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너무 늦은 봄은 없다"
76세 만학의 열정으로 자서전 『고맙습니다 내 삶』 출간
가위 하나로 일군 삶, 배움과 나눔의 꽃으로 피어나다
이태인, 홍성진 기자
발행연월일 : 2026년 08월 14일(금)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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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FM과 남해미래신문이 공동 기획한 특집 방송 [남해인 초대석]은 지역 사회 각계각층에서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일궈온 우리의 이웃을 모셔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다. 화려한 수식어나 거창한 명예를 내려놓고, 오롯이 남해라는 공동체 안에서 숨 쉬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온 한 사람의 '남해인'. 이번 초대석의 주인공은 남해읍에서 오랜 세월 '태양미용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이웃의 머리를 만지고 가슴속 멍울까지 쓸어내려 준 윤순애(76) 원장이다. 최근 70년이 넘는 자신의 굴곡진 생애를 손끝으로 정성껏 써 내려간 자서전 『고맙습니다 내 삶』을 출간하고 감동적인 출판기념회를 마친 그녀. 마주한 윤 원장의 수줍은 미소 속에는 지나온 세월의 파도를 견뎌낸 단단함과 고향 남해를 향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가위 하나와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 온 윤순애 원장의 서사를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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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 정거리 물방다리의 개구쟁이, 만석꾼 아버지의 큼직한 그늘
윤순애 원장의 고향은 이동면 정거리다.
시장이 바로 옆에 위치해 늘 사람 온기로 북적이던 그곳에서 윤 원장은 7남매(4녀 3남)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그녀는 동네 남학생들과 어울려 냇물과 물방다리 밑에서 한여름 더위를 식히던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였다.
"어릴 적엔 가마솥 더위가 찾아오면 동네 남자아이들과 함께 냇가 물방다리 밑으로 달려가 물놀이를 하곤 했지요.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아무 근심 없이 맑은 물속을 헤엄치던 그 시절의 원동력이 평생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그녀의 가슴속에 새겨진 고향의 잔상은 유년의 추억에 그치지 않는다.
윤 원장의 부친 윤만식 선생은 남해군 8개 면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이자 만석꾼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부친은 공익적 봉사와 기부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지역의 파출소, 농협, 관공서 건립에 앞장섰고, 가난하여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지역 청년들과 주민들을 위해 베풀었다.
"아버지는 술이나 화투 같은 유흥은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공공기관이나 학교를 세우는 데 전 재산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심지어 이동중학교를 지을 때도 큰 성금을 내셨고, 돈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이웃을 위해 대납까지 해 주셨습니다."어머니 역시 이동면 일대에서 '양칠리 할매', '깨끔네 할매'라는 정겨운 별칭으로 불릴 만큼 원칙이 엄격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이었다.
키가 크고 우뚝했던 어머니와 부친의 남다른 이웃사랑은 어린 윤순애의 인격 형성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만석꾼 집안의 막내딸이었음에도 윤순애 원장의 청소년기는 뜻밖의 가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부친의 과도한 선의와 보증, 이웃을 향한 무조건적인 베풂으로 인해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금 1,200원이 없어 어머니가 애를 태워야 했고, 매달 내야 하는 210원의 수험료조차 밀리기 일쑤였다.
학창 시절 남들이 다 가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의 그늘 속에서도 부친이 보여준 '타인을 향한 베풂'과 어머니의 정갈한 품성은 윤 원장의 마음속에 그 어떤 유산보다 값진 인생의 이정표로 자리 잡았다.
#2. 명동 미용학교의 서러운 도시락, 미국 달라스의 차고 미용실을 거쳐 고향으로
고향 남해에서 중학교를 마친 17세의 윤순애는 가슴속에 학업과 성공에 대한 열망을 품고 상경길에 올랐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며 도달한 서울은 낯설고 냉정한 곳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의 길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손끝으로 생계를 일굴 수 있는 '미용 기술'이었다.
서울 태평로의 정하 미용학교에 입학하고, 당대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명동의 '유님미용실'에 들어간 윤 원장의 청춘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인천 소사(현 부천)에서 매일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명동까지 걸어 다녔다. 형편이 어려워 점심 도시락조차 싸 오지 못했던 날이 허다했다.
"동기들이 모여앉아 정성스레 싸 온 도시락을 까먹을 때, 저는 배고픔과 서러움을 삼키며 조용히 뒤돌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해 사투리가 투박하다며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고 뒤돌아 울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가슴을 치며 다짐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기술을 다져서, 나중에 내가 잘살게 되면 나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반드시 도와주리라' 하고요."어려움을 이겨내고 선배와 스승들에게 기술과 정직함을 인정받은 윤 원장은 더 큰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던 세 살 터울의 언니와 형부의 권유로 미국 달라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 땅이었지만, 윤 원장은 정직함과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정면 돌파했다.
미국 미용 학교에 등록해 한 달 만에 영주권을 취득하고 까다로운 미국 미용 면허증과 국제 운전면허증까지 단번에 따냈다.
집 차고를 개조해 작은 미용실을 차린 그녀는 특유의 섬세한 손길과 정성으로 교민들은 물론 현지 미국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손님이 준 팁을 모으고 차곡차곡 기술을 키워내며 미국에서 만 5년 동안 기반을 잡아가던 윤순애 원장.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을 다시 한국으로, 고향 남해로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미국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도 밤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막내 딸래미를 늘 그리워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영주권을 포기하고 돌아와 연로하신 아버지가 86세, 어머니가 85세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곁에서 직접 수발을 들며 모셨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습니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남해읍 시장 골목에 미용실을 열었다. 26년 전, 현재의 번듯한 건물과 상가를 마련할 당시에는 잊지 못할 따뜻한 이웃의 손길도 있었다. 지역 이웃인 서진주유소 대표 부부가 윤 원장의 곧은 성품과 신용만을 믿고 무려 5,0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선뜻 무이자로 빌려준 것이다.
"당시 5,000만 원은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거금이었습니다. 오직 저라는 사람 하나만을 믿고 1년 가까이 선뜻 돈을 내어주신 서진주유소 부부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어주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때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3.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방, 삶의 멘토들과 나눈 진심
남해읍 태양미용실은 단순한 머리방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주민들이 찾아와 삶의 고단함과 기쁨을 털어놓는 소통의 사랑방이자 상담소였다.
머리를 매만지는 윤 원장의 가위 소리에 맞춰 손님들은 고민과 가정사, 자식 이야기, 부부간의 갈등을 꺼내놓았다.
남편의 고스톱이나 외도로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이웃 여성이 윤 원장의 따뜻한 조언과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도 했고, 자식 문제로 속을 끓이던 어머니들이 윤 원장의 진심 어린 위로에 눈물을 닦고 돌아가기도 했다.
윤 원장이 수십 년간 미용 봉사와 상담을 이어오며 지켜온 단 하나의 철칙은 바로 '비밀 엄수'와 '진심 어린 경청'이다.
"미용사는 손님의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속 상처도 함께 만지는 사람입니다. 손님이 털어놓은 가슴 아픈 사연이나 비밀은 절대 문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입을 꼭 다물고 그저 온전히 들어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은 실패를 해봐야 일어서는 법이고, 버림을 받아도 다시 일어설 줄 알아야 한다'며 진심으로 다독여주는 것이 제 미용 철학이자 삶의 원칙입니다."이처럼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온 윤 원장의 삶 뒤에는 그녀가 평생 감사함을 품고 살아온 멘토들이 존재한다.
윤 원장의 자서전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이들은 20년 단골 손님이자 해성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지낸 유민현 선생님, 그리고 진주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동생 정강수 씨였다.
윤 원장이 1년 반 동안 손수 꾹꾹 눌러쓴 원고를 읽어본 유민현 선생님은 "윤 원장님, 이 글은 기교는 없을지언정 진솔한 삶이 담겨 있어 작가가 쓴 글이나 다름없습니다"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동생 정강수 씨 역시 누나의 원고가 훌륭한 자서전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서울의 전문 작가와 연결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또한, 60세가 넘어 뒤늦게 학업의 길에 들어섰을 때 그녀를 따스하게 맞아주고 자식처럼, 스승처럼 이끌어 준 대학 교수들과 학우들 역시 윤 원장의 삶을 풍요롭게 가꿔준 소중한 인연들이다. 윤 원장은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이웃들, 기쁠 때 함께 웃어준 인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윤순애가 존재한다"며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4. 62세의 고교 검정고시, 67세의 학사모 "시작하지 않은 자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윤 원장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화두는 단연 '배움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도전'이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한(恨)은 가슴속 깊은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미용 기술로 미국까지 다녀오고 자리를 잡았지만,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늘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TV 뉴스에서 나이 많은 어르신이 한글을 배우고 검정고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본 윤 원장은 가슴속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방송을 보는 순간 '나라고 못 할 게 무엇인가!' 하는 오기와 열정이 솟구쳤습니다. 즉시 진주의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지요. 미용실 문을 닫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진주로 올라가 찜질방에서 자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만 62세였습니다."수학 기호와 생소한 용어들 앞에서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해졌지만, 윤 원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생활 덕분에 익숙했던 영어 과목에서는 학원 선생님조차 "대학생보다 낫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윤 원장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단 40일 만에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배움의 물꼬가 터지자 그녀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어르신들과 장애인 등 소외된 이웃을 체계적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에 순천제일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입학했다.
매일 새벽 남해에서 순천까지 오가는 강행군 속에서도 윤 원장은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
과거 명동 미용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서러워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대학 시절 매일 7~8인분의 밥과 반찬, 튀김을 싸 가지고 다니며 어린 학우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였다.
순천제일대를 졸업한 후에는 내 고향 남해에 위치한 남해대학 비즈니스사무과에 편입하여 만 67세의 나이로 영예로운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남해대학 졸업식 당일, 4학년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 축사를 낭독하던 윤순애 원장의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렸다.
그때 그녀가 남긴 축사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다.
"시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습니다. 시작이 두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람은 '시작해 본 경험'이 남고, 시작해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라는 교훈'을 얻으며, 시작해서 끝까지 달려간 사람은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얻습니다. 꿈을 향해 망설이지 말고 두드리십시오!"62세에 검정고시를 시작해 67세에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기까지, 윤 원장은 나이라는 숫자가 결코 배움의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최근에는 AI와 스마트폰 등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미용실을 찾는 젊은 청소년이나 학생 손님들에게 겸손하게 스마트폰 사용법과 AI 기술을 물어보고 배우며, 배움의 수고비로 용돈을 쥐여주는 '영원한 만학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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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민들에게 '배우고 들어주며 베푸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인생의 칠순을 넘어 중반으로 들어선 윤순애 원장에게 "향후 남해 군민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특유의 소탈하면서도 진정성 어린 목소리로 답변을 이어갔다.
윤 원장이 선택한 자신만의 핵심 가치이자 인생 브랜드는 바로 '끝없이 배우고, 남의 말을 들어주며, 받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저는 거창한 부자나 유명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윤순애라는 사람은 참 부지런히 배웠고, 남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참 따뜻하게 들어주었으며,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남에게 베풀고 간 참 좋은 이웃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그녀는 자신이 써 내려간 자서전 『고맙습니다 내 삶』 역시 개인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삶의 무게에 눌려 절망하고 있거나, 나이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이웃들, 그리고 남해의 젊은 청년들에게 "나 같은 사람도 해냈다. 당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윤 원장은 힘이 다하는 날까지 미용실이라는 소중한 터전에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미용 봉사를 지속하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나눔과 배움의 불꽃은 이제 고향 남해 전체를 따스하게 온기를 품은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커다란 등불이 되어 빛나고 있다.
윤순애 원장이 출연한 [남해인 초대석] 생생한 현장 영상과 음성은 아래 QR코드를 스캔하시면 남해FM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언제든지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군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시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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