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규장각 소장 고지도로 읽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인식과 전략적 위상(2)
『지승』·『경상도읍지』·『대동여지도』·『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구조와 해양 방어 체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남해현 고지도는 행정 중심지와 진보, 봉수, 해상 교통망의 배치를 통해
남해가 국가 방위와 조세 운송의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알려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7월 03일(금) 08:32
▲ 『지승(地乘)』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조선시대 군현 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기록을 넘어 국가의 행정 운영과 군사 방어 체계,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특히 남해현은 남해안과 한려수도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바다를 기반으로 한 교통과 해방(海防)이 고을 운영의 핵심이었던 만큼, 남해의 고지도 속에는 거친 해양 공간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려는 영토 인식과 국가의 세밀한 관방 전략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지승(地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영남읍지(嶺南邑誌)』 등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각 지도는 제작 목적과 표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고을의 중심인 읍치와 진산을 비롯하여 읍성, 진보, 선소, 봉수, 도서 지역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지도에 나타난 방위 체계와 지명 표기, 군사시설의 입체적 배치는 당시 사람들이 자연환경과 행정 질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들 고지도를 시기별로 비교하며 다각도로 살펴보는 일은 조선 후기 남해의 지리 인식 변화와 독보적인 전략적 위상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승(地乘)』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지승(地乘)』은 조선 후기, 1776년에서 1787년 사이에 제작된 회화식 지도책으로, 전국의 군현과 주요 군사 요지를 상세히 수록한 지리서이자 기록화이다.
이 지도에 나타난 창선 지역은 현재 남해군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남해현 읍치(邑治)는 현재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상 아래쪽에 표시된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격전지였으며, 현재 그 위치에는 남해대교가 놓여 있다. 이 지역은 남해상에 섬으로 존재했던 군현(郡縣)이었고,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이 지도는 육지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상에는 현재 설천면 노량에 위치한 충렬사가 보이는데, 이곳은 1663년(현종 4)에 사액(賜額)을 받아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는 곳이다.
그 오른쪽의 고현면 지역, 특히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몰유적지인 이락사(李落祠)가 자리하고 있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古縣城)이 그려져 있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客舍) 2동, 아사(衙舍) 2동, 창(倉) 1동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船所)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烽臺), 진(鎭), 보(堡)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鎭堡)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尙州浦堡)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로 지금의 상주 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鎭)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



△ 1832년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 1832년경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1832년 남해현(南海縣)은 창선면(昌善面)을 제외한 경상남도 남해군 전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邑治)는 남해읍(南海邑) 북변리·서변리·남변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고을의 진산(鎭山) 망운산(望雲山)이 읍치의 서쪽(西)에 위치한 점을 중요하게 인식하여, 지도를 서쪽이 위로 향하도록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위 설정은 자연 지형을 기준으로 읍치의 권위와 중심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이해된다.
그 결과 지도 하단에는 '동접진주창선계(東接晋州昌善界)'라는 표기가 삽입되었는데, 이는 진주(晋州)의 월경지였던 현재 남해군 창선면 일대를 가리킨다.
남해현이 해안 지역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지도에는 수군(水軍)이 주둔하던 진보(鎭堡)가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평산포진(平山浦鎭)과 미조항진(彌助項鎭)은 지도 제작 당시에도 기능하던 진보였으며, 상주포진(尙州浦鎭)과 곡포진(曲浦鎭)은 지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미 '혁파(革罷)'된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지도에 현존 시설과 폐지된 시설을 동시에 반영하려는 제작자의 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남해에 부속된 작은 섬들은 붉은색으로 표현되어 본섬과 쉽게 구분되도록 처리되었으나, 섬의 실제 크기나 해안으로부터의 거리 등은 정확히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항해용 정밀 지도라기보다 행정·군사 인식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 지도임을 시사한다. 명칭이 표기된 섬으로는 현재 미조면(彌助面) 미조리 해안 인근의 호도(虎島)와 조도(鳥島), 그리고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현재 통영시 욕지면 서상리에 속한 갈도(葛島)가 있다.
 읍치(邑治) 아래쪽에 표시된 선소(船所)에는 배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남해현에 속한 전선(戰船)의 정박처였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평산포진(平山浦鎭)과 미조항진(彌助項鎭)에 배 그림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두 진이 혁파되지 않고 실제로 기능하며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현재 대사천으로 불리는 대천(大川)은 순우리말 이름 '한내'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서면 서상리(西上里)의 호포(湖浦) 역시 순우리말 '홀개'의 소리와 의미를 한자로 옮겨 적은 사례로, 지도와 지명 기록을 통해 당시 언어 환경과 지명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나타난 지역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사천시(泗川市)·하동군(河東郡)·남해군(南海郡)과 전라남도 광양시(光陽市)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 위 끝에는 섬진강(蟾津江)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명칭은 하구에 위치한 섬진진(蟾津鎭)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사천시 시내 지역, 곧 구 삼천포시(三千浦市)는 행정 경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지도에도 나타나 있듯이 '삼천포(三千浦)'라는 지명은 삼천포고진(三千浦古鎭)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지도 제작 당시 삼천포진(三千浦鎭)은 이미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미륵도(彌勒島)로 이전한 상태였다. 구 삼천포진이 있었던 지역과 그 남쪽의 창선도(昌善島)는 진주(晋州)의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본래 이 지역은 흥선부곡(興善部曲)이었으나 후일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초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으면서 주현(主縣)이었던 진주에 편입된 것이다.
 실제 지리적으로 창선도는 남해도(南海島)와 인접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또한 삼천포고진(三千浦古鎭)이 있던 곳에는 통창(統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인근 통영(統營)으로 이송할 조세(租稅)를 집산하던 장소였다.
 사천 읍치(泗川邑治) 서쪽, 곧 진주 지역에는 조창(漕倉)이 표기되어 있다. 이곳은 진주(晋州)·곤양(昆陽)·하동(河東)·단성(丹城)·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 등지에서 거둔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집결하여 한양(漢陽)으로 운송하던 거점이었다.
 남해와 곤양(昆陽) 사이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최후의 해전이 전개되어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사한 노량(露梁)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곤양과 남해 사이의 협수로(峽水路)로, 조세 운송과 군사 방어의 관점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도에는 총 다섯 곳의 진보(鎭堡)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해안가와 도서 지역에는 봉수(烽燧)가 다수 설치되어, 이 지역에서 발생한 급보(急報)가 한양(漢陽)까지 신속히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수록된 경상도 남해현(南海縣) 지도는 당시 지역의 행정·군사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남해현은 현재의 남해군에서 창선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邑治)는 남해읍 북변리·서변리·남변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읍치의 서쪽에는 진산(鎭山)인 망운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도 제작자는 산줄기의 흐름과 지형을 고려해 서쪽을 위로 하여 지도를 그렸다.
 이러한 배치는 조선시대 군현 지도에서 간혹 나타나는 방식으로, 실제 방위보다 지역 중심과 산세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지도 하단에는 '동접진주창선계(東接晋州昌善界)'라는 표기가 들어갔는데, 이는 진주의 월경지(越境地)였던 현재 남해군 창선면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남해현은 바닷가에 위치한 군현이었으므로 수군(水軍)이 주둔하는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평산포진(平山浦鎭)과 미조항진(彌助項鎭)은 지도 제작 당시에도 기능하고 있었으며, 상주포진(尙州浦鎭)과 곡포진(曲浦鎭)은 지도에 '혁파(革罷)'되었다고 명기되어 있어 이미 폐지된 진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기는 당시 해안 방어 체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또한 지도에는 남해에 속한 작은 섬들이 크기나 해안과의 거리와 관계없이 상징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름이 기록된 섬으로는 미조면 미조리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호도(虎島, 범섬)와 조도(鳥島, 새섬), 그리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오늘날 통영시 욕지면 서상리(西上里)에 속하는 갈도(葛島)가 있다.
 읍치(邑治) 아래에는 선소(船所)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남해현 소속 전선(戰船)의 정박지를 의미한다. 평산포진과 미조항진에도 배의 그림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해당 진보가 여전히 기능하고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기타 지명 표기에서 대천(大川)은 토착어 '한내'를, 서면(西面) 서상리(西上里)의 호포(湖浦)는 토착어 '홀개'를 각각 한자의 뜻에 맞추어 기록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영남읍지』의 남해현 지도는 행정 중심지의 구조와 해안 방어 체계, 그리고 지역 지명 전통을 함께 보여주는 사료로서, 조선 후기 남해 지역의 역사와 공간 인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고지도가 증명하는 해양 거점 남해의 역사적 가치
 

 『지승』, 『경상도읍지』, 『대동여지도』, 『영남읍지』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는 조선 후기 남해 지역의 공간 구조와 군사·행정 체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지도마다 방위 설정과 표현 기법에는 세부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두 고을의 행정 중심인 읍치를 축으로 진산과 성곽, 진보와 선소, 봉수와 섬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남해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평산포진과 미조항진을 비롯한 해안 방어 시설, 노량해전의 전적지와 충렬사로 상징되는 역사적 공간, 그리고 조세 운송을 위한 해상 교통망의 상세한 묘사는 남해가 단순한 고립된 도서 지역이 아니라 영토 수호를 위한 국가 해양 방위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유감없이 증명한다.
 아울러 창선도의 행정적 변천과 여러 부속 도서의 왜곡·강조된 표현, 그리고 토착 지명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사례들은 당시의 행정 질서와 주민들의 생활 환경을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처럼 고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인식한 공간 질서와 국가 운영의 원리를 담아낸 역사적 기록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지도를 통해 조선 후기 남해가 지녔던 전략적 가치와 지역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나아가 남해가 간직한 역사·문화적 유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이를 미래 세대에 올바르게 전승하기 위한 학술적·문화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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