경영의 지혜를 되새길 수 있으며, 남해가 간직한 역사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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