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판 판각지는 남해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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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31(금) 11:47
팔만대장경판 판각지는 남해가 유일하다
남해미래신문
2025년 10월 31일(금) 09:28
▲ 관음포 앞바다와 고현면 대장경판각문화센터 전경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와 목판 인쇄술의 점수(精髓)를 보여 주는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그 학술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특히 대장경판의 판각지는 경남 남해가 유일하다는 점은 국내외 학계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합의된 사실이다. 남해라는 지명이 실제 판각지로 기록된 유일한 사례임은 팔만대장경 목판 '종경록(宗鏡錄)' 권27의 "정미세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 開板)"이라는 명문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강화도와 경남 일대에서 일부 판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남해의 중심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에서는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 역사적 인물과 행정 체계, 지역적 특성과 운반 경로, 그리고 현대적 관점에서 남해 판각지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학술적으로 재조명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팔만대장경판 판각지로서 남해의 유일성을 다시 확인하며, 그 역사적 정당성과 현대적 활용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 남해가 팔만대장경판 판각지로 유일한 이유

팔만대장경판이 남해에서 판각(板刻)된 이유는 역사적, 지리적, 기술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문헌 기록상 '남해(南海)'라는 명확한 지명 표기가 중심적 근거가 된다. '종경록' 권27에는 "정미세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이라는 구체적 판각 지명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대장경 판각지에서 지명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사례다. 이러한 명문은 단순한 지역 표기를 넘어, 당시 고려 정부가 남해를 판각 사업의 공식적 거점으로 삼았음을 보여 준다.

지리적 측면에서도 남해는 몽골의 침입으로 위험이 컸던 육지와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다. 내륙 깊숙한 곳과 해안의 섬 구조는 외적의 접근을 차단하는 자연적 요새 역할을 했으며,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큰 관음포(觀音浦) 해변은 목재 운반과 관리에 매우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다. 목재 조달도 남해가 적합했다. 지리산(智異山) 일대에서 산벚나무 등 판각에 적합한 목재가 풍부하게 생산되었고, 벌채된 나무는 섬진강(蟾津江) 하구를 따라 뗏목 형태로 운반되어 관음포에 도착했다. 바닷물과 갯벌에 일정 기간 담가 자연 치목(治木)하는 과정을 거쳐 목재가 판각에 적합하도록 준비되었다.



정치적·행정적 지원도 남해를 유일한 판각지로 만든 요인이다. 집권자인 최우(崔瑀, ?~1249)는 중앙의 강화도(江華島) 대장도감(大藏都監)과 연계하여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했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의 처남인 정안(鄭晏, ?∼1251)은 화를 피해 남해로 내려와 거주하며, 국가와 함께 경비를 절반씩 부담하여 팔만대장경의 간행을 직접 관리하고 조직적인 판각 작업을 주도하였다. 남해는 지리적 안전성과 목재 조달 용이성, 중앙 정부와 불교계의 체계적 지원이 결합된 유일한 장소였다. 학계는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곳이 남해 외에는 없음을 분명히 확인하며, 판각지가 남해임을 다양한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재확인하고 있다.



▲ 남해 판각지의 문헌적·고고학적 근거

남해(南海) 판각지의 유일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문헌상의 기록이다. 팔만대장경 목판 '종경록' 권27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남해가 공식 판각지임이 명확하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과 비교하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다. 남해군 고현면 일대에서는 판각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전 관당성지, 전 선원사지, 전 망덕사지 등 고려시대 건물터가 판각 활동과 연결되며, 명문이 새겨진 기와, 자기,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명문 기와에는 시주자와 시주 금액 등이 기록되어 중앙 정부와 불교계의 긴밀한 연계가 확인된다. 셋째, 학계와 전문가의 인정이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등은 남해 분사대장도감 명문과 유적, 출토된 유물들을 종합한 결과, 남해가 실제 판각지였음이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후 학술 심포지엄과 연구보고서에서도 남해 판각지의 역사적 위상과 문화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으며, 문헌 기록과 유물 증거의 일치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상의 문헌적·고고학적 근거는 남해가 팔만대장경판 판각지로서 공식성과 중심성을 가지며, 학술적 논란 속에서도 중심지로 인정받는 이유를 명확히 보여 준다.



▲ 남해 판각지의 지역적 특성과 판각 환경
▲ 관음포 앞바다와 고현면 대장경판각문화센터 전경

남해 판각지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조건과 지역적 특성이 대장경 제작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먼저, 지리적 안전성이다. 당시 몽골의 침입으로 육지 대부분은 위험했으나, 남해는 섬 지역 구조로 외적의 접근이 어려워 안전한 피난처이자 판각 장소로 적합했다. 이는 장기간 안정적인 판각 작업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였다. 둘째, 목재 조달과 운반의 용이성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벌채한 산벚나무 등 목재가 섬진강 하구를 따라 관음포까지 운반되었으며, 해변의 자연환경은 소금기 처리와 치목 과정을 거쳐 판각에 적합하도록 최적화되었다. 이는 대장경판의 품질과 내구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셋째, 지역 내 고려 귀족과 행정 지원이 있었다. 남해 주변에는 중앙과 연결된 귀족·관료가 존재했고, 최우(崔瑀)와 정안(鄭晏)의 조직적 관리 아래 판각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넷째, 판각 관련 유적과 발굴 자료의 존재는 실제 판각 활동이 남해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결국 남해의 지역적 특성과 자연환경, 인적·행정적 지원은 팔만대장경판 판각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였으며, 이는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된다.



▲ 팔만대장경판의 이동 경로와 역사적 증거

남해에서 판각된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를 거쳐 최종적으로, 해인사로 운반되었다. 운반 경로에 대한 기록은 상세하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수로와 육로를 복합적으로 이용한 '릴레이 방식'을 추정한다.
먼저 남해 관음포 등 항구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강화도 선원사로 옮겨졌다. 강화도는 당시 임시 수도이자 안전한 보관 장소였으며, 판각 목재가 강화도 대장판당으로 이동해 일시적으로 보관되었다. 이후 한강 하류와 낙동강 수로를 활용하거나, 일부 해로를 이용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 하류 개포까지 운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포에서는 육로와 산길을 이용해 최종 목적지인 합천 해인사로 이동했다.
역사적 기록과 벽화 자료는 이러한 경로를 뒷받침한다. 『태조실록』 1398년 5월 10일 기사와 『정종실록』 1399년 1월 9일 기사에는 강화도와 해인사로의 경판 이동이 언급되어 있으며, 해인사 대적광전 외벽의 '대장경 이운 벽화'는 개포에서 해인사로 운반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로써 팔만대장경판의 이동 과정은 문헌과 시각 자료, 학술적 추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동 과정의 어려움과 규모도 중요한 역사적 증거다. 팔만대장경 전체 경판 무게가 수백 톤에 달하며, 당시 여건으로는 운반이 극히 어려웠음에도 손상 없이 완벽히 이동한 점은 고려시대 기술력과 조직력의 뛰어남을 보여 준다. 현대 연구에서도 이동 경로와 운반 방식은 강화도-한강-낙동강-해인사 경로를 중심으로, 복합적으로 해석된다.


 
▲ 팔만대장경 판각 과정과 일연 스님의 역할

일연 스님은 1249년부터 1261년까지 남해 정림사(定林社)에서 12년간 머물며 팔만대장경 판각 사업의 증의(證義)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연 스님뿐만 아니라 그의 12명의 제자도 직접 판각에 참여하여 590여 장의 경판을 제작하였던 사실은, 이들이 대장경 조성 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입증한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한 목판 인쇄물이 아니라 당시 불교계의 집단적 노력과 학문적 열망이 집결된 대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고려 불교계의 대표적 승려로서, 그의 판각 참여는 고려시대 불교사의 중요한 맥락과 밀접히 연관된다. 팔만대장경의 제작은 단순한 경전의 집성에 그치지 않고, 당시 불교계의 학문적 정성과 집단적 창조력이 반영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판각 사업 종료 이후에도 일연 스님은 남해에 머물며 대장경의 보존 및 교정 업무를 책임졌다. 이는 팔만대장경이 단순한 제작물을 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전승된 귀중한 유산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활동은 대장경을 불교계와 국가의 정신적 자산으로 승화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팔만대장경 판각 과정에서 일연 스님과 그의 문도들이 수행한 역할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집단적 창조와 계승을 상징하며, 이는 후대 문화유산 연구와 보존뿐 아니라 현대 한국 불교문화 및 민족문화유산의 핵심 가치로서 지속적인 학술적 조명을 받고 있다.



▲ 팔만대장경판 판각지 남해의 관광 자원 활용과 행정 역할

남해군은 팔만대장경판 판각지의 학술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바탕으로 이를 현대적 관광 자원과 문화유산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해군은 정림사, 관음포, 백련암지 등 판각 관련 유적지를 발굴·보존하고, 문화재 해설과 학술 자료 제공 사업을 추진하여 팔만대장경판 판각지의 중요성을 일반 시민과 관광객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 문화관광 발전에도 기여하도록 기획해야 한다.
또한, 남해군은 지속적인 학술 심포지엄 개최, 발굴 자료 전시, VR·AR 기반 디지털 체험 프로그램 개발 등 다양한 현대적 문화 콘텐츠를 마련하여 팔만대장경의 역사적 맥락과 판각 과정을 직접 체험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팔만대장경의 학술적 재조명을 관광과 교육 콘텐츠로 연계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남해군의 행정적 지원은 단순한 관광 개발을 넘어 학술 연구, 유물 보존, 문화재 교육을 아우르는 종합적 플랫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남해가 팔만대장경판 유일의 판각지임은 문헌과 고고학적 근거, 역사적 인물과 행정 지원, 지역 환경 및 판각·운반 과정의 역사적 증거를 종합했을 때 명확하다. 지리적 안전성과 목재 조달의 용이성, 고려 정부와 불교계의 체계적 협력이 결합되어 몽골 침입과 같은 외적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판각 진행이 가능했던 곳이 남해이다. 현대 학술 연구는 남해 판각지의 독보적 의미를 재확인하며, 일부 학자들의 다른 지역 판각지 가능성 논의를 함께 검토하여 남해가 가장 유리한 판각 장소임을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 남해군의 행정적 노력과 관광 자원화 전략은 팔만대장경판의 역사적 유산을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모범 사례가 된다. 이는 학술 가치 보존과 문화재 활용을 동시에 실현하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검증과 현대적 활용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문화유산 연구와 관광 정책 수립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
끝으로, '팔만대장경판 유일 판각지인 남해'는 역사적·문화적 자산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유지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와 연계한 지속 가능한 관광 자원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체계적 행정 지원과 철저한 학술적 관리 아래, 남해는 후손과 미래 세대에도 그 소중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계승하고 전승하도록 모두가 함께 힘써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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