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851년 『여도비지(輿圖備志)』「남해현」, 국토를 과학으로 읽다
『여도비지(輿圖備志)』는 남해현을 수치와 거리, 군사와
경제 정보를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조선 후기 지리지의 정점
남해현에 대한 『여도비지』의 기록은 해양 요충지의 역사와 생활상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며 기존 읍지와 차별화된 과학적 국토 인식을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10월 16일(금) 21:21
▲ 여도비지(輿圖備志) 원문 일부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기치 아래 우리나라 국토를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인식하려는 열망은 지리지와 지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 중심에는 흔히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대표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인 『여도비지(輿圖備志)』는 일반 대중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저술이라 할 수 있다. 1851년에서 1856년 사이, 김정호(金正浩)와 최성환(崔惺煥, 1813~1891)이 머리를 맞대고 편찬한 이 책은 조선 지리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결정체이다. 특히 남해현(南海縣)을 다룬 대목을 살펴보면, 이전의 읍지(邑誌)들이 단순히 지역의 유교적 전통이나 인물을 나열하는 데 치중했던 것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지리지들이 서술형 미사여구에 머물렀을 때, 『여도비지(輿圖備志)』는 수치와 통계, 그리고 명확한 방위와 거리를 도입하여 우리 국토를 실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여도비지』는 단순한 텍스트의 나열이 아니라, 훗날 탄생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정교한 설계도이자,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였다.
또한 전국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한 유일한 지리지라는 점에서, 이 책은 전통 지리서의 범주를 넘어 근대적 지리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
전국 군현(郡縣)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한 유일한 지리지라는 점은 이 책을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지리 정보 시스템(GIS)'의 효시(嚆矢)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남해라는 섬이 지닌 지정학적 가치를 명확한 지표로 재정의한 이 기록은 19세기 중반 조선이 도달했던 지적 경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본 글은 『한국고전종합 DB』에 수록된 『여도비지(輿圖備志)』 「경상도(慶尙道) 남해현(南海縣)」의 구체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그 지리적 특성과 인문 환경의 실상을 고찰하고, 그 속에 담긴 지리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건치(建置)의 변천과 남해(南海)라는 이름의 무게


『여도비지』가 기록한 남해현의 역사, 즉 건치연혁(建置沿革)은 이 섬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세월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신라 신문왕 10년(690) 전야산군(戰野山郡)이라 불리던 이곳은 경덕왕 때 비로소 남해군(南海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고려 현종 9년(1018)에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왜구의 침탈로 인해 치소(治所)를 육지인 진주 대야천(大野川, 현 하동군 북천면) 부곡으로 옮겨야 했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은 남해가 단순한 지방 행정 단위를 넘어, 외침과 행정 재편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며, 해양 변방이 지닌 역사적 긴장과 전략적 중요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하동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다시 나뉘고, 곤명현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이라 불리는 등 행정구역의 잦은 변동 속에서도 남해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연산군 4년(1498), 지역민의 반란으로 인해 현감(縣監)으로 강등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현령(縣令) 체제로 복구(1507년)한 기록은 당시 중앙 정부와 남해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여도비지(輿圖備志)』는 이러한 변천사를 단순한 나열이 아닌, 강역표(疆域表)와 연계하여 매우 체계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남해현이 경상도의 요충지로서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는 기존 읍지들이 행정 변동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데 비해, 남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해양 방어 거점'이라는 일관된 맥락 속에서 설명한다는 점에서 큰 차별성을 보인다.



2) 방면(坊面)과 도리(道里)가 말해주는 생활권의 재구성


지리지(地理志)에서 가장 실무적인 정보는 행정구역인 방면(坊面)과 거리 정보인 도리(道里)이다.
『여도비지』 남해현은 현내면(縣內面)을 중심으로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의 위치와 거리를 리(里)의 시작과 끝 단위로 구분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삼동면은 관아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90리에 달한다고 기록하여, 당시 남해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와 물리적 한계를 정량적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방식은 공간을 단순히 구획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동 경로와 생활권의 범위를 함께 파악하게 하며, 지역 간 연결성과 행정 운영의 실제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관념적인 서술에 치중했던 여타 지리지들과 달리, 김정호의 실용적 사고방식이 투영된 결과이다. 관아를 기준으로 각 면의 '처음과 끝의 거리'를 병기한 점은 공간을 정적인 구획이 아니라 이동과 시간의 관점에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곤양(昆陽)과 통하는 노량진(露梁津)과 같은 진도(津渡) 정보는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을 육지와 연결하는 혈맥을 짚어준다.
특히 고읍(古邑) 터인 난포현(蘭浦縣)과 평산현(平山縣)의 위치를 명시하며 왜구에 의해 폐지된 역사를 기록한 부분은, 지리지 속에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려는 김정호의 역사 지리학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정밀한 데이터는 이후 『대동여지도』에서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표시하는 혁신적인 기법의 밑거름이 되었다.



3) 산천(山川)과 형승(形勝) 속에 투영된 요충지의 기개


남해의 자연환경을 다루는 『여도비지』의 필치는 정교하면서도 그 기품을 놓치지 않는다.
읍치(邑治) 서쪽의 망운산(望雲山), 소흘산(所屹山), 원산(猿山), 용문사와 화방사, 녹두산(鹿頭山), 그리고 금산(錦山)에 대한 묘사는 남해 지형의 핵심을 찌른다.
특히 금산(錦山)에 대해 "골짜기와 바위, 샘물이 어우러져 바다 위의 기이한 명승지로 꼽힌다(洞府泉石爲海上奇勝, 동부천석위해상기승)"라고 평하며 구정봉(九井峰), 도솔암(兜率庵), 보리암(菩提庵), 좌선대(坐禪臺)를 언급한 것은, 이 지리지가 단순히 수치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가치까지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더불어 이러한 서술은 자연경관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신앙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을 반영하며, 조선 후기 지리지의 인문학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여도비지(輿圖備志)』가 강조하는 남해의 형승(形勝)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이다. "바다 가운데로 가파르게 들어와 있어 배가 드나드는 요충지이며 왜구들이 침범하기 쉬운 가장 중요한 길목"이라는 표현은 남해가 단순한 유람지가 아닌, 국가 안보의 최전선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관음포(觀音浦), 파천포(波川浦), 차산포(車山浦) 등 무수히 많은 포구와 소도(小島), 조도(鳥島), 갈도(葛島), 노도(櫓島), 우모도(牛毛島) 등의 부속 도서를 꼼꼼히 기록한 것은 이 지역의 해안선이 지닌 복잡성을 김정호(金正浩)가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수많은 섬을 기록하며 "나머지는 지도에 자세히 나온다(右詳地圖)."라고 언급한 부분은 텍스트 중심의 기존 읍지(邑誌)와 달리 지도 기반의 정보 체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獨步的)이다.
이는 곧 남해를 하나의 점이 아닌, 해상 교통과 방어망이 교차하는 입체적(立體的) 공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4) 식화(食貨)와 물산, 남해의 풍요로움을 데이터로 읽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 『여도비지』는 남해의 자생력을 높이 평가한다. "물고기 잡는 일과 소금 굽는 일로 이익을 얻는다"라는 문장은 당시 남해 경제의 두 축인 어업과 염업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구체적인 토산(土産)의 목록이다. 석류, 유자(柚子), 비자(榧子), 치자(梔子) 등 남해의 온화한 기후를 짐작하게 하는 과실부터 전복(全鰒), 해삼(海蔘), 미역, 문어(文魚), 청어, 상어, 대구[大口魚]에 이르는 방대한 해산물 리스트는 당시 남해가 조선의 식량 창고이자 보물 창고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물산 기록은 단순한 풍요의 나열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산 활동이 긴밀히 결합된 경제 구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특기(特記)할 점은 활의 재료인 뽕나무와 같은 전략 물자나 표고버섯, 송이버섯과 같은 고급 식재료까지 상세히 등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품목 나열을 넘어 국가 경제 운영을 위한 기초 통계 자료로서 지리지가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금산곶장(錦山串場)과 동천곶장(東川串場) 같은 폐목(廢牧) 기록은 과거 이 땅이 군마(軍馬)를 기르던 중요한 목장 부지였음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은 생산과 유통, 그리고 군사적 수요와 연계된 복합적 경제 구조를 드러내며, 남해가 단순한 지방 경제권을 넘어 국가적 자원 공급지로 기능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기존 읍지들이 세목 중심의 물산 기록에 머문 데 비해, 『여도비지』는 생활 경제의 맥락과 생산방식까지 함께 서술함으로써 19세기 중반 남해인의 삶과 문화를 입체적으로 복원해 냈다.



5) 무비(武備)와 전략(戰略), 충절의 바다, 노량을 기억하다

 
 『여도비지(輿圖備志)』가 다른 읍지들과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군사 및 방어체계를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조항진(彌助項鎭)에 수군첨절제사와 1,760명의 군사가 배치되었다는 기록(軍摠一千七百六十名)이나, 평산포진(平山浦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와 1,673명의 군사가 배치되고(軍摠一千六百七十三名), 거북선(龜船)이 운용되었다는 사실은 남해가 경상우수영의 핵심 방어 거점이었음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읍성과 고현성 등 성곽에 대한 기록과 금산, 원산, 소흘산 등의 봉수(烽燧) 체계는 남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요새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군사 배치의 나열을 넘어, 해상 방어망이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남해가 국가 안보 체계 속에서 차지한 위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전략(戰略) 항목에서 다루는 역사적 전투는 이 지리지의 백미이다.
 고려 우왕 때 정지(鄭地) 장군이 관음포에서 거둔 승전부터, 임진왜란의 대미를 장식한 노량해전(露梁海戰)의 기록은 숙연함을 자아낸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전사와 그의 아들 이회가 유언을 받들어 끝까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목, 그리고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의 전사 기록까지 상세히 담아낸 것은 남해가 지닌 국제적 전장으로서의 위상을 한층 부각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전투 기록은 단순한 사건 서술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과 충절 의식을 형성하는 역사적 기반으로 작용하며, 지역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이해된다. 현종 4년(1663)에 사액을 받은 충렬사(忠烈祠)에 대한 언급은 남해라는 공간이 지닌 충절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 여도비지(輿圖備志) 원문 일부

▲ 여도비지(輿圖備志) 원문 일부


6) 미래를 향한 기록, 『여도비지』의 현대적 계승

 
 결론적으로 『여도비지(輿圖備志)』 「경상도 남해현」의 기록은 단순히 170년 전의 오래된 사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김정호(金正浩)라는 천재적인 지리학자(地理學者)가 남해라는 섬을 '과학적 좌표'와 '전략적 가치', 그리고 '인문학적 서사'라는 세 가지 층위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기존의 읍지들이 관습적인 정보의 답습에 그쳤다면, 『여도비지』는 지도 제작을 위한 정밀한 데이터와 역사, 군사, 경제 정보를 통합한 종합 지리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기록은 단순한 지역 서술을 넘어 국가적 공간 인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지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남해를 '보물섬'이라 부르며 그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그 바탕에는 『여도비지』가 기록한 치열한 국방의 역사와 풍성한 물산, 그리고 정교한 지리 정보가 깔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기록은 오늘날 남해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 즉 해양관광과 역사 문화의 공존, 그리고 과학적 기반의 지역 발전을 위한 소중한 나침반이 된다.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지식의 연속성 속에서 지역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하는 귀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김정호와 최성환이 정성껏 갈무리한 남해의 좌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순한 섬을 넘어, 조선이 꿈꾸었던 근대적 국토 인식의 정점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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