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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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민초(民草)가 세운 성소(聖所), 남해 충렬사와 묘비를 다시 보다
충렬사의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는 이순신 장군의 명예회복과 호국정신을 제도화한 역사 현장, 민심과 국가가 함께 완성한 기억의 상징이다
조선사회가 충절을 완수한 성인(聖人)으로 재평가한 사료, 이 비를 통해 비로소 장군의 명예 회복이 이뤄졌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24일(금) 17:43
▲ 남해 충렬사에 있는 이충무공묘비 모습 - 비각 밖(左), 전면(中), 후면(右)

임진왜란의 마침표를 찍은 노량해전의 거센 물결 위로 어느덧 4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자리한 사적 제233호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성웅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순국한 뒤 그 유해(遺骸)가 처음으로 안치되었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전란의 상처를 딛고 영웅의 충절을 역사로 정립하고자 했던 조선 사회의 의지와 성찰이 응축된 상징적 장소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충렬사 경내에 우뚝 선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와 사당에 깃든 의미를 통해, 이곳은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호국 정신의 본질과 그 시대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아울러 위기 속 리더십과 도덕적 결단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이자, 역사(歷史)를 현재로 잇는 살아 있는 사표(師表)다.


▲ 남해 충렬사에 있는 이충무공묘비 모습 - 비각 밖(左), 전면(中), 후면(右)
▲ 남해 충렬사에 있는 이충무공묘비 모습 - 비각 밖(左), 전면(中), 후면(右)

△ 충렬사 묘비, 성웅 이순신을 다시 세우다



충렬사 경내에 있는 비석의 정식 명칭은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이다. 비문의 서두를 장식한 '유명(有明)'은 조명연합군을 결성해 왜군에 맞섰던 명나라와의 국제 관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석의 진정한 가치는 '증시충무(贈諡忠武)' 네 글자에 있다.
이는 장군 사후에 내려진 공식 시호로, 생전 모함과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점철된 고난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정리하고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음을 인증(認證)한 표현이다. 흔히 묘비(墓碑)는 무덤 앞 비석을 뜻하지만, 이 비는 사당(廟) 앞에 세워진 '묘비'다.
1660년(현종 1년) 건립된 이 금석문(金石文)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다.
이는 17세기 조선 지식인 사회가 이순신을 단순한 무장이 아닌 유교적 충절을 완수한 성인(聖人)으로 재평가했음을 보여주는 사료적 증거다. 비로소 장군의 명예 회복은 이 돌 위에서 완결되었다.
남해 노량의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성웅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발탁된 공(公)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옥포·한산도·부산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며 왜적을 격파했지만,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백의종군과 모친상까지 겪었으나 충효의 일념으로 견뎠다.
이후 다시 통제사로 복귀한 공은 명량(鳴梁)과 노량(露梁)에서 대승을 거두며 전세를 뒤집었다.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조선과 명나라 군사들이 함께 통곡하였다. 공은 대의를 중시하고 백성을 사랑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이러한 업적과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다. 효종(孝宗)의 관심 속에 비문이 완성되었고, 현종은 '충렬(忠烈)'이라는 사액을 내려 그 영광을 기렸다. 이는 공의 충혼이 영원히 나라를 지키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후대의 정성과 예우라 할 수 있다.



△ 민초의 진심이 세운 영웅의 성소(聖所), 남해 충렬사의 400년 기억



남해 충렬사의 탄생은 관(官)이 아닌 민초(民草)의 자발적 경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598년 노량해전(露粱海戰) 직후,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1543~1607)은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를 수습해 현재 충렬사 터에 임시 안치했다.
30년 뒤인 1628년, 지역 선비 김여빈과 고승후가 사비(私費)로 초당을 짓고 위패를 모신 것이 시초다. 이들은 해마다 초가를 보수하며 정성을 다했고, 협소한 사당을 안타까워하며 조정에 거듭 상소했다. 그 진심은 마침내 왕실을 움직였다. 1658년 통제사 정익이 사우를 중수하고, 1663년 현종이 '충렬사' 어필 현판을 내리면서 국가 사당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민심이 영웅을 지키고 국가가 응답해 기억을 제도화한 민관 협력의 귀감이다.
경내에 들어서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보천욕일(補天浴日)'이 걸린 비각이 나타난다. '찢어진 하늘을 기우고 흐린 해를 씻는다'라는 이 문구는 나라를 구한 장군의 공적을 상징한다. 무너진 국운과 상처 입은 자긍심을 회복시켰다는 비유는 이순신의 역사적 의미를 집약한다.
사당 뒤편의 가묘(假墓)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이다. 승전(勝戰) 후 고향 아산으로 운구(運柩)되기 전까지 유해가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승리의 기쁨보다 사령관을 잃은 슬픔과 엄숙한 예우가 깃든 자리다. 노량의 바다 내음을 품은 이곳은 영광 뒤에 가려진 희생의 무게를 조용히 전한다.



△ 패배의 유산조차 승리의 불씨로 바꾼 '책임의 정신'
 

 우리는 흔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장군의 결연한 의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 12척의 배는 실상 칠천량해전 이후 퇴각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 1551~1599)이 거느리고 남은 '패잔의 흔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순신은 좌절과 붕괴의 잔해 속에서도 가능성을 읽어냈고, 초라한 전력마저 승리의 불씨로 되살려냈다.
 충렬사와 그 앞 묘비는 이처럼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끝내 책임을 다한 지도자의 정신과 불굴의 리더십을 오늘에 전한다. 후손들의 관리 소홀을 우려해 대를 이어 상소를 올린 김여빈 일가의 정성과 이를 인정해 파격적 관직을 내린 조정의 예우는 영웅을 기억하는 공동체의 올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남해 충렬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와 국가가 함께 지켜온 정신적 보루다. 영웅은 전투에서만 탄생하지 않는다. 그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비로소 불멸이 된다.
 남해 노량 앞바다는 오늘도 잔잔하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1598년 11월 19일(陰曆),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이들의 함성이 잠들어 있다.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는 4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우리에게 묻는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충렬사의 고요한 마당에서 역사는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현재의 가치임을, 책임과 헌신만이 시대를 구할 수 있음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그날의 바람과 파도, 그리고 꺼지지 않는 충의(忠義)의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묵묵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 남해 충렬사 묘비 번역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성균관 제주 송시열·송시열은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제주 송준길은 글씨를 쓰다.
 남해 노량에 세 칸 남짓한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명나라 신종 황제 만력 연간에 왜국의 우두머리 풍신수길이 관백을 죽이고 나라를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공해 왔다.
 공은 그 이전 북방에서 여러 차례 큰 전공을 세웠으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신묘년 2월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자 곧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를 재편하였다.
 이윽고 왜적과 싸움이 벌어지자, 옥포, 노량, 당포, 사량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적장의 목을 베었다.
 또 당항포에서도 적선 사십여 척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모두 적은 병력으로 이룬 승리였다. 임금은 그 공훈을 높이 치하하고 벼슬을 올려 주었다.
 영등포와 견내량에서도 적을 격파하여 바다가 피로 물들었고, 안골포에서는 왜선 사십여 척을 불살랐다.
 이어 부산으로 나아가 적선 백여 척을 무찔렀다. 마침내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고 군량을 비축하며 군사를 정비해 다음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원균의 간사한 모함으로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가 결국 공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공은 체포되어 고문까지 당하였다. 다만 대신의 직언과 임금의 판단으로 벼슬만 삭탈되었다.
 그즈음 모친이 별세하였다. 부고를 듣고 내려가며 충과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통곡하니 백성들 또한 함께 울었다.
 한편, 원균은 적의 계략에 빠져 군사를 잃고 전사하였고, 한산도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적은 서해를 넘어 남원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은 다시 공을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공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순천으로 달려가 흩어진 군사를 모아 다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임금은 상을 내리고 벼슬을 더하려 하였으나 대신 장병들에게 포상하였다. 명나라 장수 양호도 비단을 보내며 공을 칭찬하였다. 공의 명성은 명나라에까지 퍼져 천하에 떨쳐졌다. 그러나 공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임금이 보약을 하사하자 눈물로 감읍하며 충성을 다짐하였다. 임금이 수군을 폐지하자는 뜻을 보이자, 공은 바다를 떠나면 적이 육지로 올라올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후 명나라 장수 진린과 유정이 도착하자 공은 그들을 잘 대접하여 신망을 얻었다. 공은 본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며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왜장 행장은 탈출을 위해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보내려 했으나 공은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이로써 군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 무술년 11월 19일, 공은 진린과 함께 노량에서 적을 맞아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전투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공의 조카는 울음을 참고 대신 지휘하여 진린을 구해냈고, 행장은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전해지자, 조선과 명나라 양군에서 통곡이 울려 퍼졌고, 운구 길 내내 애도가 이어졌다. 많은 백성이 삼년상을 치렀고 승려들도 제사를 올렸다. 공은 성품이 곧고 절개를 지켰으며 옳지 않은 일에는 높은 벼슬아치라도 꾸짖었다. 군정을 펼 때는 엄정하고 공정하여 백성의 희생이 없었다. 군사들은 한마음이 되어 법을 지켰고, 적과 화친을 주장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공은 뛰어난 지휘로 수십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여 나라를 지켜냈다.
 이 노량은 공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그의 충혼이 서린 곳이다. 그의 명성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옛 사당이 협소하여 새로 고쳐 세우고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며, 이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 자는 여해, 본관은 덕수이다. 후에 충열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 영광은 더할 나위 없다. 이는 현종 4년 7월에 새겨진 것이다.
 


△ 충렬사와 묘비가 남긴 유산,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지킬 것인가

 
 노량해전의 격랑 속에서 산화한 이순신의 충의는 단순한 전공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남해의 충렬사와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는 한 개인의 영웅담을 넘어, 억울함을 딛고 이룬 명예의 회복과 공동체가 기억을 계승해 온 과정을 집약한 상징물이다.
 특히 송시열과 송준길이 참여한 비문은 조선 지식인 사회가 이순신을 도덕적 완성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음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이 묘비는 우리에게 묻는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어떤 책임과 선택으로 공동체를 지켜낼 것인가. 충렬사의 고요함 속에 스며든 물음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요구이며, 헌신과 책임이야말로 시대를 구하는 본질임을 일깨워 준다.
 다가오는 4월 28일은 이순신 탄신 481주년이다. 한 인간의 삶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한 장수의 죽음이 민족의 정신으로 승화된 그날을 우리는 다시 되새긴다. 바다를 향해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던 그의 결연한 의지, 죽음의 순간에도 흔들림 없었던 충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봄빛이 완연한 이 계절, 충렬사의 고즈넉한 뜰에 서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한 이순신의 숨결이 우리 뇌리를 스친다. 그날의 함성 소리는 멎었으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한다.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책임과 헌신, 그리고 흔들림 없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충무(忠武)'의 길임을.
△ 충렬사 묘비(忠烈祠廟碑)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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