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 1960년대 남해에 유행했던 우리 노래 '남해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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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3(금) 10:15
1950 ~ 1960년대 남해에 유행했던 우리 노래 '남해강산'

"금산의 허리에 아지랑이 끼이고~ 용문사 절골에 북국새가 울면은~"
'남해강산'노래비건립추진위, 15일 이동초 모교에서 노래비 제막식 거행
선조들 숨결이 담겨있고 지역정체성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남해의 노래
"이동뿐 아니라 남해읍 등 전역에서 어른들이 불렀던 노래다"
"서민 아픔을 달래는 한민족의 정서를 담은 곡조인 민요적 성격의 노래였다"

홍성진 선임기자
2025년 05월 23일(금) 09:20

제1절 : 금산의 허리에 아지랑이 끼이고 /용문사 절골에 북국새가 울면은 /이 언덕 저 언덕에 삼삼오오 작반해(짝지어) /나물 캐는 처녀들의 노래소리 고와라.

제2절 : 오백년전 보광산은 이태조 어른 /공부하며 기도하여 임금님이 되신 곳 /아득한 옛날이 굽이굽이 사모치네 /이 역사 깊은 금산은 우리남해 금강산.

제3절 : 웅장하다 충렬사 남해노량 강가에 /아득한 옛날에 난리 일어났을 때 /크신 장군 이순신 거북선을 만들어 /나는 듯이 다니며 나라 위해 싸웠네.

(후렴) : '에헤야 좋구나. 얼씨구 좋구나/에헤야 좋구나. 우리남해 금강산.'







남해강산 노래비 건립추진위(위원장 하미자)는 남해강산을 작사 작곡했던 이동 석평리 출신 박노권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노래를 기억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나가자는 뜻을 모아 지난 15일 이동초 모교에서 남해강산 노래비 제막식을 진행했다.

이날 선생의 가족뿐 아니라 남해예술인들, 동문회원, 제자들 등이 대거 참석 가운데 진행된 행사에서 추진위는 남해강산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이 땅을 살아온 이들의 숨결이 담겨 있고 지역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남해의 노래이기에 노래비 건립을 통해 앞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직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본지는 1950~1960년대 유행했던 우리의 정서를 담은 남해의 노래 '남해강산'에 대한 발굴 및 고증에 애써주신 주민들과 향우들, 언론 그리고 추진위에 감사드리며, 제막식이 있기까지 그간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주민들이 함께 불렀던 남해강산

(작사·작곡 : 박노권)
제1절 : 금산의 허리에 아지랑이 끼이고 /용문사 절골에 북국새가 울면은 /이 언덕 저 언덕에 삼삼오오 작반해(짝지어) /나물 캐는 처녀들의 노래소리 고와라.

제2절 : 오백년전 보광산은 이태조 어른 /공부하며 기도하여 임금님이 되신 곳 /아득한 옛날이 굽이굽이 사모치네 /이 역사 깊은 금산은 우리남해 금강산.

제3절 : 웅장하다 충렬사 남해노량 강가에 /아득한 옛날에 난리 일어났을 때 /크신 장군 이순신 거북선을 만들어 /나는 듯이 다니며 나라 위해 싸웠네.

(후렴) : '에헤야 좋구나. 얼씨구 좋구나/에헤야 좋구나. 우리남해 금강산.'



▲ 고향 남해를 사랑한박노권 선생

이 노래를 기억하는 어른들마다 과거 ( 남해 ) 민요 형식으로 주민들마다 불렀다고 증언하는 남해 가요.남해강산.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분은 이동면 석평리가 본적인 박노권 선생이다.

남해강산노래비건립 추진위와 그를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 984번지가 본적이다.

1937년 3월 이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진주사범학교(당신 5년제)를 1942년 3월에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하동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1년 동안 생활했다. 이후 1년 뒤인 1943년 10월 선생은 모교인 고향 소재 이동초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문서로 남아있는 남해강산 악보에는 1946년 곡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박노권 선생은 모교에서 3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1946년 진주금성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광복 이후부터 진주로 근무지를 옮길 때까지 선생은 모교 제자들에게 남해강산을 가르친 것이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9월 교사직을 사임, 1951년 3월부터 남해금융조합에서 근무했다.

이후 1959년 8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박노권 선생 이력>

1923. 7 이동면 석평리 984 번지 출생 /1937. 7 이동공립보통학교 제16회 졸업(학번 제613번) /1942. 3 진주사범학교 졸업(5년제) /1942. 3 하동읍내 초등학교 교사 /1943. 3 이동공립국민학교 훈도 부임. 이동공립심상소학교 지도원 위촉 /1946.10 진주금성공립학교 전출 /1950. 9 교직에서 은퇴 /1951. 3 남해금융조합 근무 /1959. 8 지병으로 작고



▲ 원작자에 대한 확인 및 고증

남해강산에 대한 첫 고증을 시작한 분은 이동초 100년사를 집필한 정봉주 선생이다.
원작자에 대한 확인 및 고증에 나선 정봉주 선생의 회고담은 다음과 같다.
『박노권 선생님이 진주로 전출하기 전에 이동초등학교(1946년, 제24회)를 졸업한 최현덕님께서 3학년(1943-1944) 담임을 맡으신 때, 이 노래를 지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지은 연도가 차이가 있다. 당시에 학교에서는 모든 말과 글을 일본어로 해야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고 부를 기회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이 노래가 입으로 전하여 내려오면서 남해군민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며, 대부분 1절만 아는 분이 계시고 1절의 가사도 원곡과 다소 다르게 불리어져 왔다.
 해방 당시 등사원지에 철필로 가리방(출판)에 적어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배웠던 노래이다.
 이동국민학교 소풍 장소의 하나인 금산, 용문사에 가면 학생들이 많이 불렀던 노래이며 대개 1절만 불렀다.
 남해군지에 구전으로 전해진 노래가사가 사람들마다 다소 다르게 불리고 있었고, 정확하게 아는 분도 안 계신다.
 당시에 이동국민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박노권 선생님이 지으신 노래라고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후배 기수들은 노래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제24회 졸업생인 박준실(전 이동면장)님에게 부탁하여 자료를 수집하던 차에 류귀주(제25회 졸업, 전 중등학교 교사)님이 보관하여 계시다는 정보를 주었다. 이 자료를 받아 (2013.08.15.) 입수하게 되기까지는 그간 보도된 여러 매체에서 원작자에 대한 논란이 많아 선배님이 만드신 곡이라는데 대한 의심과 궁금증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터라 그야말로 귀중한 자료였다.
 특히 금산, 용문사, 이성계, 충렬사, 남해노량, 거북선 등이 나오는 남해인의 찬가라는 점에서 사랑받아야 하고 정확한 악보와 제3절까지 가사가 있어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일부 주장에 대한 박경기 교수와 추진위 의견

 일부 진주 지방에서 같은 곡조의 노래가 그 지방에 맡도록 개사되어
불려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고, 해방 이전에 진주사법출신의 타인에 의해 만들어져 불리고 있었는데, 해방 후 박노권이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남해에 근무하면서 그 노래를 기존 불리던 곡에 맞추어 노래말만 <남해 강산>으로 개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반대로 해방 전에는 우리말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는 사실에 미뤄 박노권 선생이남해에서 근무하다 진주지방으로 전근하여 그 곳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방에 맞도록 개사하여 가르칠 수도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남해강산>은 남해 노래를 읊은 작품임은 분명하므로 왈가왈부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 노래비건립추진위 추가 자료확보와 증인 재확인 (2024년-2025년 현재)
 
박노권 선생의 남해강산 노래비 추진위가 구성된 것은 지난 2024년 6월 3일이었다.
 추진위는 남해강산 노래의 역사적 사실확인에 나섰다.
 당시 박노권 선생의 제자 류귀주(전 중학교원, 이동초교 25회 졸업생), 정한규(전 남해군 6.25 참전용사회 회장, 이동초교 25회 졸업생) 선생을 방문해 "8월 15일 해방 직후인 동년 8월 25일경 칠판에 써서 작곡, 작사 박노권 노래 '남해강산'을 가르쳐 주셨다"는 일치된 증언을 들었다.
 이어 8월 6일 노래비 파일을 만들어 주역 주민들에게 공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한편 노래비 장소선정 등을 고민했다.
 올해 3월에는 이정수 작곡가에게 정식으로 편곡을 의뢰해 완성, 노래를 각 단체에 USB로 보급했다.
 이어 이동초교 총동문회 주관 모교교정에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어 4월 15일 설치를 신청하고 모교의 적극적 지지로 지난 15일 노래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 남해 주민들,한민족의 정서 담은 민요적 성격의 노래로 기억
 
 '노래비건립추진위는 '남해강산'이 널리 알려져 남해인의 긍지를 높이는 보물섬 찬가로 자랑스런 남해문화유산으로 기록되어 향토문화의 뿌리를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다.
 본지가 만난 한 주민은 "이 노래를 기억한다.
 이 노래는 이동초등학교 출신 사람들뿐 아니라 남해읍, 삼동, 남면 등지에서 어른들이 불렀던 노래다"면서 "가사 또한 남해를 노래한 것이었고 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민요적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 한 주민은 "밝고 진취적으로 편곡된 현 노래와 달리 과거에는 음이 늘어지며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는 한민족의 정서를 담은 곡조인 민요적 성격의 노래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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