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18일(금)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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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감도 익어갑니다. 밤도 익어갑니다."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글의 첫 구절이다. 어린 시절 그 글을 읽으며 맞이했던 추석의 풍경은 지금도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해마다 추석이 가까워지고 가을바람이 불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하나둘 기억의 문을 열고 찾아온다.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남해의 나지막한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 저 멀리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간다.
들판에는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산자락에는 가을빛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바닷바람 끝에는 알싸한 흙냄새가 섞여 있고, 해 질 무렵이면 붉게 물든 석양이 마을 지붕과 논두렁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 시절 우리가 맞이했던 추석은 연초가 되면 최치환·신동관 국회의원이 나누어 주던 빛바랜 한 장짜리 달력 한 귀퉁이에 적힌 '추석'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날이었다. 온 동네가 하나의 생명처럼 꿈틀대던 거대한 축제였고, 고향 사람들의 정과 삶이 한데 어우러지는 마을의 큰 잔치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시골 마을이 추석만 되면 사람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활기를 되찾았다. 먼 객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과 이웃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었다. 그때의 추석에는 지금은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특별한 설렘과 따뜻한 기다림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는 남들이 말하는 색동옷의 곱고 화려한 추억 같은 것은 딱히 없었다. 흙먼지가 묻은 무릎과 여기저기 닳아 빠진 검정 고무신이 우리의 일상이었으니, 알록달록한 색동옷이나 비단옷은 그저 먼 딴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명절이라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새 고무신 하나 얻어 신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부러운 풍경이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마을 어귀를 가득 채웠다.
바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고향을 떠나 마산 한일합섬이나 부산 국제상사 등 도시의 공장으로 향했던 형님과 누나들이 명절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길이었다. 추석 명절 전날이면 마을 어귀에 커다란 대절버스가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들어서곤 했다. 버스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면 동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버스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버스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그 안에서 누가 내릴지 기다리는 것도 어린 우리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버스에서 내리는 형님과 누나들의 손에는 도회지에서 마련해 온 세련된 물건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선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양손 가득 들린 보따리에는 도시에서 사 온 옷가지며 과자, 양말, 사탕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옷차림도 우리가 평소 보던 시골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린 우리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신기하고 화려했다. 촌스러운 시골 아이들의 눈에 그들은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들처럼 멋져 보였다.
"우리 형도 저렇게 멋있었나?", "우리 누나가 저런 옷을 입고 도시에서 산다고?" 어린 마음에는 그저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들이 한없이 부럽고 대단해 보였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다는 것 자체가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도시에서 가져온 물건 하나하나가 어린 우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를 떠나 낯선 도시로 향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밤낮없이 공장 안에서 '미싱'이라 부르던 재봉틀의 바늘을 쫓으며 일하고, 텁텁한 먼지와 소음 속에서 잠을 잊은 채 청춘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고초도 알지 못했다.
가족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된 노동을 견디며, 때로는 눈물을 삼키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떠올렸을 그들의 속 깊은 사정도 어린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손에 들린 알록달록한 선물 보따리와 세련된 도시의 옷차림에만 눈이 팔려 철없이 부러워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도 어느덧 나이를 먹어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들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삶의 영화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바탕에는 그 시절 형님과 누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그리고 고향에 남겨둔 동생들을 위해 청춘의 가장 찬란한 봄날을 바쳤던 사람들. 그들은 가난했던 시절 우리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고향의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 세운 숨은 주역들이었다. 그들의 땀방울과 눈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흘러내렸지만, 결국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이가 한참 들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비로소 가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추석이 돌아올 때마다 마을 어귀에 서서 버스에서 내리던 형님과 누나들의 모습이 더욱 애틋하고 고맙게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멋지고 부러웠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 나의 추석 기억 가운데 가장 아련하면서도 달콤한 한 조각은 서울에 살던 집안 누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년 추석이 되면 그 누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잊지 않고 찾아왔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먼 길을 달려와 우리 집 문턱을 넘어오던 누나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늘 반갑고 기다려지는 존재였다. 누나가 싸 온 보따리 속 선물은 늘 단출했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그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알록달록한 신사 양말 한 세트, 그리고 내 어린 주먹만 한 커다란 알사탕 몇 개.
우리는 그 큼직하고 알록달록한 알사탕을 '오다마'라고 불렀다. 그 오다마 사탕은 어린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사탕 몇 개였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달콤한 선물이었다. 사탕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으면 볼때기가 툭 튀어나와 웅얼웅얼 말을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입안 가득 감도는 진하고 달콤한 맛이 천천히 퍼져나갈 때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밀려왔다. 혹여나 금세 녹아 사라질까 봐 아껴 먹었다. 입안에서 조금씩 굴리며 오래도록 맛을 음미하다가도, 너무 아까워 다시 정성스레 종이에 싸서 누가 볼까 몰래 남모르게 감춰두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살며시 꺼내어 다시 입안에 넣었다. 사탕 하나를 두고도 그렇게 애를 태우며 행복해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박하고 가난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어린 시절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작고 소박하면서도 달콤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해인가, 손꼽아 기다리던 추석이 되었는데도 서울 누나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고향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해 추석 내내 나는 누나가 왜 오지 못했는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보다는 입안을 달콤하게 적셔주던 그 '오다마'를 맛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서운했다.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괜히 높은 가을 하늘만 빼꼼히 바라보며 투정을 부렸다. "누나는 왜 안 오는 거야?" 어린 마음에는 누나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누나가 가져오던 오다마 사탕이 더 기다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야 알 것 같다.
그때 내가 기다렸던 것은 사실 사탕 몇 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먼 서울에서 긴 길을 달려와 우리 집 문턱을 넘어오던 누나의 모습, 내 손에 사탕을 쥐여주던 따뜻한 손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도 느껴지던 가족의 정과 사랑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둥근 추석 달이 창가에 떠오르는 밤이면 지금도 그 오다마의 진하고 달콤한 맛이 오래된 기억의 냄새처럼 코끝에 선연히 스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사탕을 건네주던 누나의 따스한 손길까지 함께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행복은 그렇게 작고 소박한 것들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행복은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추석 당일의 풍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흥겨운 마당극과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집안 친지들과 이웃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덕담을 나누고 나면 오후부터는 진짜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남해 전 지역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는 추석 오후가 되면 동네잔치 겸 마을 발전기금 조성을 위한 '향우 초청 석사대회'가 열렸다. '석사(石射)'란 일정한 거리에 목표물을 두고 돌을 던져 맞히는 경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놀이였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어떤 올림픽 경기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팔을 걷어붙인 어른들이 목표물을 향해 정교하게 돌을 던지면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이 목표물을 맞히는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잘 던진 사람에게는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그 옆 마당에서는 넓적한 멍석 위로 윷가락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모야!", "윷이다!" 윷가락 네 개가 허공을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멍석 위에 떨어지는 순간이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잘 던진 사람은 환호했고, 아쉽게 놓친 사람은 탄식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그 곁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했고, 어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실력을 겨뤘다.
또 다른 한쪽에 마련된 임시무대에서는 동네 노래자랑이 열렸다. 타지에서 고생하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향우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삐걱거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음정과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어깨춤을 추고, 서로의 노래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웃었다. 그날만큼은 잘 부르는 노래보다 함께 부르는 노래가 더 아름다웠다. 각자 팍팍한 객지 생활 속에서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꼬깃꼬깃한 돈을 선뜻 꺼내 마을 발전기금에 보태면서도, 누구 하나 아까워하거나 생색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고, 서로의 마음을 보태며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그때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아니었다.
내가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고, 내가 잘되면 무엇인가 돌려주고 싶은 곳이었다. 나 혼자 잘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마을과 이웃도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객지에서 제법 자리를 잡고 돌아온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얘야, 네가 타향에서 잘사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네 뿌리인 고향 마을이 잘되어야 하지 않겠냐." 그 말에는 고향에 대한 기분 좋은 부채감이 담겨 있었다. 내가 고향에서 받은 것이 있으니 나도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부담이라기보다 미덕이었고, 자랑이라기보다 당연한 도리처럼 여겨졌다.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기쁠 때 함께 웃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추석은 단순히 우리 집과 너희 집의 담장을 가르는 개별 가구의 명절이 아니었다. 이웃집 담장 너머까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마을 공동체'였다. 고향이라는 품 안에서 너와 내가 따로 구분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누군가 좋은 일이 있으면 온 동네가 함께 축하했고,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웃들이 먼저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고향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따뜻한 용광로와도 같았다. 그때는 한 집의 일이 곧 마을의 일이었고, 한 사람의 기쁨이 곧 모두의 기쁨이었다. 명절이면 더욱 그러했다. 마을 어귀부터 집집마다 사람의 온기가 넘쳐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뛰어놀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이웃의 손을 꼭 잡으며 안부를 묻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추석은 음식이나 놀이만으로 기억되는 명절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고, 고향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기에 오히려 서로 나누는 마음이 더 컸고, 생활이 불편했기에 사람의 손길이 더욱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추석은 어떠한가. 명절 전날 밤늦게 쫓기듯 찾아왔다가 차례를 지내고 나면 음식이 식기도 전에, 아침 햇살이 채 비치기도 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서둘러 짐을 싸 떠나버린다. 도로가 막힌다는 이유로, 직장의 남은 업무 때문에, 혹은 아이들의 학원 일정 때문에 서둘러 고향을 떠난다. 자식들이 떠나간 텅 빈 마루에는 식어버린 전 냄새와 차가운 고요함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한때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로 가득했던 마을은 이제 너무 조용하다. 함께 모여 웃고 울던 마을 공동체의 온기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가까운 친척인 사촌끼리도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는 어색하고 낯선 사이가 되어버렸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손을 잡으며 나누던 정겨운 안부 인사는 이제 가벼운 문자 메시지 몇 줄로 대신한다. "잘 지내지?", "추석 잘 보내." 짧은 말 몇 마디가 서로의 안부를 대신한다.
하지만 아무리 편리한 문자라 해도 사람의 눈빛과 손길까지 대신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온 동네 공터를 메우던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따스한 정이 넘치던 마을 공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고, 아이들이 뛰놀던 길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뜸하다. 석사대회의 뜨거운 함성도, 윷놀이의 흥겨운 장단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어깨춤을 추던 어른들의 웃음소리도 이제는 아득한 옛이야기 속 전설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생활은 편리해졌고, 물질적으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자식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간다. 고향에 살지 않아도 가족과 연락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서로의 소식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남는다. 어쩌면 이 쓸쓸함 역시 정이 메말라가는 시대를 품어주지 못하고, 각박한 세상 속으로 자식들을 황급히 떠나보낸 우리 어른들의 슬픈 몫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고향을 떠나보냈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가족이 흩어지는 것도 참고 살아왔다. 그렇게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세월이었는데, 정작 그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고향의 마루에는 적막만 남게 되었다.
그것이 발전의 대가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밤도 마당에 서서 나날이 높아만 가는 서늘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곧 있으면 차오르는 둥근 추석 달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날 것이다. 비록 사람들의 발길은 예전만큼 분주하지 않고, 옛날의 북적거리던 온기는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 가장 깊고 은밀한 기억의 궤짝을 열어보면 그곳에는 여전히 1960~70년대 남해의 그 찬란하고 따스했던 추석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마을 버스 정류장에 커다란 버스가 들어오면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나가던 아이들. 버스에서 내리던 형님과 누나들의 환하고 활기찬 미소. 도시에서 가져온 알록달록한 선물 보따리. 그 보따리 속에 들어 있던 신사 양말과 몇 개의 오다마 사탕. 입안 가득 달콤함을 뿌리며 어린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그 작은 사탕 하나. 그리고 추석 오후 마을 공터를 가득 채웠던 석사대회의 뜨거운 함성소리와 윷가락이 멍석 위에 떨어지던 경쾌한 소리.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던 사람들. 마을 발전을 위해 꼬깃꼬깃한 돈을 기꺼이 내놓던 형님과 누나들. 그 모든 장면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때의 사람들도 세월의 강을 건너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났고, 아이들이 뛰놀던 마을 공터도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던 마을 어귀도,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마을회관 앞도 이제는 고요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추석만큼은 아직도 그대로다. 추석 달빛 아래 마을 어귀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형님과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오다마 사탕을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는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옛날의 추석이 아닐 것이다. 그때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때의 마음을 그리워하는 것이며, 서로의 삶을 살피고 함께 웃고 함께 살아가던 따뜻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시절.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 사탕 몇 알만으로도 행복했고, 먼 길을 달려온 가족의 얼굴만 보아도 가슴이 벅찼던 시절.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남해의 추석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 달은 둥글게 떠오를 것이다. 나는 그 달을 바라보며 오래전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어린 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볼 것이다. 형님들, 누나들아. 그 시절 우리 모두 참 고생 많았다.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청춘을 바치고, 명절이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형제들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내 손에 쥐여주었던 오다마 사탕 한 알이 단순한 사탕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이었고, 고향의 정이었으며, 힘겨운 세월 속에서도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어린 시절 추석은 참 따뜻했고, 참 행복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시절이 남겨준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버스의 육중한 엔진 소리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석사대회의 우렁찬 함성도, 멍석 위에 떨어지던 윷가락 소리도 이제는 모두 지나간 시간이 되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둥근 추석 달빛을 바라보면 그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내 곁으로 돌아온다. 유유히 흐르는 달빛을 타고 돌아온 그 시절의 사람들과 그날의 웃음소리와 오다마의 달콤한 맛이 가슴 깊은 곳에 내려앉는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어도 그 시절이 남겨준 훈훈한 온기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온기는 오늘도 이 가을밤, 내 시린 가슴 한구석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준다. 그래서 나는 추석이 오면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마을 어귀로 돌아간다.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들어오고, 형님과 누나들이 환하게 웃으며 내리던 그곳. 어린 내가 오다마 사탕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던 그곳.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정을 나누던 그곳. 그곳에는 아직도 우리의 추석이 있다. 그곳에는 아직도 우리의 고향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추석이 있다.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글의 첫 구절이다. 어린 시절 그 글을 읽으며 맞이했던 추석의 풍경은 지금도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해마다 추석이 가까워지고 가을바람이 불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하나둘 기억의 문을 열고 찾아온다.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남해의 나지막한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 저 멀리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간다.
들판에는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산자락에는 가을빛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바닷바람 끝에는 알싸한 흙냄새가 섞여 있고, 해 질 무렵이면 붉게 물든 석양이 마을 지붕과 논두렁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 시절 우리가 맞이했던 추석은 연초가 되면 최치환·신동관 국회의원이 나누어 주던 빛바랜 한 장짜리 달력 한 귀퉁이에 적힌 '추석'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날이었다. 온 동네가 하나의 생명처럼 꿈틀대던 거대한 축제였고, 고향 사람들의 정과 삶이 한데 어우러지는 마을의 큰 잔치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시골 마을이 추석만 되면 사람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활기를 되찾았다. 먼 객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과 이웃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었다. 그때의 추석에는 지금은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특별한 설렘과 따뜻한 기다림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는 남들이 말하는 색동옷의 곱고 화려한 추억 같은 것은 딱히 없었다. 흙먼지가 묻은 무릎과 여기저기 닳아 빠진 검정 고무신이 우리의 일상이었으니, 알록달록한 색동옷이나 비단옷은 그저 먼 딴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명절이라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새 고무신 하나 얻어 신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부러운 풍경이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마을 어귀를 가득 채웠다.
바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고향을 떠나 마산 한일합섬이나 부산 국제상사 등 도시의 공장으로 향했던 형님과 누나들이 명절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길이었다. 추석 명절 전날이면 마을 어귀에 커다란 대절버스가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들어서곤 했다. 버스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면 동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버스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버스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그 안에서 누가 내릴지 기다리는 것도 어린 우리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버스에서 내리는 형님과 누나들의 손에는 도회지에서 마련해 온 세련된 물건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선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양손 가득 들린 보따리에는 도시에서 사 온 옷가지며 과자, 양말, 사탕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옷차림도 우리가 평소 보던 시골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린 우리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신기하고 화려했다. 촌스러운 시골 아이들의 눈에 그들은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들처럼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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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도 저렇게 멋있었나?", "우리 누나가 저런 옷을 입고 도시에서 산다고?" 어린 마음에는 그저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들이 한없이 부럽고 대단해 보였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다는 것 자체가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도시에서 가져온 물건 하나하나가 어린 우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를 떠나 낯선 도시로 향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밤낮없이 공장 안에서 '미싱'이라 부르던 재봉틀의 바늘을 쫓으며 일하고, 텁텁한 먼지와 소음 속에서 잠을 잊은 채 청춘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고초도 알지 못했다.
가족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된 노동을 견디며, 때로는 눈물을 삼키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떠올렸을 그들의 속 깊은 사정도 어린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손에 들린 알록달록한 선물 보따리와 세련된 도시의 옷차림에만 눈이 팔려 철없이 부러워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도 어느덧 나이를 먹어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들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삶의 영화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바탕에는 그 시절 형님과 누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그리고 고향에 남겨둔 동생들을 위해 청춘의 가장 찬란한 봄날을 바쳤던 사람들. 그들은 가난했던 시절 우리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고향의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 세운 숨은 주역들이었다. 그들의 땀방울과 눈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흘러내렸지만, 결국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이가 한참 들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비로소 가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추석이 돌아올 때마다 마을 어귀에 서서 버스에서 내리던 형님과 누나들의 모습이 더욱 애틋하고 고맙게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멋지고 부러웠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 나의 추석 기억 가운데 가장 아련하면서도 달콤한 한 조각은 서울에 살던 집안 누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년 추석이 되면 그 누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잊지 않고 찾아왔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먼 길을 달려와 우리 집 문턱을 넘어오던 누나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늘 반갑고 기다려지는 존재였다. 누나가 싸 온 보따리 속 선물은 늘 단출했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그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알록달록한 신사 양말 한 세트, 그리고 내 어린 주먹만 한 커다란 알사탕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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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큼직하고 알록달록한 알사탕을 '오다마'라고 불렀다. 그 오다마 사탕은 어린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사탕 몇 개였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달콤한 선물이었다. 사탕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으면 볼때기가 툭 튀어나와 웅얼웅얼 말을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입안 가득 감도는 진하고 달콤한 맛이 천천히 퍼져나갈 때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밀려왔다. 혹여나 금세 녹아 사라질까 봐 아껴 먹었다. 입안에서 조금씩 굴리며 오래도록 맛을 음미하다가도, 너무 아까워 다시 정성스레 종이에 싸서 누가 볼까 몰래 남모르게 감춰두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살며시 꺼내어 다시 입안에 넣었다. 사탕 하나를 두고도 그렇게 애를 태우며 행복해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박하고 가난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어린 시절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작고 소박하면서도 달콤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해인가, 손꼽아 기다리던 추석이 되었는데도 서울 누나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고향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해 추석 내내 나는 누나가 왜 오지 못했는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보다는 입안을 달콤하게 적셔주던 그 '오다마'를 맛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서운했다.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괜히 높은 가을 하늘만 빼꼼히 바라보며 투정을 부렸다. "누나는 왜 안 오는 거야?" 어린 마음에는 누나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누나가 가져오던 오다마 사탕이 더 기다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야 알 것 같다.
그때 내가 기다렸던 것은 사실 사탕 몇 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먼 서울에서 긴 길을 달려와 우리 집 문턱을 넘어오던 누나의 모습, 내 손에 사탕을 쥐여주던 따뜻한 손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도 느껴지던 가족의 정과 사랑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둥근 추석 달이 창가에 떠오르는 밤이면 지금도 그 오다마의 진하고 달콤한 맛이 오래된 기억의 냄새처럼 코끝에 선연히 스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사탕을 건네주던 누나의 따스한 손길까지 함께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행복은 그렇게 작고 소박한 것들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행복은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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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당일의 풍경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흥겨운 마당극과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집안 친지들과 이웃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덕담을 나누고 나면 오후부터는 진짜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남해 전 지역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는 추석 오후가 되면 동네잔치 겸 마을 발전기금 조성을 위한 '향우 초청 석사대회'가 열렸다. '석사(石射)'란 일정한 거리에 목표물을 두고 돌을 던져 맞히는 경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놀이였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어떤 올림픽 경기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팔을 걷어붙인 어른들이 목표물을 향해 정교하게 돌을 던지면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이 목표물을 맞히는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잘 던진 사람에게는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그 옆 마당에서는 넓적한 멍석 위로 윷가락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모야!", "윷이다!" 윷가락 네 개가 허공을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멍석 위에 떨어지는 순간이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잘 던진 사람은 환호했고, 아쉽게 놓친 사람은 탄식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그 곁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했고, 어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실력을 겨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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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쪽에 마련된 임시무대에서는 동네 노래자랑이 열렸다. 타지에서 고생하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향우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삐걱거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음정과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어깨춤을 추고, 서로의 노래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웃었다. 그날만큼은 잘 부르는 노래보다 함께 부르는 노래가 더 아름다웠다. 각자 팍팍한 객지 생활 속에서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꼬깃꼬깃한 돈을 선뜻 꺼내 마을 발전기금에 보태면서도, 누구 하나 아까워하거나 생색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고, 서로의 마음을 보태며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그때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아니었다.
내가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고, 내가 잘되면 무엇인가 돌려주고 싶은 곳이었다. 나 혼자 잘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마을과 이웃도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객지에서 제법 자리를 잡고 돌아온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얘야, 네가 타향에서 잘사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네 뿌리인 고향 마을이 잘되어야 하지 않겠냐." 그 말에는 고향에 대한 기분 좋은 부채감이 담겨 있었다. 내가 고향에서 받은 것이 있으니 나도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부담이라기보다 미덕이었고, 자랑이라기보다 당연한 도리처럼 여겨졌다.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기쁠 때 함께 웃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추석은 단순히 우리 집과 너희 집의 담장을 가르는 개별 가구의 명절이 아니었다. 이웃집 담장 너머까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마을 공동체'였다. 고향이라는 품 안에서 너와 내가 따로 구분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누군가 좋은 일이 있으면 온 동네가 함께 축하했고,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웃들이 먼저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고향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따뜻한 용광로와도 같았다. 그때는 한 집의 일이 곧 마을의 일이었고, 한 사람의 기쁨이 곧 모두의 기쁨이었다. 명절이면 더욱 그러했다. 마을 어귀부터 집집마다 사람의 온기가 넘쳐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뛰어놀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이웃의 손을 꼭 잡으며 안부를 묻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추석은 음식이나 놀이만으로 기억되는 명절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고, 고향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기에 오히려 서로 나누는 마음이 더 컸고, 생활이 불편했기에 사람의 손길이 더욱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추석은 어떠한가. 명절 전날 밤늦게 쫓기듯 찾아왔다가 차례를 지내고 나면 음식이 식기도 전에, 아침 햇살이 채 비치기도 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서둘러 짐을 싸 떠나버린다. 도로가 막힌다는 이유로, 직장의 남은 업무 때문에, 혹은 아이들의 학원 일정 때문에 서둘러 고향을 떠난다. 자식들이 떠나간 텅 빈 마루에는 식어버린 전 냄새와 차가운 고요함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한때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로 가득했던 마을은 이제 너무 조용하다. 함께 모여 웃고 울던 마을 공동체의 온기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가까운 친척인 사촌끼리도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는 어색하고 낯선 사이가 되어버렸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손을 잡으며 나누던 정겨운 안부 인사는 이제 가벼운 문자 메시지 몇 줄로 대신한다. "잘 지내지?", "추석 잘 보내." 짧은 말 몇 마디가 서로의 안부를 대신한다.
하지만 아무리 편리한 문자라 해도 사람의 눈빛과 손길까지 대신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온 동네 공터를 메우던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따스한 정이 넘치던 마을 공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고, 아이들이 뛰놀던 길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뜸하다. 석사대회의 뜨거운 함성도, 윷놀이의 흥겨운 장단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어깨춤을 추던 어른들의 웃음소리도 이제는 아득한 옛이야기 속 전설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생활은 편리해졌고, 물질적으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자식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간다. 고향에 살지 않아도 가족과 연락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서로의 소식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남는다. 어쩌면 이 쓸쓸함 역시 정이 메말라가는 시대를 품어주지 못하고, 각박한 세상 속으로 자식들을 황급히 떠나보낸 우리 어른들의 슬픈 몫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고향을 떠나보냈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가족이 흩어지는 것도 참고 살아왔다. 그렇게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세월이었는데, 정작 그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고향의 마루에는 적막만 남게 되었다.
그것이 발전의 대가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밤도 마당에 서서 나날이 높아만 가는 서늘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곧 있으면 차오르는 둥근 추석 달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날 것이다. 비록 사람들의 발길은 예전만큼 분주하지 않고, 옛날의 북적거리던 온기는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 가장 깊고 은밀한 기억의 궤짝을 열어보면 그곳에는 여전히 1960~70년대 남해의 그 찬란하고 따스했던 추석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마을 버스 정류장에 커다란 버스가 들어오면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나가던 아이들. 버스에서 내리던 형님과 누나들의 환하고 활기찬 미소. 도시에서 가져온 알록달록한 선물 보따리. 그 보따리 속에 들어 있던 신사 양말과 몇 개의 오다마 사탕. 입안 가득 달콤함을 뿌리며 어린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그 작은 사탕 하나. 그리고 추석 오후 마을 공터를 가득 채웠던 석사대회의 뜨거운 함성소리와 윷가락이 멍석 위에 떨어지던 경쾌한 소리.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던 사람들. 마을 발전을 위해 꼬깃꼬깃한 돈을 기꺼이 내놓던 형님과 누나들. 그 모든 장면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때의 사람들도 세월의 강을 건너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났고, 아이들이 뛰놀던 마을 공터도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던 마을 어귀도,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마을회관 앞도 이제는 고요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추석만큼은 아직도 그대로다. 추석 달빛 아래 마을 어귀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형님과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오다마 사탕을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는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옛날의 추석이 아닐 것이다. 그때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때의 마음을 그리워하는 것이며, 서로의 삶을 살피고 함께 웃고 함께 살아가던 따뜻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시절.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 사탕 몇 알만으로도 행복했고, 먼 길을 달려온 가족의 얼굴만 보아도 가슴이 벅찼던 시절.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남해의 추석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 달은 둥글게 떠오를 것이다. 나는 그 달을 바라보며 오래전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어린 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볼 것이다. 형님들, 누나들아. 그 시절 우리 모두 참 고생 많았다.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청춘을 바치고, 명절이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형제들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내 손에 쥐여주었던 오다마 사탕 한 알이 단순한 사탕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이었고, 고향의 정이었으며, 힘겨운 세월 속에서도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어린 시절 추석은 참 따뜻했고, 참 행복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시절이 남겨준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버스의 육중한 엔진 소리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석사대회의 우렁찬 함성도, 멍석 위에 떨어지던 윷가락 소리도 이제는 모두 지나간 시간이 되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둥근 추석 달빛을 바라보면 그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내 곁으로 돌아온다. 유유히 흐르는 달빛을 타고 돌아온 그 시절의 사람들과 그날의 웃음소리와 오다마의 달콤한 맛이 가슴 깊은 곳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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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어도 그 시절이 남겨준 훈훈한 온기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온기는 오늘도 이 가을밤, 내 시린 가슴 한구석을 다정하게 어루만져준다. 그래서 나는 추석이 오면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마을 어귀로 돌아간다.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들어오고, 형님과 누나들이 환하게 웃으며 내리던 그곳. 어린 내가 오다마 사탕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던 그곳.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정을 나누던 그곳. 그곳에는 아직도 우리의 추석이 있다. 그곳에는 아직도 우리의 고향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추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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