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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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895년 영남읍지(嶺南邑誌)가 전하는 남해 이야기
1895년 영남읍지 속 남해는 복합 경제로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견고한 성곽과 봉수망을 구축해 국가를 수호한 해양 국방 요충지
영남읍지 속 남해의 역사는 청렴한 목민관과 신분을 초월해
도덕적 지조를 실천한 민초들이 일구어낸 숭고한 정신문화 결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11월 06일(금) 21:44
▲ 1895년 영남읍지 남해 도입부

1895년에 편찬되어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영남읍지(嶺南邑誌)』(전 34책)는 조선 말기 지방 행정의 실상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대표적 사료이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던 1894년 11월부터 1895년 5월까지 경상도 66개 고을에서 작성한 읍지(邑誌)를 의정부(議政府)가 취합해 편찬한 이 문헌은 단순한 인문 지리서가 아니다. 행정·재정·군사·인구·풍속·물산을 종합적으로 담은 국가 차원의 보고서이자, 조선의 군현(郡縣) 체제가 막을 내리기 직전 편찬된 사실상 마지막 관찬(官撰) 지리지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특히 고을의 연혁과 지리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수입과 지출을 정리한 '읍사례(邑事例)'를 함께 수록해 실질적인 회계 장부의 기능까지 수행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 가운데 「남해(南海)」 편은 근대 행정 체제로 넘어가던 시기, 섬 고을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남해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면서도 왜구(倭寇)를 막는 남해안 방어의 전초기지였으며, 고려 말 공도(空島)정책과 관음포대첩, 노량해전을 거치며 국방의 최전선 역할을 담당했다. 『영남읍지』는 수령의 녹봉과 군사 편제, 환곡(還穀) 운영, 왕실 진상품, 관청의 물품 조달까지 세밀하게 기록하고, 곡물은 석(石)·두(斗)·승(升)·합(合)·석(夕)·리(里) 단위로, 물품은 시가(時價)와 조달 비용까지 구분해 적었다. 이는 조선 말기 지방 행정이 정교한 회계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종 현물 부담과 환곡 이자 등 백성들에게 전가된 제도적 모순도 함께 드러낸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남해의 지리와 행정, 군사, 재정, 풍속의 실상을 일곱 개의 주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영남의 남방 경계와 역사적 변천: 섬 고을의 연혁(沿革)과 풍속(風俗)


남해현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도서(島嶼) 지형으로, 행정적 경계부터 군사적 요충지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895년 『영남읍지』에 따르면 읍치를 기준으로 동쪽 해안까지는 5리, 서쪽 해안까지는 10리, 남쪽 끝까지는 40리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 본토와 마주한 노량진(露梁津)까지는 37리였다.
한양의 대궐이 있는 경도(京都)까지는 무려 1,035리에 달해 남해가 조선의 대표적인 변방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본래 신라 신문왕 대에 전야산군(轉也山郡)으로 역사에 등장한 남해는 경덕왕 대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는 왜구(倭寇)의 침탈이 극심해지면서 주민을 육지로 옮기고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 시행되어 치소(治所)가 진주(晉州) 선천부곡(鐥川部曲)으로 이전되는 실향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조선 세종 19년(1437)에 이르러 현재의 위치에 치소(治所)를 확정하고 독립된 현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남해의 선비들은 고향을 꽃밭과 같다는 뜻의 화전(花田)이라는 우아한 별호(別號)로 부르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1895년 당시 남해현의 행정구역은 현내면(縣內面)을 비롯해 이동면·삼동면·남면·서면·설천면·고현면 등 모두 7개 면(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김(金)·이(李)·박(朴)·최(崔) 씨 등을 중심으로 한 토착 성씨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향촌 사회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영남읍지』는 남해의 풍속에 대해 백성들이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농사와 길쌈을 뜻하는 경직(耕織)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 부지런히 생업에 힘썼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예(武藝)를 익히는 강인한 기풍을 지녔다고 기록했다.
또한 사람들의 성품은 허례허식을 멀리하고 소박함을 뜻하는 고박(古朴)을 숭상했는데, 이는 변방의 거친 자연과 역사를 견디며 형성된 남해 특유의 향풍(鄕風)이었다.



2) 수려한 산천과 풍부한 토산: 금산(錦山)과 망운산(望雲山)이 품은 물산(物産)


남해현(南海縣)은 빼어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독특한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갖춘 고장이었다.
고을의 지형적(地形的) 아름다움과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를 뜻하는 형승(形勝)의 으뜸은 단연 동쪽에 우뚝 솟은 금산(錦山)이었다.
본래 보광산이라 불렸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뒤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으로 지금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금산(錦山)은 영남의 선비들 사이에서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유람 명소였다.
읍성 뒤편에서 진산(鎭山)의 역할을 한 망운산(望雲山)과 봉수대가 설치된 설흘산(雪屹山)과 원산(猿山)도 남해현의 지리적 기반을 이루었다.
특히 금산 일대는 울창한 원시림이 펼쳐져 관아와 수군 기지에서 군함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선재(船材)를 공급하는 황장봉산(黃腸封山)에 준하는 지역으로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처럼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남해현은 다양한 토산과 약재(藥材)의 산지였다.
해산물로는 낙지를 비롯해 문어, 전복, 홍합, 해삼, 민어, 굴 등이 생산되었고, 육지에서는 송이버섯과 활 제작에 필수적인 궁간상(弓幹桑), 비자, 닥나무, 유자(柚) 등이 재배되었다.
다만 주석에는 표고버섯과 멧돼지, 옻나무는 과거에는 산출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갈되거나 매우 드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장기간의 벌채와 채취로 인한 산림 황폐화를 짐작하게 한다.
약재 또한 후박(厚朴), 치자(梔子), 세신(細辛) 등 여러 종이 체계적으로 수납되었으며, 맥문동(麥門冬)은 산천에 지천으로 자생했음에도 알이 작고 약효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석이 남아있다.
이는 지방 관아의 물품 검수 기준이 매우 엄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풍부한 자연과 물산은 백성들에게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실에 올리는 진상(進上)과 각종 공납, 재정 부담을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고, 남해의 풍요는 백성들의 삶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무거운 멍에가 되었다.



3) 남해현 축성과 보루(堡壘): 관방(關防) 체계와 충무공의 호국(護國) 성지


남해현은 지정학적으로 대마도와 일본 본토에서 영남 해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자리해 성곽과 방어 시설을 뜻하는 관방(關防) 체계가 매우 발달한 군사 요충지였다.
고을의 중심인 남해읍성(南海邑城)은 세종 19년에 처음 축조된 견고한 석성(石城)으로, 둘레 2,876척, 높이 13척에 성벽 위의 낮은 담장인 치첩(雉堞)만도 590개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영조 33년(1757) 현령 조세술(趙世述)이 백성을 동원해 더욱 견고하게 중수하였다.
읍성의 외곽에는 평산진(平山鎭)과 미조항진(彌助項鎭)의 석성이 연안을 지키며 중층 방어망을 형성하였다. 선소(船所)에는 지휘선인 전선(戰船) 1척과 병선(兵船) 1척, 사후선(候船) 2척이 상시 대기했고, 주사군(舟師軍) 120명이 편제되어 있었다.
또한 평산포에는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와 수군 150명이, 미조진에는 정3품 수군첨사(水軍僉使)와 정예 수군 150명이 주둔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담당하였다.
반면 곡포보(曲浦堡)와 상주보(尙州堡)는 영조 연간 방어체계가 개편되면서 혁파(革罷)되었고, 이후 군량미를 보관하는 외창(外倉)으로 활용되었다.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통신망 역시 치밀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금산 봉수는 바다 너머 외적의 동향을 가장 먼저 포착해 연기를 올리는 초봉(初烽)의 임무를 맡았으며, 그 신호는 진주 방면과 설흘산·원산 봉수로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특히 설흘산 봉수는 경상도의 군사 정보를 전라도 순천의 돌산(突山) 봉수로 연결하는 광역 통신망의 핵심 거점이었다.
남해현은 또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순절(殉節)한 호국의 성지이기도 했다.
노량 해안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는 장군의 영령을 모셨으며, 조정에서는 매년 봄·가을 중정일(仲丁日)과 기일에 제사를 올렸다.
사당 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충무공비가 세워져 충무공의 충절과 호국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 백성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일깨우는 상징이 되었다.



4) 사회 구성과 인적 자원: 인구구조와 관아 조직의 편제(編制)

 
 1895년 당시 남해현의 총가구 수인 인호는 3,001호였으며, 인구는 남자 9,544명, 여자 8,416명으로 모두 17,960명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성이 여성보다 1,100여 명 이상 많은 뚜렷한 남초(男超) 현상이다. 이는 군사 도서의 특성상 군역(軍役)을 부과하고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정 등 남성 인구를 장부에 누락 없이 파악하여 상시 동원 체제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유교적 교화를 담당하던 향교(鄕校)의 공식 정원인 교생(校生)은 전통 규정에 따라 30명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인구구조를 바탕으로 수령을 보좌하는 향임(鄕任) 조직도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고을 사림의 영수인 좌수(座首) 1명과 별감(別監) 2명이 향청(鄕廳)에 상주했고, 재정을 담당하는 대동도감(大同都監)과 외창도감(外倉都監)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사림의 명망을 바탕으로 천거하는 향망차정(鄕望差定)의 절차를 거쳐 임명되었으며, 육조대장(陸操代將), 주사대장(舟師代將), 병선감관(兵船監官), 군기감관(軍器監官), 봉수별장(烽燧別裝) 등도 각각의 직무를 맡아 행정을 뒷받침하였다.
 말단 행정과 치안 조직도 빈틈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7개 면에는 풍헌(風憲)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민심을 살피고 부역을 감독했으며, 금송도감(禁松都監) 2명은 소나무 벌목을 감시하고 기찰장(譏察將)은 고을을 순찰하였다. 관아의 실무는 향리(鄕吏) 11명, 의생(醫生) 8명, 율생(律生) 11명, 서원(書員) 8명, 나장(羅將) 15명이 담당했다.
 천안(賤案)에는 관노비 38명, 교노비 21명, 충렬사 소속 노비 5명이 등재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인적 기반의 핵심은 군사력이었다. 한양의 통제를 받는 경안부(京案付) 군인이 264명이었던 데 비해, 남해현 장부에 등재된 외안부(外案付) 군인은 무려 1,884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언제든 동원 가능한 향토방위 체제에 편제되어 있었다.



5) 지방 관아의 상세 재정 및 물품 지출 내역
 

 『영남읍지』 남해현 편의 '사례(事例)'는 지방 관아의 수입과 지출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회계 장부로, 조선 후기 지방재정 운영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 관아는 쌀, 콩, 화폐와 각종 현물을 석·두·승·합·석·리 단위까지 세밀하게 계산하여 관리하였다.
 수령의 관수미와 아전들의 녹봉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지급되었고, 밀가루·소고기·술·된장 등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품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달·가공·관리되었다. 특히 우본전 환납 규정은 지방관 교체 때 공금 유출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반면 이러한 재정 운영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겼다.
 달걀과 김, 전복 등 관청 소비 물품은 면 주인이나 특정 지역 주민에게 현물 납부를 의무화하였으며, 상당수는 별도의 예산 지원 없이 조달되었다.
 전복과 유자 같은 남해 특산물은 왕실 진상품으로, 정기적으로 상납 되었고, 운송과 품질 관리의 책임도 지방 관아가 맡았다.
 공방에서는 종이, 방석, 가죽신 등 관청 물품의 조달 기준을 세밀하게 규정하였다. 특히 용문사 승려들에게 백혜를 의무적으로 제작·납부하게 한 사실은 당시 사찰에도 부역이 부과되었음을 보여준다.
 목화 조달은 강제 현물 징수에서 일정 예산으로 시장에서 매입하는 방식으로 일부 개선되었으며, 소가죽 납부 시기와 보상 기준도 마련하여 행정의 합리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대동 부역은 땔나무·숯·풀 등의 납부량과 시기를 조정해 농번기의 부담을 덜도록 하였다. 관아는 담배와 벌꿀 등을 매입해 재정을 확보했고, 왜공어가전리 등 일부 세입은 동래부의 외교 경비와 군포 제도 보완, 수군 지원 등에 활용하였다.
 창고 운영에서는 곡물 보관 과정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일정 비율의 관리 수수료를 징수했으며, 환곡의 이자 상당 부분도 관아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반면 상진창의 구휼 곡물은 중앙 보고와 지방 운영비를 엄격히 구분해 집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재정이 정교한 회계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현물 부담과 환곡 의존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6) 충효열(忠孝烈)과 명관(名官)의 기록: 백성들이 수놓은 유교적 강상(綱常)


 『영남읍지』의 편찬자들은 차가운 재정 장부의 틈새에 고을의 유교적 도덕 질서와 인간의 도리인 강상(綱常)을 지킨 충신·효자·열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명관들의 행적을 수록하였다.
 법률과 세금만으로는 변방 공동체를 다스릴 수 없었기에, 도덕적 감화를 통해 백성들의 자발적 결속을 이끌려는 통치 철학을 담아낸 편집이었다.
 고려시대 남해의 효녀 함부(咸富)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를 형편이 없어 침실에 가빈(家殯)을 하고 다섯 달 동안 상식(上食)의 예를 다했으며, 그 효행으로 고려 성종 대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조선 후기의 선비 고상지(高尙志)는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단지혈(斷指血)로 간병했고, 칠십이 넘어서도 아흔이 넘은 부친을 극진히 봉양해 유림의 귀감이 되었다.
 열녀들의 기록은 전란과 엄격한 윤리가 빚어낸 비극을 보여준다.
 유경택의 아내 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적의 협박에도 절개를 지키다 순절했고, 정병(正兵) 김정려의 아내 정소사(鄭召史)는 남편이 군역 중 세상을 떠나자, 정절을 지키며 생을 마감해 숙종 대에 정문을 세웠다. 사노비 연대(蓮臺)는 재가를 거부하고 남편의 무덤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신분을 넘어선 절의를 남겼다.
 백성을 보살핀 수령들의 치적(治蹟)도 두드러진다.
 현령 남두병(南斗柄)은 형벌보다 교화로 고을을 다스려 도둑이 사라지게 했고, 박천기는 사재를 털어 교육 진흥을 위한 학비를 마련하였다. 소산해(蘇山海), 백세부(白世傅), 안윤복(安允福) 등은 대흉년이 닥치자, 봉록을 내놓고 관아의 비축 물자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여 아사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썼다.
 백성들의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인물은 김호겸(金好謙)이었다.
 당파 싸움에 휘말려 파직되어 고을을 떠날 때 수천 명의 백성이 길을 막고 말고삐를 붙잡으며 통곡했고, 은 100냥을 여비로 바쳤으나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어찌 사사로이 취하겠는가?"라며 사양하였다.
 끝내 백성들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노자 정전으로 쓸 7전(錢)만 받은 채 떠났으며, 이러한 청백리(淸白吏)와 명관들의 헌신은 혹독한 수탈 속에서도 백성들이 국가 공동체를 신뢰하게 하는 마지막 버팀목이 되었다.
 


7) 1895년 남해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1895년 『영남읍지』 남해현 편은 조선왕조가 근대라는 거대한 전환기에 남긴 지방 행정의 마지막 종합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문헌은 남해가 왜구의 침입에 맞서 성곽을 보수하고 봉수망을 정비하며 공동체를 지켜 온 역사와 함께, 관아의 재정과 군사, 인구와 물산, 회계 운영까지 치밀하게 담아냈다.
 참밀가루의 원가 계산, 창고 운영 규정, 왕실 진상품 관리, 환곡 회계 등 세세한 기록은 지방 행정이 일정한 원칙과 절차에 따라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환곡 이자의 관용 전용, 무본전당납(無本錢當納)과 같은 강제 부담은 조선 후기 신분제 사회가 안고 있던 구조적 한계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함께 증언한다.
 『영남읍지』의 가치는 조선 말기를 단순히 혼란과 붕괴의 시대로만 보는 시각을 넘어, 제도의 정교함과 시대적 모순을 함께 읽게 하는 데 있다.
 130여 년 전 남해현의 아전들이 붓끝으로 남긴 숫자와 기록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전한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수록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은 행정의 투명성과 재정의 책임성이며, 제도의 성패는 결국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청렴과 헌신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 준다. 또한 외침과 빈곤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지키고 충(忠)과 효(孝), 공동체의 가치를 이어온 남해 사람들의 발자취는 지역사를 넘어 우리 역사 전체의 소중한 자산이다.
 『영남읍지』 남해현 편은 한 시대의 행정 장부를 넘어, 오늘날 지방자치와 공공행정이 지향해야 할 책임과 신뢰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살아 있는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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