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국민소득 79달러 불과한 시기, 총공사비 18억 7천만원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4.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
최치환 의원 & 신동관 의원 헌신과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으로 실현
"남해대교는 고향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희망(希望)의 길,
귀향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환영(歡迎)의 표식이 되어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감정의 통로로 기능해 왔다"
남해미래신문
2026년 01월 09일(금)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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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남해군과 남해인의 삶을 변화시킨 역사 그 자체였던 남해대교의 의미를 되짚어 봤다.
오늘을 사는 우리와 앞선 선조들이 가졌던 남해대교에 대한 정서적 정체성이 앞으로 남해를 이끌 후손들이 기억하고 자원으로 활용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남해대교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현장이자 앞으로도 관광 등 새로운 영역에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프라이자 그 현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해대교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대한민국 관광 재도약의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해야 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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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는 이들에게 남해대교(南海大橋)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육지와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끈이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 남해는 육지와 불과 600m 떨어진 노량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깊은 수심과 거센 조류로 인해 사실상 고립된 섬이었다.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지였던 노량해협을 오가는 배가 군민들이 외부로 나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당시 '뭍 나들이'는 여객선과 도선을 전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수에서 출발한 배가 남해 노량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데 배를 타는 시간만 해도 12시간이 넘는 여정이었고, 당시 「경복호·한려호·남해호」 같은 배 이름은 곧 주민들의 삶을 실어 나르던 기억의 무대이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느린 재래식 여객선이 주를 이루던 여수·남해·부산 뱃길은, 1970년대 초쾌속선 엔젤호(Angel號)의 등장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그러나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되고 육로 교통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한때 이 항로를 혁신했던 엔젤호도 새로운 교통 환경 속에서 경쟁력을 잃고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신혼여행의 설렘, 군대 가는 자식을 떠나보내던 어머니의 눈물, 풍랑으로 인한 위급한 환자 이송의 안타까움, 명절마다 기상 악화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이 모두 그 배 위에 쌓였다.
배가 뜨지 않으면 남해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버스까지 실어 나르던 도선 '금남호'는 그 시절을 묵묵히 버텨낸 상징이었다.
섬이라는 한계는 산업과 경제를 낙후시켰고, 삶은 '보릿고개'의 연속이었다. 바다 해초나 소나무껍질로 연명했던 고단함. 이러한 결핍을 끝내고 육지 사람들처럼 잘살아 보겠다는 간절함이 결국 거대한 다리 건설의 꿈으로 이어졌다.
△ 남해대교 건설 배경, '섬 놈' 설움을 씻은 두 인물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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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사 중의 난공사로 여겨지던 남해대교 건설은 단순한 지리적 필요를 넘어, 두 남해 출신 인사의 헌신과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어우러진 극적인 배경 속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국민소득이 79달러에 불과했던 최빈국 한국에서 총공사비 18억 7천만 원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4.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1965년 공무원 평균 월급이 6,000원 수준이던 당시, 남해에 다리를 놓겠다는 발상은 기적과도 같았고, "다리가 생기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회의론이 팽배했다.
이 불가능해 보이던 사업을 현실로 끌어낸 두 주역은 당시 청와대 경호 과장이던 신동관(1926.9.2.~2018.4.29)과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제6대 국회의원 최치환(崔致煥, 1922,10.22.~1987.5.27.)이었다.
출발점은 1964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진해 저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시기였다.
경호를 맡은 신동관 과장은 대통령이 고향 남해에 관해 묻자 "남해는 다리가 없어 배로만 건너야 하고 풍랑이 잦아 군민들이 큰 불편을 겪습니다.
무장 공비가 침투하면 병력 투입이 늦어지고, 휴가 나온 군인들도 날씨 탓에 복귀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각하, 남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건의했다.
이는 단순한 지역 민원을 넘어 국가 안보 논리로 대통령의 관심을 돌린 결정적 계기였다.
이어 1965년 4월, 최치환 의원은 '잘 사는 남해'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박 대통령을 남해로 초청해 직접 현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특유의 언변과 패기로 공사의 기술적 난이도, 경제적 효과, 지역 발전 가능성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대통령의 결심을 끌어냈다.
미조항에서 농기구를 든 군민들이 대통령을 뜨겁게 맞이하던 장면은 순박한 섬사람들의 진심을 그대로 드러냈고, 박 대통령이 감격해 눈물을 보였다는 전언도 전해진다.
이처럼 군민의 간절한 염원, 두 인물의 집념, 그리고 대통령의 결단이 맞물리며 1968년 5월, 남해대교 건설은 마침내 그 첫 삽을 뜨게 되었다.
△ 남해대교의 탄생과 위상, '한국의 금문교', 남해의 빛
5년간의 매우 어려운 공사 끝에 남해군민의 숙원이자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 된 남해대교(南海大橋)는 1973년 6월 22일 마침내 준공(竣工)되었다.
총연장 660m, 중앙 경간 404m의 이 다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현수교(懸垂橋)로써 당시 동양 최장 길이를 자랑하며 '한국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개통식 날의 환희는 기록과 증언을 통해 지금도 생생히 전해진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는 무려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고, 사람들의 무게로 다리가 흔들릴 만큼 붐벼 안전을 위해 현장에서 교통 정리를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또 "남해대교를 건너면 무병장수한다"라는 속설이 퍼지며 개통 초기에는 이른바 '다리 밟기'라는 진풍경이 펼쳐졌다는 점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 국내 기술의 한계로 인해 일본과 기술 협력을 통해 완공되었다는 점은 시대적 제약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남해대교는 지난 50여 년 동안 남해의 관문이자 상징으로 우뚝 서 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와 해태상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남해 사람들은 이 다리를 '큰 빨간 대문'이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담아왔다. 여기에 더해 남해대교는 지역 경제와 생활 변화를 이끈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오랫동안 섬이라는 한계를 안고 살던 주민들은 다리 개통 이후 교육·의료·문화 시설을 더욱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청년들의 진학과 취업 기회도 크게 넓어졌다.
무엇보다도 남해대교는 고향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희망(希望)의 길이, 귀향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환영(歡迎)의 표식이 되어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감정의 통로로 기능해 왔다.
이러한 기억과 상징성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며, 다리가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 발전의 시초, 고립 탈피와 관광산업의 태동
남해대교의 개통은 남해 지역사회에 비약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농산물 가공 중심의 소규모 가내공업에 머물던 남해 경제는 육로가 열리면서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물류 이동이 원활해지자 여수·광양·삼천포 임해 공업단지와의 연계가 강화되었고, 남해고속도로와 이어지며 부산·진주·마산 등 주요 도시와의 교류도 눈에 띄게 확대되었다.
남해대교는 말 그대로 남해를 본격적인 육지 생활권으로 편입시키며 오랜 고립을 해소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역시 다리 개통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얻었다. 1970~80년대에는 남해가 신혼여행과 수학여행지로 주목받았고, 남해대교 앞에서 남기는 기념사진은 하나의 여행 의례처럼 자리 잡았다.
관광객의 증가는 지역경제를 직접적으로 이끌었고, 숙박업·음식업뿐 아니라 특산품 산업의 성장까지 촉진했다. 이는 지역민에게 지속 가능한 소득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5년, 당시 대기업이던 해태가 남해대교 남단에 '남해각'을 건립했다. 지하 나이트클럽, 1층 전시장·판매장, 2층 숙박시설로 꾸려진 남해각은 당시 남해에서 도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서양 음식과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와인을 즐기는, 말 그대로 시대를 앞선 '핫플레이스'였다.
남해를 찾는 여행객들에게는 다리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관문이자,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첫 번째 무대가 되었다. 오늘날의 남해각은 관광의 출발점이자 지역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하며, 남해대교가 연 관광 부흥기의 상징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남해대교 역할 변화, 50년 대장정,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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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개통 이후 50년 동안 남해의 관문을 지켜온 남해대교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꾸준한 보수에도 구조물의 노후화는 피할 수 없었고, 2018년 남해대교 옆에 노량대교가 개통되면서 주요 교통 기능은 자연스럽게 새 다리로 이관되었다.
총연장 3.1km(다리 길이 990m)의 노량대교는 국도 19호선의 역할을 넘겨받아 대형 차량의 통행을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 남해대교는 전체 교통량의 약 10% 미만을 소화하며 사실상 역사·상징적 기능이 더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
50년간 관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 두 동생 격인 창선·삼천포 연륙교와 노량대교에 임무를 넘긴 남해대교는 여전히 단아한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향후 인도교로 전환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고향의 입구에서 반세기 넘게 자리를 지켜온 남해대교가 이제는 노량대교에 중심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사실은 군민의 마음을 적잖이 허전하게 만든다.
그러나 역할의 변화는 곧 '새로운 탄생'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남해대교가 지닌 역사·상징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는 단순한 수송 기능을 넘어 관광 자원으로 그 가치를 확장해야 한다.
남해군은 개통 50주년을 계기로 남해대교를 보존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교량의 경관 조명 정비, 보행환경 개선, 주변 해안 경관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 콘텐츠 개발 등이 함께 추진된다면 남해대교는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채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교량의 역사성을 기록·전시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더한다면, 지역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교육적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억의 공간을 넘어 미래 관광의 플랫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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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는 단순한 교량을 넘어 남해군민의 집단적 추억과 염원이 스며 있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이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남해군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 온 이 다리는 레트로(復古, retro) 감성이 확산되는 오늘날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재탄생할 잠재력이 크다.
남해군은 남해대교를 '독창적 관광 자원'으로 재해석해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다리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살려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전략이 놓여야 한다.
나아가 남해대교의 건축적 가치, 개통 당시의 사회·문화적 의미, 그리고 세대를 잇는 감성적 서사를 체계적으로 스토리텔링 한다면, 이 다리는 단순한 옛 구조물이 아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주탑 꼭대기에서 노량해협을 내려다볼 수 있는 '주탑 체험'은 기존의 집라인이나 출렁다리와는 다른, 희소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갖춘 체험 콘텐츠가 될 것이다.
둘째, 차량 통행이 제한된 남해대교를 걸으며 스토리텔링과 공연 등을 즐기는 '다리 걷기 프로그램'은 개인의 추억을 되살리고 새로운 감성을 더하는 체류형 관광의 중심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상대적으로 침체된 남해대교 주변을 체계적으로 관광 자원화한다면, 정체된 지역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남해 관광의 균형 발전을 이끄는 핵심 성장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고향 사람과 여행객을 묵묵히 맞이해 온 이 '빨간 문'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이를 창의적 관광 콘텐츠로 재해석해 미래 세대에 물려주는 일은 군민과 행정이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남해대교가 관광용 트램(Tram, 路面電車)이 지나는 도보교로 전환되어 50년의 세월과 이야기를 품은 채 대한민국 관광의 새로운 상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모두의 관심과 지혜가 모여야 한다.
단순히 오래된 교량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남해대교가 지닌 공간적 특성과 추억,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삶을 연결하는 정서적 유산까지 아우르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이 다리를 바라보는 세대별 기억의 차이를 존중하며, 지역의 정체성과 감성을 함께 담아내는 세심한 기획이 병행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관광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남해대교(南海大橋)는 과거 고립과 희망이 교차했던 역사적 기념비였고, 지금은 보존과 재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남해군이 추진하는 인도교 전환, 주탑 체험, 관광용 트램(Tram) 설치 등 창의적 계획들은 남해대교를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대한민국 관광 재도약의 핵심 플랫폼으로 이끌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지역 예술, 청년 창업, 문화 체험 프로그램과 연계된다면 다리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과 현대적 감성이 만나는 이 공간이 새로운 세대에게도 살아 있는 이야기의 무대로 남기를 기대한다.

2026.01.09(금) 11: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