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재촬요(輿載撮要)』를 통해 본 1893년 남해현의 역사와 국방 체계
『여재촬요』에 기록된 남해현은 조선 왕조 말기 국가 안보를 책임진 해방(海防)의
핵심 요충지이자, 행정·군사·경제·문화가 유기적으로 작동한 남해안의 핵심 지역
『여재촬요』 속 남해현의 기록은 변방의 섬인 남해가 국토 수호의 최전선에서
국가 안위를 지탱하며 독자적인 지역문화를 꽃피운 역사적 공간이었음을 증명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10월 30일(금)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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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는 기록의 예술이자 선택의 산물이다. 우리가 한 지역의 옛 모습을 살필 때 대개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관찬 사료를 먼저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왕조의 기틀이 확립되던 시기의 당당한 기록만큼이나, 왕조의 황혼기이자 거센 외세의 파고가 몰아치던 구한말(舊韓末)의 기록 또한 이에 못지않은 생생한 가치를 지닌다. 오히려 벼랑 끝에 선 국가가 변방의 요충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전성기에는 보이지 않던 절박함과 치밀함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고종 30년(1893) 오횡묵(吳宖默)이 편찬한 『여재촬요(輿載撮要)』 「경상도 남해현」 편은 조선 말기 격변기의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사료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개항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오횡묵이 저술한 『여재촬요』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지리 인식과 근대 세계 지식을 아울러 담아낸 저술로, 개화기 지리 교과서의 효시로 평가된다.
1893년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조선 왕조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국의 실상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시기였다.
본 글은 『여재촬요(輿載撮要)』 「경상도 남해현」 기록을 중심으로 격변기의 남해가 지녔던 다면적인 모습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삼국시대 이래 변화를 거듭해 온 건치연혁(建置沿革)과 행정적 변천 과정을 살피고, 둘째, 고을 방어의 핵심이었던 읍성과 군사시설 및 관방 체계의 운영 실태를, 셋째, 해상 방어와 긴밀히 연관된 봉수망(烽燧網)의 현황과 육지·섬을 연결하던 교통·통신망의 구조를 추적하여, 넷째, 당대 향촌 사회의 풍속과 주민들의 경제활동 및 토산물 기록을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조선의 황혼기 남해현(南海縣)이 지녔던 국가 안보상의 의의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역사적 가치를 밝힘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속에서 남해의 푸른 바다와 견고한 성벽이 간직한 생존과 방어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바다 위의 고도(孤島) 남해, 역사의 중심에 서다: 건치연혁과 행정적 변천
『여재촬요(輿載撮要)』는 남해현의 위치와 연혁을 서두에서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규정한다.
사료는 남해를 한마디로 '본해중도(本海中島)', 곧 '본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 정의한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성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을 독특한 행정·군사적 요충지로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남해의 역사는 신라 신문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 불렸으나, 경덕왕 대에 이르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해(南海)'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왕조(朝鮮王朝) 역시 이를 계승하였다.
남해현은 경상우도(慶尙右道)에 속한 섬 고을로, 읍치(邑治)를 기준으로 한 주요 경계와 이정(里程)은 다음과 같다. 동쪽으로는 진주(晉州) 경계까지 40리, 서쪽 해안까지는 15리, 남쪽은 36리, 북쪽으로는 영남 내륙으로 이어지는 관문인 노량(露梁)까지 37리였다.
또한 경상감영(대구)까지는 400리, 왕조의 중심인 한양(京)까지는 92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한양까지의 거리는 읍지마다 차이를 보인다.
대부분 1,045리로 기록되며, 간혹 1,035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재촬요』에서 이처럼 100리 이상의 차이가 나타난 구체적인 원인이나 노정(路程)의 변화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록은 남해현이 변방의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 속에서도 중앙정부와 감영과 긴밀히 소통해야 했던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며, 특히 한양까지 920리에 달하는 거리는 당시 남해현령이 짊어졌던 책임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1893년 당시 남해현을 다스리던 관원은 종5품의 현령(縣令)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 직책이 '무(武)', 즉 무관(武官)이 임명되는 자리였다는 사실과 '관진주(管晉州)', 곧 진주목의 관할을 받으면서도 군사적으로는 독자적인 방어체계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임기는 30개월(三十朔)로 규정되어 있어 변방의 중요 요충지인 만큼 현직관(現職官)이 지역 사정을 깊이 파악하고 방비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사료는 남해현의 별칭 또는 옛 이름으로 '화전(花田)'과 '윤산(輪山)'을 제시한다.
'꽃밭'을 뜻하는 화전이라는 이름은 이 섬이 지닌 풍요와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오늘날 남해 문화의 뿌리를 이룬다. 행정구역은 총 7개 면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중심지인 현내면을 축으로, 사방으로 뻗은 방리 구조는 남해도의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촘촘한 행정망을 이루고 있었다.
『여재촬요(輿載撮要)』에 기록된 남해현의 행정구역은 관아가 위치한 읍치를 중심으로 총 7개 면(面)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치소(治所)인 현내면(縣內面)을 기점으로 동쪽 10리에는 이동면(二東面)이, 섬의 동남단으로 길게 뻗은 삼동면(三東面)은 60리 거리에 자리하였다.
남쪽 15리에는 남면(南面), 서쪽 10리에는 서면(西面)이 위치하여 배후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북쪽 10리에는 과거 현령이 머물던 고현면(古縣面)이 있었고, 영남 내륙으로 통하는 노량 길목의 최북단 요충지인 설천면(雪天面) 노량은 37리 거리에 있었다. 이처럼 사방 해안선을 따라 유기적으로 짜인 7개 면의 구조는 행정망과 방어체계가 긴밀히 결합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섬이 텅 비었던 공도(空島)의 아픔을 딛고, 조선시대를 거쳐 19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된 지방 행정 체계를 확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견고한 성벽과 엄정한 군비(軍備): 군사시설과 관방 체계
남해현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바다 위의 거대한 요새였다.
『여재촬요』는 이를 방증하듯 남해의 군사시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심지를 방어하는 '읍성(邑城)'에 대한 기록이다.
사료는 단 두 글자, '석축(石築)'으로 이를 설명한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흙이 아닌 견고한 돌로 축조한 남해읍성의 물리적 특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앞선 시대의 읍지들이 둘레와 높이를 상세히 기록한 것과 달리, 1893년의 사료는 이미 확립된 석축 읍성의 방어력을 전제로 그 존재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있다.
나아가 사료는 옛 치소였던 고현면 일대의 방어 시설도 빠뜨리지 않는다.
'고현산성(古縣山城)'과 '관당성(官堂城)' 역시 모두 '석축(石築)'으로 축조되었으며, 읍치 북쪽 17리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중심지를 현재의 남해읍으로 옮긴 이후에도 옛 성곽을 폐기하지 않고, 배후 방어 기지이자 유사시 청야입보(淸野入保)를 위한 시설로, 지속적으로 유지·관리해 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형지물인 '성현(城峴)' 역시 남쪽 24리에 위치한 '요해처(要害處)', 곧 군사적 요충지로 기록되어 있어, 섬 내부의 주요 통로까지 철저한 군사적 통제 아래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촘촘한 해안 방어선은 사료의 '관방(關防)' 조항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남해현은 읍성의 방어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바다의 주요 길목마다 강력한 수군 진보(鎭堡)를 배치하고 있었다.
대표적 요충지인 미조항(彌祖項)에는 종3품 무관직인 수군첨절제사(첨사)가, 평산포(平山浦)에는 종4품 수군만호가 주둔하여 각각 남해의 동남단과 서남단 해역을 철저히 방비하였다.
이들의 임기는 모두 30개월로 규정되었는데, 사료 속 '구근(久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잦은 보직 이동을 지양하고 장기 근무를 통해 지역의 물길과 왜적의 동태를 숙지하도록 한 것이다.
비록 과거 수군 기지였던 상주포(尙州浦)와 곡포(曲浦)는 당시 폐지[今廢]된 상태였지만, 미조와 평산이라는 양대 거점이 여전히 남해의 동서 해로를 굳건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해방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물적 기반도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고을에는 두 곳의 창고(倉二)가 설치되어 있었고, 유사시에 대비한 군수미(軍需米) 227석이 비축되어 있었다.
이는 외부 지원이 끊기더라도 남해현의 자체 병력과 수군이 일정 기간 독자적으로 수성전(守城戰)과 해전(海戰)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돌로 쌓은 성벽, 바다를 지키는 수군 진영, 그리고 창고에 비축된 군량은 남해현을 떠받친 든든한 군사적 기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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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수와 물길, 그리고 영웅의 자취: 교통·통신망의 운영과 보훈
섬이라는 지형에서 정보 전달과 군사적 소통은 곧 생명과 직결된다.
『여재촬요』는 남해현의 교통·통신망을 지리적 요충지와 결부하여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먼저 눈길을 끄는 곳은 영토의 바깥 경계이자 통신 거점이었던 '동천곶(凍川串)'이다. 동쪽 30리에 위치한 이곳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목장(牧場)'이 있었다.
군사용과 통신용 말을 기르던 목장이 섬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남해현이 자체적인 기동력과 통신 수단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북쪽 35리에는 '덕신역(德新驛)'이 있어 육지로 이어지는 공문서 전달과 역마 운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남해 교통·통신망의 핵심은 단연 '노량진(露梁津)'이었다. 북쪽 37리에 위치한 노량진은 남해섬과 육지를 잇는 거대한 관문이었다. 사료에는 이곳을 "곤양·하동 및 본현의 조창(漕倉)이 있고, 상선이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하게 모여드는 곳(商船鱗集)"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 고을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송하는 조창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노량진이 남해안 해로(海路)의 중심 통제소였음을 의미한다.
곧 군사적 통신망과 상업적 물류망이 노량 바다에서 하나로 만났다.
이 노량 바다는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조선의 명운을 바꾼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역사적 공간이다.
사료는 이곳을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전승을 거둔 곳(戰勝處)"이라고 기록하고,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사적비(事蹟碑)'와 장군의 넋을 기리는 '충렬사(忠烈祠)'가 있음을 전한다. 또한 북쪽 10리의 '이락포(利落浦)'를 "충무공이 전투 중 순국하신 곳(忠武公戰殉處)"으로 기록하여, 이 일대가 거대한 호국 유적지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고려 말 우왕 대 원수(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왜구를 격파한 '관음포(觀音浦)'의 기록도 빠지지 않는다.
정이오(鄭以吾)는 「망운산하망범풍, 동거서래책맹통. 막문영웅당일사, 지금인희설원공」이라 하여, "망운산 아래로 배가 바람을 타고 달리는 풍경을 바라보니, 동쪽으로 가고 서쪽에서 오는 조그만 뗏목 배들이 자유롭게 오간다.
그날 영웅이 펼친 활약을 굳이 묻지 않아도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 위대한 공훈을 기꺼이 칭송하네."라고 노래하였다.
망운산 아래 흐르는 물길은 과거의 승전과 오늘의 평화로운 어선을 함께 품고 있으며, 남해의 교통·통신망이 영웅들의 희생 위에 지켜진 소중한 유산임을 웅변한다.
4) 꽃밭(花田)의 품격과 삶의 방식: 풍속, 경제, 그리고 특산물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도 남해의 백성들은 묵묵히 삶을 일구며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여재촬요』가 전하는 1893년 당시 남해현의 인구와 경제 지표는 이 고을의 내재된 저력을 수치로 보여준다.
당시 남해현의 호수(戶)는 3,909호로 약 4천 가구에 달했으며, 장정 및 군역 대상자를 뜻하는 군액(軍)은 2,880명에 이르렀다. 가구 수에 비해 군액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은 남해 주민 상당수가 국가 방어체계에 밀접하게 편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생산력의 기반이 되는 토지 결세 규모인 전결(田結)은 2,469결 영(零)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척박한 바위섬이 아니라 주민의 삶과 군사 체계를 지탱할 만한 옥토를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료가 규정한 남해의 풍속은 "농사와 길쌈을 숭상하고(尙耕織), 문무의 기예를 익히며(習文武藝), 예스러움과 소박함을 좋아한다(好古朴)"는 것이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사람들이 어업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밭을 갈고 옷을 지으며 내륙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화전(花田)'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온화하면서도 품격 있는 공동체의 모습이 '호고박(好古朴)'이라는 세 글자에 압축되어 있다.
남해현의 경제적 풍요를 뒷받침한 토산(土産)으로는 다섯 가지 품목이 기록되어 있다. 가구와 무기의 마감재로 쓰인 칠(漆, 옻), 약재와 염색 재료로 이용된 치자(梔子)와 비자(榧子), 그리고 남해의 대표 특산물인 유자(柚)와 풍부한 해물(海物)이 그것이다.
특히 유자와 치자, 비자는 남해의 온화한 기후가 길러낸 대표 산물로, 조정에 진상되거나 육지와의 교역에서 귀한 대접을 받던 중요한 경제 자산이었다.
곧 19세기 말 남해현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천연자원의 보고였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의 삶과 더불어 사료는 신비로운 전설의 공간인 '금산(錦山)'도 상세히 소개한다.
동쪽 30리에 위치한 금산은 무지개 모양의 돌문인 '홍문(虹門)'과 '구정(九井)'을 품고 있어 예로부터 '신선이 노닐던 곳'으로 불렸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음성굴(音聲窟)'에 관한 기록이다.
사료는 이 굴에 대해 "다섯 가지 음이 메아리쳐 울리는 영험함이 있어 광대들이 이곳에서 소리를 연습하고, 쟁(錚)·징(鉦)·바라 등의 악기도 이곳에서 익혀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를 얻는다"라고 전한다.
이는 변방의 고도(孤島)였던 남해가 조선시대 예술인들이 득음(得音)을 위해 찾던 문화와 신비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오간은 이러한 금산의 신비를 노래하였다. "서불이 지나갔다는 말은 이미 옛날부터 들었으니, 금성산 너머로 해는 반쯤 저무는구나.
지금도 여전히 음성굴이 남아있어, 진나라 가수 청의 노랫소리가 구름을 치는 듯하네."라는 시구는 금산에 깃든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여기에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아왔다는 '서불과차' 비석과 대전(大篆, 고대 한자 서체)으로 새겨진 바위 글씨, 그리고 바다를 굽어보며 웅장하게 서 있는 '보리암(菩提菴)'에 대한 기록은 남해가 단순한 군사 거점을 넘어 영험한 기운이 서린 종교·문화적 명승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5) 조선 국방의 중심축이 된 바다의 요새: 안보적 위상과 역사적 가치
『여재촬요』가 전하는 남해현의 마지막 모습에는 한 시대를 살아낸 지식인과 관료들의 역사 인식이 담겨 있다.
사료의 '형승(形勝)' 조항은 남해의 지리적 가치를 "진도, 거제와 더불어 솥발처럼 세 방향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하늘 아래 남쪽의 뛰어난 명승지(天南之勝地)이다"라고 압축한다.
진도·거제·남해는 남해안 방어를 떠받치는 세 축이자, 국가 안보의 요충지였다. 오횡묵(吳宖默)은 오간의 장가(長歌) 「충렬사사(忠烈祠辭)」를 『여재촬요』에 수록했으며, 오간은 「충렬사사」를 통해 조선의 안보와 영웅의 숭고함을 천지(天地)의 기운에 빗대었다.
「충렬사사」는 "천지간에 곤륜산이 있으니, 지극히 큰 기운이로다. 그것이 물건에 종하면 태산과 높은 산악이 되어 하늘을 떠받치고, 사람에게 종하면 종신(宗臣)과 악비(武穆)가 되어 창해의 만리장성이 되도다"라고 노래한다.
이어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며 "칼날을 밟고 화살을 무릅쓰며 인(仁)을 이루었구나"라고 찬양하고, 백성의 통곡과 기근의 참상을 탄식한다.
"今歲嶺以南煙火空村隣"은 그해 영남 이남의 마을에 밥 짓는 연기가 끊길 만큼 민생이 피폐했음을 드러내며, "思將濟活無涯垠"은 백성을 구제하려는 간절한 뜻을 나타낸다.
충무공이 지켜낸 바다 앞에서 말기의 관료 또한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두 시대의 책무와 역사의식이 남해의 바다 위에 겹쳐진다.
양재건(梁在健)의 시 역시 왕조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바라는 관료의 마음을 전한다.
이는 "궐의 구름은 아득하고 바다와 산은 끝이 없는데, 나그네의 마음은 깊은 근심에 잠겨 말없이 침묵하네. 비와 이슬 같은 은택에 성덕을 노래하고, 백 리에 가득한 봄빛 속에서 맑은 정치의 기풍을 느끼네. 고을 수령은 몸을 바쳐 백성을 걱정하고, 임금의 사신은 충정을 다해 바치고자 하네"라는 뜻이다.
머나먼 변방에서도 조정에 대한 충성과 백성을 향한 책임을 다하려는 공직자의 자세는, 조선 말기 남해가 간직한 역사적 고뇌와 사명감을 보여준다.
6) 1893년의 남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전언
1893년 『여재촬요』 경상도 남해현 편은 조선 왕조의 황혼기에 남해가 지녔던 역사적 위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건치연혁, 석축 읍성과 미조·평산의 수군 방어망, 노량의 조창과 충무공의 자취, 금산의 문화적 가치와 백성들의 풍속은 남해가 변방의 섬을 넘어 국가 안보와 운영의 요충지였음을 증언한다.
격변기에도 행정·군사·경제 기능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체제에서 남해가 차지한 비중을 보여준다.
비록 남해읍성은 사라졌지만, 바다를 터전 삼아 농사를 짓고 학문과 무예를 닦았던 화전(花田) 주민들의 기상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노량의 충무공 유적과 금산·보리암, 봉수대와 옛 성곽 역시 선조들의 삶과 공동체 정신을 전하는 소중한 유산이다.
『여재촬요(輿載撮要)』에 기록된 남해의 역사는 영토 수호의 책무와 그 속에서 피어난 백성들의 삶을 되새기게 한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키고 미래를 준비하려 했던 선조들의 지혜와 의지를 증언한다. 따라서 남해의 역사적 가치를 밝히고 계승하는 일은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 공동체의 의미를 성찰하는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