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삶과 문학, 수필, 시조 - 붉은 여름을 보내며…

"사람들의 삶도 배롱나무의 꽃과 유사하여, 한 번 피어난 배롱나무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배롱나무의 붉은 속성을 이어가듯이 우리 삶도 그러하다"

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04일(금) 21:22
송홍주 남해문학회장, 시조시인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달구는 여름날,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런 뙤약볕 속에서도 도로변에 선 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배롱나무꽃이다. 배롱나무는 한여름 볕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려 마치 지나는 길손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듯하다.
여름날 이런 붉은 배롱나무꽃을 보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 되면 동네 아이들과 마을 뒷산으로 소몰이하러 다녔다.
마을 뒷산 정상 부근에는 '쇠마당'이라 부르던 마을에서 공동관리하는 야산이 있었다. 한 가운데 제법 큰 묘지가 몇 기 있었고 그 곁에는 붉은 꽃을 활짝 피운 배롱나무 여러 그루가 매끈한 자태를 자랑하며 여름 내내 서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꽃 빛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듯 여름을 견디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소몰이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놀이터이자 쉼터였다. 어른 키를 훨씬 넘는 큰 배롱나무의 줄기는 매끈하고 갈색을 띠었다. 우리는 소들이 풀을 뜯게 하고 나무에 올라가거나 가지에 매달리며 배롱나무가 주는 그늘에서 하루해를 보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에 보았던 대부분의 공동묘지나 묘소 주변에는 배롱나무 한두 그루씩 서 있었다.
잘 가꾸어진 고즈넉한 묘소 옆에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서 있으면 한층 더 고결하고 따뜻한 느낌이 있어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한 조경수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묘역을 지켜오면서 여름 내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조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려는 아름다운 마음의 투영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만나는 배롱나무는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자주 찾는 인근의 창원대학교 남해캠퍼스 교정에 가면 곳곳에 붉은 배롱나무꽃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를 찾는 사람들에게 배롱나무꽃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위안이 된다.
또 올봄에 본관 앞에 작은 정원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그곳에는 유난히 눈길을 끄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들어섰다.
3층 건물 높이 정도의 키가 큰 배롱나무인데,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피어난 꽃은 붉은색이 아니라 하얀색이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날 건너편 국민체육센터에서 내려다보면, 높은 나무에 하얀 꽃송이들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한 폭의 시원한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붉은 배롱나무꽃이 뜨거운 여름의 정열이라면, 하얀 배롱나무꽃은 그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한 줄기 바람처럼 느껴진다.
배롱나무는 7월부터 9월까지 100일 정도 오랜 기간 꽃을 피우며 흔히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꽃 한 송이가 백 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붉은빛을 이어간다.
그래서 배롱나무꽃은 단순히 오래 피는 꽃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꽃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까닭으로 정자나 서원, 묘소 등의 주변에 심어 고결한 선비 정신과 조상을 기리는 뜻을 함께 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공공건물이나 정원의 조경수, 도로변의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 무더운 여름철 내내 사람들의 눈을 즐겁고 시원하게 한다.
특히 서면 스포츠파크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뜨거운 햇볕에도 붉은 꽃을 계속 피우며 긴 여름 동안 지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배롱나무꽃을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꽃은 어쩌면 꽃의 아름다움보다 더 많은 삶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린 시절 소몰이를 하며 매달려 놀았던 묘지 옆의 배롱나무는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시절의 배롱나무들이 세월을 지나 여름의 길목마다 붉거나 하얀 꽃을 피우는데, 어느덧 나는 그 배롱나무를 바라보던 어린 시절을 훌쩍 지나 인생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지나고 있다.
사람들의 삶도 배롱나무의 꽃과 유사하여, 한 번 피어난 배롱나무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배롱나무의 붉은 속성을 이어가듯이 우리 삶도 그러하다.
젊은 날의 열정이 한순간의 불꽃이 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굴곡을 겪을 때마다 다시 피어나서 더 아름다운 삶이 된다.
내 삶도 배롱나무가 따가운 햇살을 견뎌내듯 수많은 시련을 겪어오면서 꿋꿋하게 변치 않는 마음으로 나만의 꽃을 피워 왔다.
우리의 남은 인생도 백일을 피는 붉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따뜻한 빛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배롱나무꽃을 소재로 지은 자작 시조 한 수를 소개하면서 끝을 맺는다.




백일의 붉은 마음



매끈한 붉은 살결, 그 절개 고결하여

백일의 타는 마음 지친 빛 하나 없이

염천의 긴 여름 지나 길손마다 반긴다.



뙤약볕 몸에 안고 붉은 숨 토해내며

지고 또 다시 피어 시듦을 잊었으니

황혼에 다다른 삶도 다시 붉게 물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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