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할아버지와 유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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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5(목) 11:58
[기고] 할아버지와 유자나무
2024년 03월 19일(화) 10:43
 나의 조부께서 살아계셨으면 올해로 135세가 된다. 조부께서 48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거의 반세기가 되어 가지만 지금도 흰 바지 저고리 입은 모습이 선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지금의 내가 조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의 나이가 다 되어가지만 조부모가 그리운 것은 맏손자인 내게 가장 정을 많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갔다 돌아올 때쯤이면 유리조차 붙인 문구멍에 눈을 대시고 기다렸다가 언 손을 잡아 화롯불에 쬐어주던 할아버지..... 그런 사랑을 가장 많이 입은 수혜자가 지금의 나였다.
 그 때 나이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내 조부모는 문맹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교육열이 강했다. 자기의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간이학교(2년제 단기학교)만 보내고 작은 아들은 공부를 더 시키려고 했지만 학교 가기를 싫어해서 공부를 못 시켰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조부가 교육열이 강했던 것은 양복입고 출퇴근하는 아들 하나를 두고 싶어서였다고 하는데 자식 교육에 실패한 조부가 손자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조부모와 부모가 열심히 일하고 아껴서 논밭은 조금 마련했지만 살림이 팍팍해서 초등학교(초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가족들의 대단한 각오와 희생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부의 결단으로 손자 학교 보내기 총력전에 들어갔고 그 때 일등공신이 우리집 마당 한 켠에 서 있던 유자나무였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나무는 우리집의 상징이었고 '유자나무집'하면 우리집으로 통했고 톡톡한 부수입의 원천이었다. 그 유자나무는 우리집에서 머슴을 살던 분에게서 하나를 얻어서 심었는데 통째로 심은 유자에서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새끼나무를 3개만 남기고 뽑아내고 키웠고, 자람에 따라 밖으로 휘어서 키워 마치 큰 병풍을 둥글게 둘러친 것처럼 보였다. 한창 유자를 수확할 때는 5~6m되는 나무에서 600~700개의 유자를 수확했고 파란 나뭇잎사이에 노랗게 주렁주렁 달려 있는 유자나무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유자를 수확할 때는 속이 비어 있는 나무 사이에 몽둥이를 묶고 사타리를 걸치고 울라가서 땄다.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저 할배(할아버지) 꾀가 싹허다(기발하다)"고 했다. 나무가 자라서 유자를 딸 때까지를 예상하고 나무를 키웠기 때문이다. 그 때는 유자가 귀해서 익기도 전에 유자 장수들이 선금을 걸었고 시제를 모실 때 필수 과일이었다. 가울에 유자장수가 오면 아버지가 땄는데 연세가 들어감에 따라 내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유자장수가 부탁한만큼의 유자를 따가지고 내려오면 장수가 수판을 꺼내서 값을 계산했는데 조부는 몇 번 중얼중얼해서 계산을 해내었다. 뒤늦게 계산한 장수가 깜작 놀랐다. 머리가 허여 노인이 구구셈으로 계산을 해 내니 탄복을 했다. 가끔은 부친이 요샛말로'삥땅'을 했다. 유자를 딸 때 조부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작은 대바구니를 올려주면서 눈을 깜박하면 내가 금방 알아차리고 20~30를 따서 나무위에 걸어놓았다가 조부가 안 계실 때에 내려와서 팔았다. 부자가 작당을 해서 삥땅하는 것이고 나도 몇푼을 얻어 과자를 사먹을 수 있었고, 아랫방 식구의 용돈에 보태썼다. 살림살이를 쥐고 있던 조부는 그 돈을 주먹만한 쇠통(자물쇠)이 달린 궤(나무상자)에 넣어두고 살림에 썼고 내 공납금으로 많이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자나무는 나의 장학나무였다. 나중에 조부가 살림을 부친에게 물려줄 때도 유자나무만은 내 소유로 해 달라고 아들에게 양해를 얻었고 팔아서 쓰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 조부께서 내가 공무원 생활로 월급을 탈 때까지 살아계셨지만 그 때만해도 월급이 적고 철이 없어 토요일에 집에 갈 때 사탕을 사드린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조부모의 손자에 대한 태산같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사람은 항상 지내놓고 후회를 하는가 보다. 그런 조부모가 환생하여 한 달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하지 못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하고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보고 싶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고 희망사항이지만...
 지금도 조부모의 방에 들어가면 두분의 체취와 온기가 느껴지고 아침 일찍 일어나 식구를 깨운다고 헛기침하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내가 조부모의 소원을 한 가지 풀어드렸다면 평생 한복만 입으셨던 분이 그렇게 간절히 소원하던 양복 입은 손자의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흐뭇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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