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871년 남해현(南海縣)의 군기(軍器)와 해상 방어체계
『영남읍지』 「남해」 군기(軍器) 기록은 19세기 후반 외세 침략위기 속에서 최전방
해상요충지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정교한 행정망으로 장악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기록 속의 상세한 무기와 보급품 목록은 조선후기 국방력이 무력했다는 통념을 깨고,
전통 병기와 화포의 유기적 운용 및 종합 병참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8월 21일(금) 16:26
▲ 1871년 영남읍지 남해 지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조선시대의 지방 읍지(邑誌)는 대체로 지역의 연혁과 산천, 인물, 풍속을 정리한 인문 지리지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 「남해(南海)」를 펼쳐보면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는 치밀한 군사 행정 장부(帳簿)를 만나게 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이 기록은 단순한 지역 소개서를 넘어 19세기 후반 남해현(南海縣)이 보유한 군사력과 병참 체계를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육군(陸軍)·봉수(烽燧)·수군(水軍)의 무기와 장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군기(軍器)」 항목은 조선 후기 국가가 최전선 방어 거점을 얼마나 정밀한 행정망으로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국방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읍지가 편찬된 1871년은 조선의 대외 방위 전략이 중대한 전환을 맞이한 시기였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서양 이양선(異樣船)의 강력한 화력은 해안 방어체계의 전면적인 재정비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해안의 최전선에는 더욱 치밀한 방어망과 군수 물자의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해졌다.
한려수도의 중심이자 왜구를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해는 고려 말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까지 해상 방위의 핵심 거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작성된 군기(軍器) 기록은 단순한 재고 목록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뒷받침한 병참(兵站) 기지의 전력을 담은 기록이다.
육군과 봉수, 수군을 구분해 정리한 편제는 당시 군사 행정의 전문성과 조직성을 잘 보여준다.
기록을 채운 수많은 숫자는 단순한 물품의 수량이 아니라,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토를 지키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조선의 행정력과 남해 사람들의 헌신을 증언한다.
결국 『영남읍지』의 군기(軍器) 기록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지방 방어체계가 외세의 위협에 대응해 치밀한 관리와 대비를 이어 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다.

▲ 1871년 『영남읍지』「남해현」 군기(軍器) 조항
▲ 1871년 『영남읍지』「남해현」 군기(軍器) 조항


△ 육군기질(陸軍器秩)에 투영된 전통 무기와 화기의 유기적 병행 운용 체계


조선 후기에는 화약 무기의 등장으로 활과 화살 같은 전통 무기가 도태되었거나 형식적으로만 남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영남읍지』 「남해」 육군기질(陸軍器秩) 항목은 이러한 통념을 뒤집으며, 19세기 후반까지도 전통 무기와 화기가 상호 보완적으로 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남해현 읍성 중심의 육상 방위 체계를 담은 이 기록에는 활과 조총, 부속 장비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사면이 바다라 적의 기습 상륙 가능성이 컸던 남해의 지리적 여건상, 육상 전력은 해안을 돌파한 적과의 야전(野戰)과 공성전(攻城戰)에 모두 대비할 수 있도록 다층적 무기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 기록에는 "흑각궁 20장, 교자궁 332장, 조총 144자루, 그중 2자루는 경오년 월과에서 새로 얻어 실제 합계는 146자루이다(黑角弓二十張 校子弓三百三十二張 鳥銃一百四十四柄 內二柄加得於庚午月課實合一百四十六柄)"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기록은 남해현 육군의 정밀한 군수 행정과 무기 편제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력 원거리 무기는 전통 복합궁인 교자궁(校子弓, 332장)이었으며, 이는 지휘관이나 특수 병종이 사용하던 흑각궁(20장)과 철저히 구분되어 관리되었다. 여기에 주력 화기인 조총이 함께 편제되어 활과 화기의 균형을 이루었다.
특히 조총의 증감과 보충 내역을 월과(月課)를 통해 낱개 단위까지 기록한 점은 조선 후기 군기 행정이 고도로 체계적인 재고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성벽 위에서 사거리와 재장전 시간의 약점을 서로 보완했던 활과 조총은, 외세의 위협 속에서 남해의 육상 방위력을 든든히 떠받친 핵심 전력이었다.



△ 남해를 지킨 또 하나의 무기, 지휘와 통신 체계


『영남읍지』 「남해」 육군기질(陸軍器秩)의 또 다른 특징은 공격 무기뿐 아니라 군대의 생존을 위한 방어 장비와 전장의 지휘·통신 체계까지 유기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에는 병사들의 몸을 보호하는 철갑옷(鐵甲衣)과 철투구(鐵甲胄)는 물론, 적의 돌격을 저지하고 진영을 구축하는 방어 시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방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려 적 보병과 군마의 진격을 막는 마름쇠인 철질려, 그리고 나무와 철재를 엮어 기병의 돌격을 차단하는 방책인 거마창(拒馬槍)이 대표적이다.
실제 기록에는 "철질려 1,200개, 거마창 20좌, 오방신기 5면, 영기 10면, 금고기 2면, 징 2좌, 나발 4자루"라고 구체적인 수량이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어 시설을 읍성에 비축한 사실은 남해현 육군이 단순한 해안 경비를 넘어 수성전과 진지전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장의 혼란 속에서 군령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구축된 시청각 신호 체계는 당시 군사 행정의 높은 수준을 증명한다.
진형과 방위를 지시하는 오방신기, 군령을 전달하는 영기, 행렬의 길을 여는 청도기(淸道旗), 전진과 후퇴를 지휘하는 금고기와 고조기(鼓招旗) 등의 깃발류는 물론, 징·나발·유령(鍮鈴) 같은 신호 악기가 더해져 시각 신호가 닿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휘권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 군영이 정교한 지휘·통신 체계를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조직적인 군대였음을 뒷받침하는 소중한 증거다.



△ 「봉수군기질(烽燧軍器秩)」- 숫자가 말해주는 조선의 최첨단 통신망


조선시대 국방망에서 봉수(烽燧)는 오늘날의 군사 위성이나 레이더망에 비견되는 국가 기간 통신망이었다.
높은 산봉우리에서 연기와 불꽃으로 변방의 위급 상황을 한양 목멱산(木覓山)까지 신속히 전달했던 이 체계의 중심에 남해의 봉수대가 있었다.
『영남읍지』 봉수군기질(烽燧軍器秩)은 일반 읍지가 봉수의 위치와 연결망만 기록한 것과 달리, 봉수군이 사용한 무기와 신호 연료, 방재 장비의 수량까지 상세히 적은 드문 사료다.
실제 기록에는 "승자총 1자루, 말똥 3석, 짚단 3석, 소나무 횃불 50자루, 쑥 횃불 50자루, 멸화기 3좌, 물항아리 2좌(勝字銃一柄 馬糞三石 積穰三石 松炬五十柄 艾炬五十柄 滅火器三坐 水缸二坐)"라고 구체적인 물품들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록은 남해의 봉수군이 단순한 감시병이 아니라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독자적으로 대응하던 전투 병력이었음을 보여준다.
봉수대에는 교자궁과 화살, 조총은 물론 휴대용 화기인 승자총까지 갖추어 산 정상이라는 지형에 적합한 방어력을 확보했다.
특히 말똥인 마분(馬糞), 짚단인 적양(積穰), 소나무·쑥 횃불 등은 기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연기와 불빛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수 연료였다.
습기를 머금은 말똥은 짙은 연기를 오래 피워 올렸고, 쑥은 불꽃을 지속시켜 주야간 신호 전달의 정확성을 높였다.
여기에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 멸화기(滅火器)와 물항아리인 수항(水缸)을 상설 비치한 점은 봉수대가 정보 전달, 방어, 재난 대응을 유기적으로 수행하던 체계적인 종합 군사시설이었음을 입증한다.



△ 수군기질(水軍器秩)의 방대한 화포 목록과 해군력의 실체


『영남읍지』 「남해」 편의 백미이자 군기 기록의 중심은 단연 「수군기질(水軍器秩)」이다. 육군과 봉수 장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방대한 이 기록은 조선 후기 남해현이 단순한 섬이 아니라 국가 해양 방위를 책임진 핵심 수군 기지였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확립한 화포 중심의 해전 전통은 1871년 고종 대에도 계승되어 더욱 체계적인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현자총 17위(자루), 지자총통 4위(자루), 불랑기 8위(자루), 정철자포 21문, 화약 633근 4량 1전, 납탄환 19,814개(玄字銃十七位 地字銃四位 佛狼機八位 正鐵子砲二十一門 火藥六百三十三斤四兩一錢 鉛丸一萬九千八百十四箇)"라는 기록이다.
 이 대목은 남해 수군의 막강한 화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력 화포인 현자총통(玄字銃筒)과 지자총통(地字銃筒)은 물론, 정철자포(正鐵子砲)를 교체하며 연속 사격이 가능한 불랑기(佛狼機)가 자포 21문과 함께 편제되어 화력의 지속성을 높였다.
 이를 운용하기 위해 화약 633근과 납탄환 1만 9,814발을 세밀하게 관리했으며, 적선을 격파하는 정철환(正鐵丸)과 소수철환(小水鐵丸), 불을 붙여 공격하는 화전(火箭), 대형 화살인 수장군전(水將軍箭), 장거리 사격용 편전(片箭)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화포와 전통 활 전술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복합 전투 체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무기 구성과 치밀한 병참 관리는 남해 수군이 단순한 연안 경비를 넘어, 외세의 침입에 맞서 대규모 해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실전 전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 톱과 자재, 군량미가 대변하는 조선의 종합 병참 체계
 

 아무리 강력한 화포를 갖춘 전선이라도 선체가 부식되고 돛대와 노가 파손되면 바다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영남읍지』 「수군기질」의 진정한 가치는 화포의 수량 자체보다 군선을 운용하기 위한 목재, 부속 자재, 공구, 장기 항해용 보급품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한 병참(Logistics) 기록에 있다.
 조선의 군수 행정은 전쟁의 승패가 전장뿐 아니라 정비 능력과 물자 관리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기록에는 "돛대 목재 34개, 노 목재 50개, 돛줄 및 닻줄 4장, 연마석 1,000개, 선식 30근, 황촉 400자루 " 등 군선의 기동력과 전투 지속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재들이 치밀하게 명시되어 있다.
 바닷물에 노출되어 마모가 빠른 군선의 특성상 이러한 정비 자재는 전력 유지의 핵심이었다.
 기록에는 돛대용 장목과 노목, 닻 제작에 쓰이는 정목은 물론 노돌기 400개와 노끈 140개까지 상시 비축되어 있었다.
 또한 군영에서 직접 수리할 수 있도록 톱, 송곳, 쇠망치와 연마석인 수마석 1,000개를 갖추었으며, 장기 항해를 위한 비상식량인 선식 30근과 야간 경계에 필요한 황촉 400자루까지 세밀하게 관리했다.
 이처럼 구체적인 병참 장부는 조선 수군이 단순히 함선을 보유한 조직에 그치지 않고, 정비와 보급 능력을 유기적으로 갖춘 체계적인 상비 해군이었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사료다.
 


△ 기록 속 숫자는 남해를 지킨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였다
 

 1871년 『영남읍지』 「남해」의 군기(軍器) 항목을 읽는 일은 단순히 무기 종류와 재고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촘촘한 숫자와 량(兩)·전(錢)·개(箇) 등의 단위 행간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물결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화포를 만들던 대장장이, 산 정상에서 횃불을 지키던 봉수군, 거친 바다에서 군선을 수리하던 수군 장졸들의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치밀한 군수 장부(軍需帳簿)는 조선 후기 군사력이 허술하고 전근대적이었다는 통념을 깨고, 체계적인 국방 행정과 군사 운영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본 읍지는 남해의 향토사(鄕土史)를 넘어 조선 후기 군사사와 과학기술사, 그리고 이두식 표기와 물품 명칭을 담은 국어학 자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남해는 아름다운 한려해상의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150여 년 전 남해 바다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국방을 지켜낸 최전선이었다.
 따라서 본 읍지에 담긴 활 한 장, 화살 한 발, 화약 한 근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지속적으로 연구·번역하는 일은 선조들의 국방 정신을 미래 세대에 계승하는 중요한 문화유산 작업이다.
 결국 이 자료는 역사를 이끈 주체가 소수의 장수와 정치가만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군사 체계를 유지했던 이름 없는 남해 사람들이었음을 증명한다.
▲ 1871년 영남읍지 남해 「군기(軍器)」 항목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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