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규장각 소장 고지도로 읽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인식과 전략적 위상(3)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고지도들은
1906년 창선면의 남해군 이속과 같은 행정구역의 거시적 변천은 물론,
시대적 변화에 따른 군사시설의 재편 과정을 회화식 기법으로 입체하게 투영하고 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7월 10일(금) 01:04
▲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전체(좌) / 주요 지역 확대(우)

조선시대 군현 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평면적 기록을 넘어 국가의 행정 운영과 군사 방어체계,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간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특히 남해현은 남해안과 한려수도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최일선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바다를 기반으로 한 교통과 해방(海防)이 고을 운영의 핵심 기제(機制)였던 만큼, 남해의 고지도에는 도서(島嶼) 공간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려는 국가의 영토 인식과 치밀한 관방(關防) 전략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또한 노량해협과 지족해협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상 교통망, 각종 진보(鎭堡)와 봉수(烽燧), 선소(船所)의 배치는 남해가 단순한 섬 지역이 아니라 국가 해양 방위 체계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지방지도(地方地圖)』, 『영남읍지(嶺南邑誌)』,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와 문헌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각 지도는 제작 목적과 표현 방식에서 저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읍치(邑治)와 진산(鎭山)을 중심으로 읍성, 진보, 선소, 봉수, 도서 지역 등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지도에 나타난 독특한 방위 체계와 지명 표기, 군사시설의 공간적 배치는 당시 통치자와 지역민들이 자연환경과 행정 질서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들 11종의 고지도를 총 3회에 걸쳐 시기별로 비교·검토하고 다각도로 분석하는 일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 전환기에 이르는 남해군의 지리 인식 변화와 전략적 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규장각 소장 고지도 연재의 마지막으로 이번 글에서는 『지방지도(地方地圖)』, 『영남읍지(嶺南邑誌)』,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 및 대한제국기 남해의 공간 인식과 그 변화상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1)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 「남해지도(南海地圖)」에 나타난 남해현(南海縣)은 오늘날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에서 창선면(昌善面)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邑治)는 남해읍(南海邑) 서변리(西邊里)·남변리(南邊里)·북변리(北邊里)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당시 창선도(昌善島)는 진주목(晋州牧)의 관할에 속하였다.
남해는 경상도(慶尙道) 남해안 서쪽 끝에 자리하여 전라도(全羅道)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하동(河東)을 사이에 둔 노량해협(露梁海峽)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최후 전투가 벌어진 군사적 요충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 자락에 자리한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주변 지형이 비교적 간략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1459년(세조 5)에 증축된 성곽(城郭)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나, 관청 건물은 생략되어 있다. 주변 지역에는 이 고을의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듯 진영(鎭營)과 성곽, 봉수(烽燧) 등이 두루 표시되어 있다.
특히 고을 남쪽에는 첨사(僉使)가 주둔하던 미조진(彌助鎭)과 수군만호(水軍萬戶)가 관할 하던 평산진(平山鎭)이 위치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전선(戰船)이 배치된 수군 기지였다.
아울러 상주포(尙州浦)와 곡포(曲浦)는 한때 진영으로 기능하였으나, 1751년(영조 27)에 혁파된 이후에도 지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읍치 동쪽 해안의 선소(船所)에는 왜군이 축조한 선소왜성(船所倭城)의 일부인 천남대(天南臺)와 1599년(선조 32)에 명나라 장수 장량상(張良相)이 세운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또한 노량해협과 더불어 창선도(昌善島)를 사이에 둔 지족진(只簇津)과 전라도 순천(順天)과 연결되는 호포진(湖浦津)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관방(關防)으로 나타나 있다.

▲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수록된 경상도 남해현 지도


2)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의 남해현(南海縣)은 창선면(昌善面)을 제외한 경상남도 남해군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邑治)는 남해읍(南海邑) 북변리·서변리·남변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의 출발점인 진산(鎭山) 망운산(望雲山, 786m)이 읍치의 서북쪽에 자리한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지도 제작 시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표현하였다.
이로 인해 지도 하단에는 '동접진주창선목장(東接晋州昌善牧場)'이라는 표기가 삽입되었는데, 이는 진주(晋州)의 월경지(越境地)였던 현재 남해군 창선면 일대를 지칭한다. 남해현은 해안에 위치하였으므로, 수군(水軍)이 주둔하는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평산진(平山鎭)과 미조진(彌助鎭)은 지도 제작 당시에도 기능하고 있었고, 상주진(尙州鎭)과 곡포진(曲浦鎭)은 '금폐(今廢)'된 진보로 표기되어 있다.
남해(南海)에 속한 여러 섬 역시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나, 항해용 지도가 아니라, 행정 인식을 반영한 지도인 만큼 섬의 크기나 해안으로부터의 거리는 정확히 반영되지 않았다.
동남쪽 해안에 가까운 섬으로는 미조면(彌助面) 미조리(彌助里)의 미조도(彌助島, 누에섬[簪島])가 가장 크게 그려져 있으며, 그다음으로 목도(木島, 나무섬)와 세존도(世尊島)가 표시되어 있다. 특히 세존도는 배가 통과할 정도의 구멍이 있는 특이한 지형적 특징을 지닌 바위섬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욕지도(欲知島)와 연화도(蓮花島)는 현재 통영시 욕지면에 속한 섬으로, 남해 해안에서 다소 떨어져 있음에도 지도에 포함되어 주변 해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지도 좌측 상단에는 마도(麻島)와 오동도(梧桐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 남면 평산리 앞바다에 해당한다. 지도 우측에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일본군과 마지막 혈전을 벌인 노량해전 격전지가 나타나 있으며, 그 왼쪽에는 충무공유지비각(忠武公遺址碑閣)이 그려져 있다. 또한 현재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이락사(李落祠)는 이순신 장군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1832년(순조 32) 충무공의 8세손(八世孫) 이항권(李恒權)이 통제사로 부임한 뒤 왕명에 따라 전사 지점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이락사의 역사적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 1899년 『남해읍지(南海邑誌)』에 수록된 남해현 지도


3) 1899년 『남해읍지(南海邑誌)』에 나오는 남해현 지도


1890년대 말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읍지(南海邑誌)』(奎 10880)에 수록된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한 회화식 지도이다.
지도에는 남해섬(南海島) 전역에 걸쳐 둥근 형태의 흑청색 산들이 빽빽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섬 주변은 푸른색으로 채색하여 바다를 나타내었다.
 지도 중앙에는 읍치(邑治)가 자리하고, 읍성(邑城)과 내부 관아 건물이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남해가 군사적 요충지(要衝地)였던 만큼, 섬 남쪽에는 평산진(平山鎭)과 미조진(彌助鎭)을 비롯한 여러 진(鎭)과 봉수(烽燧)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모습이 확인된다. 또한 지도 북쪽 끝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무공 비각(忠武公碑閣)이 표시되어 있어, 전란의 기억과 국가적 충절(忠節)의 상징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 지도는 남해군(南海郡)에 속한 각 고을의 위치와 주요 지명(地名)을 비교적 상세히 표기함으로써, 당시 남해 지역의 행정 구획과 군사 방어체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한다.
 더불어 산세와 해안선, 진영(鎭營)과 봉수(烽燧)의 배치는 남해가 해상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시각적으로 분명히 보여주며, 연해 방위 체계 속에서 차지한 위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이 지도는 19세기 말 지방 사회의 공간 인식과 국가 통치 질서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 1907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에 수록된 남해군 지도


4) 1907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에 나오는 남해군 지도
 

 1907년경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奎 10875)에 수록된 지도는 원본 크기가 27cm×38.5cm이며, 서쪽을 상단으로 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한 회화식 지도이다.
 지도에는 산천이 비교적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지형의 윤곽과 공간구성이 명확하다. 섬 주변은 푸른색으로 채색하여 바다를 나타내었으며, 육지와 해양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1906년 9월 28일 진주(晋州)에서 남해(南海)로 이속(移屬)된 창선면(昌善面)은 지도 동쪽에 위치하여 행정구역 개편 이후의 변화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중앙에는 읍치(邑治)가 자리하고 있으며, 읍치 남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이, 북쪽에는 향교(鄕校)가 표시되어 있어 지방 통치 질서와 유교적 의례 공간의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남해 북쪽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북쪽 끝에 그려져 있어 역사적 기억과 충절의 상징이 지도 속에 반영되어 있다.
 이 지도는 남해군(南海郡)에 속한 각 고을의 위치와 주요 지명을 비교적 상세히 표기함으로써,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지방 행정과 군사 인식의 단면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제작된 남해 관련 고지도(古地圖)들은 남해 지역의 행정 경계 변천과 군사 방어체계, 해상 교통망의 발달, 지역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이러한 지도들은 단순한 지리 정보의 기록을 넘어, 국가가 남해(南海)를 어떻게 인식하고 관리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망운산(望雲山)을 중심으로 읍성과 진보, 봉수, 선소 등이 유기적으로 배치된 모습은 남해가 단순한 해안에 위치한 현(縣)이 아니라 조선 해상 방위와 통신 체계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남해가 왜구(倭寇)의 침입과 해상 교통을 동시에 고려해야 했던 전략적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소장 고지도에 대한 시각적·공간적 분석은 남해 지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한편, 조선 후기 군사·행정 체제의 운영 양상과 공간 구조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단서를 제공한다.



5) 규장각 소장 고지도의 사료적 의의와 남해 지역사 연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남해 관련 고지도들은 제작 시기와 목적, 표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남해를 국가 해양 방어체계의 핵심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도 속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진보와 봉수, 선소와 나루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망운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 질서 또한 일관되게 나타난다.
 특히 노량해협과 지족진, 평산진과 미조진 등은 남해가 단순한 도서 지역이 아니라 군사·행정·교통 기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던 전략적 공간이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창선도의 행정적 변천과 섬들의 상징적 표현, 토착 지명의 기록은 당시 지역사회의 생활 환경과 공간 인식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 연재를 통해 살펴본 11종의 남해 고지도는 시대 변화에 따라 남해를 바라보는 국가의 시선과 지역의 변화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18세기 중반의 『해동지도(海東地圖)』·『여지도(輿地圖)』·『광여도(廣輿圖)』를 비롯하여 『지승(地乘)』, 1832년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는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구조와 전략적 위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근대적 전환기와 대한제국기에 편찬된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 1899년 『남해읍지(南海邑誌)』, 1907년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의 지도는 행정구역 개편과 지역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며 새로운 시대의 남해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규장각 소장 고지도는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지역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학술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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