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읍지』 속 「남해현(南海縣)」은 왜구 침탈과 공도화(空島化)를 극복한
남해가 영호남 잇는 군사 요충지이자 남해안 방어의 핵심거점임을 보여준다
『경상도읍지』 「남해현읍지」는 삼정(三政)의 문란과 과중한 공납(貢納)에도
공동체를 지켜낸 남해 백성들의 강인한 생존력과 복원력을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10월 02일(금)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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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사회는 대내외적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며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왕권의 약화와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은 극에 달했고,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아우르는 삼정문란(三政紊亂)은 백성들의 삶을 회복하기 어려운 도탄의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전국적으로 민란(民亂)의 조짐과 사회적 불안이 확산되던 엄중한 시기에 조선 조정(朝廷)은 지방 통치력을 점검하고 재정 기반을 확인하고자 대대적인 읍지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인 1832년(순조 32)의 관찬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는 당시 향촌 사회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담아낸 기록이며, 그중 군사적 요충지이자 고립된 도서(島嶼)였던 「남해현(南海縣)」 읍지는 변방 백성들이 마주한 생태적 환경과 제도적 한계를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남해는 거친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처지였으나,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해로의 길목으로서 군사 방어의 최전선이자 국가 재정(財政)을 뒷받침하는 생산의 기반이기도 하였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의 기록을 바탕으로 남해의 지리적 환경과 관방 체제, 인구 변화와 경제적 실태, 그리고 민초(民草)들의 애환을 살펴보고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관찬 지리지의 건조한 문체 속에 담긴 행간을 읽어내는 일은 조선 후기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변방의 작은 섬 남해가 중앙 조정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정체성과 공동체의 복원력(復原力)을 형성해 왔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1) 건치연혁(建置沿革): 공도(空島)의 수난과 해양 방어 기지의 재건
남해(南海)의 역사는 한반도 남단 섬 지형이 겪어야 했던 외침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한다.
읍지에 따르면 남해현은 신라 신문왕 초에 전야산군(轉也山郡)으로 처음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해'라는 지명을 얻었다. 고려시대에는 현령이 파견될 정도로 정비되었으나, 공민왕 시기 왜구의 파괴적인 침탈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원문에서는 당시의 참상을 "因倭寇失土, 僑寓晉州大也川部曲"(인왜구실토 교우진주대야천부곡, 왜구로 인해 영토를 잃고 진주 대야천부곡으로 옮겨가 임시로 머물렀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외적의 침입을 버티지 못하고 고을의 행정 기능과 주민 전체가 내륙인 진주 대야천부곡(현 하동군 북천면 일대)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이 시기는 남해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공백기였으며, 무려 46년 동안이나 섬 전체가 왜구의 소굴로 방치되는 비극을 낳았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이후에야 남해현은 비로소 국토 회복과 영토 재건의 대상이 되었다.
태종조(太宗朝)에 하동과 합쳐졌다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조정은 남해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주민들을 다시 섬으로 복귀시키는 환도(還島) 정책을 추진했다.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기문에는 "城諸古縣絶島之中, 累石爲固"(성제고현절도지중 누석위고, 성은 옛 현이 있던 외딴섬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돌을 겹겹이 쌓아 견고하게 축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태종 4년 구라량 만호 임덕수(林德秀)의 주도하에 남해현성이 축조되면서 본격적인 치소 재건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세종과 연산군, 중종 대를 거치며 현령과 현감의 직제가 변동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남해는 더 이상 버려진 섬이 아니라 경상도 우수영 관할의 핵심적인 해양 방어 기지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2) 관직(官職)과 성씨(姓氏): 읍치 행정 체계와 토착 사회의 구조
1832년 당시 남해현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을 정점으로 짜임새 있는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고을 수장인 현령(縣令)은 무관 종5품으로 보임되었는데, 이는 변방 요새로서의 군사적 특수성을 반영한 인사 배치이다.
수령을 보좌하는 향청(鄕廳) 간부로 좌수(座首) 1명과 별감(別監) 2명이 편제되어 여론 수렴과 조세 징수를 도왔다.
실무 조직으로는 군관(軍官) 30명과 장관(將官) 20명이 군사 행정을 전담했고, 실무를 담당하는 인리(人吏) 50명과 문서 작성을 맡은 지인(知印) 22명이 편성되었다. 아울러 사령(使令) 15명과 관노비(官奴婢) 43명(관노 25명, 관비 18명)의 존재는 남해현 관아가 독자적인 행정 집행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토착 사회를 구성하는 성씨(姓氏)는 남해현의 인구학적 다양성과 정착 과정을 대변한다. 읍지에는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등 총 48개 성씨가 망라되어 있다. 이는 고려 말 공도화(空島化)로 토착 성씨가 절멸한 이후, 조선 초기의 사민(徙民) 정책과 후기의 자발적 이주로 새로운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정이오(鄭以吾) 기문에 나오듯 "以隣境河, 泗, 溟, 固, 鎭五郡之人"(이웃 경계인 하동·사천·곤명·고성·진해 등 다섯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했다) 이라는 대목은 남해의 성씨 집단이 주변 남해안 일대에서 이주해 온 가문들이 결합한 연합체적 성격을 지녔음을 뒷받침한다. 이들은 7개 면 88개 리에 살며 농어업에 종사하고 읍치(邑治) 행정의 기반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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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리(坊里)와 산천(山川): 지리적 환경과 조밀한 행정구역 편제
남해현의 지리적 환경은 주맥(主脈)인 망운산(望雲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와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이 결합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섬 지형이다.
읍지 산천 조항을 보면 고을의 진산(鎭山)인 망운산은 현의 서쪽 2리에 위치하여 주맥을 이루고, 여기에서 소흘산(所屹山), 원산(猿山), 녹두산(鹿頭山) 등이 파생되어 현의 남북을 감싸안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동쪽 25리에 자리한 금산(錦山)은 수려한 경관과 함께 군사적 요충지로서 봉수가 설치된 핵심 산악이다.
하천으로는 금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가는 동천(凍川), 망운산에서 나오는 대천(大川)과 파천(巴川)이 기록되어 있어, 이 지표수들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형성되고 주민들의 식수원이 확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형적 한계 속에서도 남해현은 7개 면(面)과 88개 리(里)라는 매우 조밀하고 체계적인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현내면(縣內面)을 중심으로 동쪽의 이동면(二東面)과 삼동면(三東面), 남쪽의 남면(南面), 서쪽의 서면(西面), 북쪽의 고현면(古縣面)과 설천면(雪川面)이 고을을 빽빽하게 분할하고 있었다.
각 면의 리동 기록을 보면, 관문으로부터의 거리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중앙의 행정력이 섬 전역에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삼동면의 미조항리(彌助項里)는 관문에서 60리나 떨어진 최변방이었음에도 명확히 행정구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는 영토의 효율적인 지배와 조세 수취, 그리고 군역 자원의 파악을 위해 조선 정부가 변방의 섬 내부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지방 관제를 관철했는지를 증명하는 지표이다.
4) 호구(戶口)와 전부(田賦): 인구 분포와 조선 후기 수취 제도의 실상
1832년 남해현의 호구는 총 3,429호에 인구 15,63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성별 비율은 남자 7,857명, 여자 7,777명으로 비교적 균형 잡힌 인구 분포를 보여준다.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과 잦은 해로(海路)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1만 5,000명이 넘는 인구가 상주했다는 점은, 조선 후기 남해현의 정주 여건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척박한 화전(火田)과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힌 백성들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기에 이 정도 규모의 인구 부양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호적 대장상의 공식 통계이므로, 군역을 피하기 위해 누락되거나 도망친 유민들을 고려한다면 실제 거주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지 세금인 전부(田賦) 기록은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이 정착된 조선 후기 수취 제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해현의 총 토지 결수는 밭[田] 1,422결과 논[沓] 1,510결을 합쳐 대략 2,933결에 달했으나, 원문에는 각종 면세 및 묵은 땅 등의 재해 공제 항목이 전답 합쳐 540여 결에 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바닷바람과 가뭄 등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척박한 토지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세금이 매겨진 시기 토지를 대상으로 결당 쌀 5두 5승의 전세, 결당 12두의 대동미, 그리고 총액 1,130량에 달하는 균세전(均稅錢)이 징수되었다.
대동창(大同倉)과 진휼창(賑恤倉) 등 성내에 촘촘히 보관된 창고들과 노량의 조창(漕倉)은 이렇게 거둔 현물과 자금을 한양 및 감영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한 경제적 허브 역할을 수행했다.
5) 군액(軍額)과 군기(軍器): 영남 남해안 최전방의 군사적 방비 체계
「남해현읍지」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군액(軍額)과 군기(軍器)에 대한 세부 명세이다. 고을의 전체 군인은 3,329명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20%가 넘는 엄청난 비율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높은 군역 비율은 남해가 통제영(統制營) 및 병영(兵營)의 지휘를 받는 최전방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各浦口分防水軍 二千三百四十二名"(각 포구의 분방수군이 2,342명이다)이라는 기록은 남해현 군사력 핵심이 해안선을 지키는 수군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봉수군 75명, 속오보병 160명 등이 편제되어 수륙(水陸) 양면의 촘촘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군(軍)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내 및 수군 기지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무기가 비축되어 있었다.
육군기질과 수군기질을 통틀어 조총(鳥銃) 100여 자루, 화약 수천 근, 그리고 수십만 개에 달하는 납탄(鉛丸)이 정밀하게 계량되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군의 무기 항목에는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의 배치 상황과 함께 불랑기(佛郞機), 파선뢰(破船雷) 같은 중화기 및 화전(火箭)의 수량까지 낱낱이 등재되어 있다. 이는 19세기 세도정치기의 정치 질서가 이완된 상황에서도 남해안 일대의 해방(海防)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었으며, 상시적인 전쟁 대비 태세 또한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6) 관액과 진보(鎭堡): 요새화된 포구와 삼도수군통제영의 연계
남해의 지정학적 위치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해로의 길목이자, 외해에서 내해로 진입하는 대문과 같았다. 따라서 고을 내의 주요 관문에 해당하는 관액과 군사 기지인 진보(鎭堡)의 운용은 고을 행정의 핵심이었다.
읍지에는 곤양(昆陽)과 경계를 접하며 전라·경상도의 조운선이 통과하는 노량진(露梁津), 진주 창선과 맞닿은 지족진, 그리고 전라도 순천과 경계를 이루는 호을포진이 3대 관문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중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전국의 세곡을 운송하는 조창(漕倉)이 위치한 곳으로, 단순한 나루터를 넘어 국가 경제와 국방의 대동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섬의 남단과 동단에 배치된 진보들은 통제영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정규 수군 기지였다.
대표적인 수군진인 미조항진(彌助項鎭)은 첨사(僉使, 종3품)가 파견되는 거진(巨鎭)이었으며, 평산포(平山浦) 역시 만호(萬戶, 종4품)가 상주하며 독자적인 전선과 수백 명의 능로군, 사부를 거느렸다.
원문에서는 미조항진의 역사에 대해 "因倭寇陷沒廢, 嘉靖壬午復設"(인왜구함몰폐 가정임오복설, 왜구에게 함락되어 폐지했다가, 가정 임오년(1522)에 다시 설치했다) 이라고 기술하여, 미조항진이 왜구의 침략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유지·재건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 진성(鎭城)들은 견고한 돌로 쌓여 성내에 우물과 포루를 갖추었으며, 금산 봉수(錦山烽燧) 등과 연계되어 적의 출현을 주야로 감시하고 조정에 유기적으로 보고하는 연안 방어 시스템의 중추였다.
7) 1832년 『경상도읍지』 남해현「환적(宦蹟)」 기록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환적(宦蹟)」에는 1598년 11월 부임한 이종일(李宗一)부터 1831년 7월 부임한 유상표(柳相杓)까지 모두 150명의 남해현령이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萬曆戊戌以前, 因兵亂失記"라 하여 병란으로 유실되었으며, 이후 이종일부터 유상표까지 약 233년 동안 남해현을 다스린 수령들의 부임과 퇴임 내역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환적」은 조선 후기 남해현의 수령 인사와 재임 기간을 연속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환적」에는 재임 기간뿐만 아니라 일부 현령의 치적과 백성들의 평가도 함께 담겨 있다. 박천기는 학문을 권장하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 힘썼으며, 남두병(南斗柄)은 문무를 겸비하여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하였다. 소산해(蘇山海)는 엄정한 정사를 펼치면서 구황에 힘써 오랫동안 추모를 받았고, 이성우(李聖雨)는 정사를 공평하게 하고 송사를 잘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다. 백세부(白世傅)는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고 빈민을 구휼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였으며, 덕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워졌다. 안윤복(安允福)은 온화한 정사를 펼치고 구휼을 확대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김호겸(金好謙)은 정사를 공평하고 간결하게 시행하여 백성의 폐단을 없애고 청렴과 은혜를 베푼 수령으로 평가하였다. 이처럼 「환적」은 남해현령 150명의 인사 기록을 넘어, 조선 후기 남해의 지방 행정과 수령의 치적, 그리고 백성들의 평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8)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가 전하는 남해의 유산과 시대적 과제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는 19세기 전반 변방의 섬 고을이 처한 척박한 환경과 과중한 수취 부담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현민들은 최전방 요새에서 외적을 막는 군사적 의무를 다하는 한편, 피폐한 생활 속에서 세금과 요역의 이중 부담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산비탈을 일구어 다랭이논을 만들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끈질기게 삶을 이어 갔다.
원문에서 고을의 풍속을 "尙耕織 習文武藝 好古朴."(농업과 길쌈을 중시하고, 문무의 기예를 익히며, 소박하고 순후한 풍속을 지녔다.)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남해인의 삶과 정신을 잘 보여준다. 특히 남해의 역사는 고려 말 왜구의 침탈과 공도정책(空島政策)의 상흔을 딛고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어 온 개척 정신과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 또한 「환적(宦蹟)」에는 현령들의 재임과 치적, 백성들의 평가가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지방 행정의 실제 모습도 살필 수 있다.
이 귀중한 기록은 국가의 방어라는 큰 책무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지켜낸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날 남해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해양관광지로 성장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 남해 사람들이 공동체의 힘으로 국난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냈듯이, 오늘의 위기 또한 주민의 삶과 지역공동체를 지키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결국 읍지(邑誌)가 전하는 교훈은 과거의 고난을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와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 세대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남해를 만들어가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