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읍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군의 공격으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다
15세기 중반 이미 상당 규모로 축조 왜란의 충격 후 조선후기 복원 역사 '간직'
남해미래신문
2025년 09월 26일(금)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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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성(南海邑城)은 세종 21년(1439)에 축조된 이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란을 겪고, 이후 재건과 중수를 거치며 조선 후기까지 남해안 국방과 지방행정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한 성곽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문종실록(文宗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읍지(邑誌), 고지도(古地圖), 개인 문집 등에는 축성의 연혁, 구조적 특징, 성내 생활상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남해읍성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조선시대 읍성은 군현 단위의 정치·행정 중심지이자 주민 생활을 지키는 방어 시설이었다. 그중에서도 남해읍성은 해상 방어의 요충지로서 군사적 기능과 더불어 지역사회의 일상과 경제를 포괄한 복합 공간이었다.
『영남읍지(嶺南邑誌)』 등 사료에는 성곽의 규모와 배치, 성내 수원(水源), 장시(場市) 운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본 글은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남해읍성의 역사적 의미를 '① 축성의 기원과 연혁 ② 성곽의 규모와 물리적 수치 ③ 전란과 재건 ④ 성내 생활과 지역 경제 ⑤ 남해읍성, 조선시대 역사 유산과 오늘의 의미'의 다섯 주제로 남해읍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 축성(築城)의 기원과 연혁
남해 지역의 방호는 세종 원년(1418)에 이미 목책(木柵, 나무 울타리) 설치 권고에서 시작된다. 원문은 「二島(南海,巨濟)之地, 膏映加耕宜置木柵, 以庇農民上從之, 仍命待豊年設木柵(이도(남해, 거제) 지지, 고영가경 의치목책, 이비농민 상종지, 잉명대풍년 설목책)」으로, '남해와 거제는 토지가 비옥해 농사에 적합하니, 목책을 세워 농민을 보호하는 것이 좋다. 임금은 이를 받아들여 풍년이 들면 울타리를 설치하라 명하였다'라는 의미이다.
세종 2년(1420) 윤1월에는 「遂命三島(南海,巨濟,昌善)中田多處作木柵 或築土城…夜則入城固守(수이명 삼도(남해, 거제, 창선) 중전다처 작목책 혹축토성 … 야즉입성 고수)」라 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성으로 피난하는 이중적 방어체계를 보여준다. 이어 세종 21년(1439) 「慶尙道, 長髻·迎日·南海·金海築城(경상도, 장계·영일·남해·김해 축성)」의 기사는 남해읍성의 본격적인 축성을 알린다. 이후 태종과 세조 대의 보수 기록과 함께 문헌에는 축성, 이축, 중수의 반복이 확인되며, 이는 중앙과 지방이 협력한 조선 전기의 토목 정책을 잘 보여준다.
축성 연혁에서 중요한 점은 특정 연대로 단정할 수 없는 '누적성'이다. 초기 목책(木柵)과 토성(土城)에서 석축(石築)으로의 발전, 이축(移築)과 성문(城門) 배치의 변화는 지속적인 위협과 행정 수요에 따른 결과였다. 각 시기 관료의 명령과 동원 기록, 향리·향민의 기여는 축성이 단순한 방어 행위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성격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특히 세조 이후 강화된 지방 축성 정책과 15세기 중반의 대대적 정비는 남해가 단순한 어촌을 넘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입증한다.
▲ 성곽(城郭)의 규모와 물리적 수치
『문종실록(文宗實錄)』 9권, 문종 1년(1450) 9월 5일 경자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南海縣邑城, 周回二千八百六尺, 高十二尺, 女墻高三尺, 敵臺十三, 門三有擁城, 女墻五百五十三, 城內泉三, 小渠一, 海子周回三千三十七尺(남해현 읍성, 주회 이천팔백육척, 고 십이척, 여장 고 삼척, 적대 십삼, 문 삼 유옹성, 여장 오백오십삼, 성내 천 삼, 소거 일, 해자 주회 삼천삼십칠척)"」 이를 풀면 "남해현 읍성의 둘레는 2,806척(약 854m), 성벽의 높이는 12척(약 3.6m)이며, 여장(女墻) 높이는 3척(약 90cm)이었다. 성 위에는 적대(敵臺)가 13곳, 성문이 3곳 있었으며 각각 옹성(擁城)을 갖추었다. 여장의 수는 553개이고, 성내(城內)에는 샘 3곳과 도랑 1곳이 있었으며, 성 외곽에는 해자가 둘려 그 둘레가 3,037척(약 926m)이었다."라는 의미이다. 이 기사는 15세기 중반 남해읍성이 이미 상당한 규모로 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토성(土城)이 아니라 돌로 쌓은 석축(石築) 성곽에 여장과 적대를 갖춘 체계적 방어 구조였다. 또한 성내에 샘과 도랑이 있었다는 기록은 장기 방어 상황에서도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을 시사한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영남읍지』(1871)는 남해읍성의 구체적 모습을 다시 기록한다.
「"城池縣城石築 周二千八百九十尺 高十三尺 女墻五百九十 擁城十八 有南北東西門 內有井一泉五 四時不渴(성지 현성 석축, 주 이천팔백구십척, 고 십삼척, 여장 오백구십, 옹성 십팔, 유 남북동서문, 내유 정일, 천오, 사시불갈아"」 이는 "남해현의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2,890척(약 867m), 높이가 13척(약 3.9m)이다. 여장은 590개, 옹성은 18개소였고, 성문은 남·북·동·서 네 곳에 있었다. 성내에는 우물 1곳과 샘 5곳이 있어 사계절 내내 물 부족이 없었다."라는 뜻이다.
『문종실록』과 『영남읍지』의 비교는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성문의 수가 3개에서 4개로 늘어나 교통과 교류가 활발해졌고, 옹성은 13개에서 18개로 늘어나 방어력이 강화되었다. 수원도 샘 3곳에서 우물 1곳과 샘 5곳으로 다양화되어 성내 거주민과 장시 이용객을 고려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영남읍지』의 "사시불갈(四時不渴)"라는 표현은 남해읍성이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주민 생활의 안정적 기반을 담보한 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해동지도』, 『대동지지』 등은 공통으로 둘레 2,876척, 높이 13척, 우물 1기, 샘 5기, 여장 590기, 옹성 18개를 기록한다. 특히 "사시불갈(四時不乾)"이라는 표현처럼 성내 샘물이 사시사철 마르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은, 섬이라는 지리적 제약 속에서 수원 확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남해읍지』(1786년)는 왜란으로 파괴된 읍성이 다시 중수되었음을 강조하며, 영조 33년(1757) 현령 조세술(趙世述)이 성곽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완전히 새로 쌓은 것처럼 단단하였다"라고 전한다. 읍성 내에는 동헌, 객사, 향청, 군창, 수창 등 관청과 창고 시설이 밀집해 있어, 남해읍성이 행정·재정·군사 기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했음을 드러낸다.
▲ 전란과 재건, 임진·정유의 충격과 조선 후기의 복원
남해읍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군의 공격으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다. 『남해읍지』(1786년)는 당시 읍성이 허물어진 상황을 전하며, 국가가 안정을 되찾은 뒤 재건이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초반 재정비된 읍성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확장·보수되었고, 영조 대의 중수(重修)를 통해 조선 후기 남해 방어체계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성문의 수가 『문종실록』에서 3개였던 것과 달리 『영남읍지』에서는 동·서·남·북 4개로 늘어나 교통과 외부 교류의 기능이 강화되었으며, 옹성도 13개에서 18개로 보강되어 방어력이 한층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남해읍성은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주민 생활과 지역 경제, 공동체 결속을 담보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남해읍지(南海邑誌)』는 왜군에 의한 파괴와 난리 평정 후의 재축·중수 과정을 전하며, 17세기 초 재정비와 1757년(英祖 33) 현령 조세술(趙世述)의 대대적 중수를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재축·중수는 단순 복원이 아니라, 방어 전략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재설계'에 가까웠다.
예컨대 성문 수 증감, 옹성·여장 수 변화, 우물·샘 보강 등은 전시 대응능력과 평시 생활의 균형을 고려한 조치였다. 또한 지방재정 상황, 부역·징발 제도의 변화, 인력 동원의 양상은 복원 사업의 규모와 성격을 결정하였다. 19세기 근대화와 토지제도 재편, 20세기 초 근대적 지적원도 작성은 성곽 일부를 농지와 도로로 전환시키며 현재의 잔존 상태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남해읍성의 변천을 기록에서 추적하는 일은 단순한 연대기적 복원이 아니라, 지방 사회의 회복력과 정치적 재구성 과정을 이해하게 한다. 성곽의 축성과 중수는 주민의 생계·조직·정체성과 직결되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타협·협력의 양상은 오늘날 지역사 연구의 중요한 분석 대상이다.
▲ 성내(城內) 생활과 지역 경제
남해읍성은 군사적 요새이자 행정과 경제의 중심이었다. 성내에는 객사(客舍), 아사(衙舍), 창고(倉庫), 군영(郡營) 등 관아 건물이 집중되었고, 창고는 곡창(穀倉), 군창(軍倉), 조선(漕船)과 연계되어 조세와 군수 체계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성곽이 곧 권력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시(場市)는 성내(城內)에서 정기적으로 열려 생산자와 상인이 만나 교역이 이루어지는 핵심 경제 활동의 장이었다. 문헌(1786년 남해읍지)은 장시(場市, 5일 장, 4일과 9일)가 열렸음을 전하는데, 이는 지역 생산물과 해상 교역품이 교차하는 시기적 규칙성을 반영한다. 남해의 풍부한 어장과 해상로는 어물·소금·해조류 유통을 촉진하였고, 성내(城內) 수원은 이러한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남해읍성은 사회적·문화적 공론장의 기능도 했다. 장시와 관아 앞 광장에서는 소식 교환, 분쟁 중재, 의례와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관아는 지방 통치·사법·교육의 중심이었다. 성곽 유지와 중수에 주민이 참여한 기록은 공동체 조직력과 중앙-지방 관계를 보여주며, 축성과 보수는 공동체 규범과 권력 구조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해읍성의 생활상은 군사·행정·경제가 교차하는 복합 구조였다. 성곽 위 여장과 적대는 외부 침입에 대비한 방어 장치였지만, 성내에서는 주민들이 장시를 열고 생활을 이어갔다. 객사와 아사에서는 행정과 외교가 이루어졌고, 창고에는 세곡과 군량이 보관되었다. 주민들은 우물과 샘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였다. 남해읍성의 사례는 지방 읍성이 지닌 이중적 성격, 즉 방어와 생활의 공존을 잘 드러낸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왜구 방비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남해읍성은 군사적 요새이자 주민 자립적 생활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 남해읍성, 조선시대 역사 유산과 오늘의 의미
남해읍성은 단순히 남해군만의 유적이 아니라, 국가적·지역적 차원에서 연구와 보존, 활용이 절실하며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이에 지자체, 주민, 학계, 문화재 당국이 협력하여 구체적 실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작은 시굴 하나, 투명한 데이터 한 줄, 주민 참여 전시 하나가 모여 남해읍성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현재로 되살릴 수 있다.
본 글은 『세종실록』, 『문종실록』, 『성종실록』과 각종 읍지, 고지도 자료를 비교·검토해 작성했다. 남해읍성은 조선시대 남해현의 정치·군사 중심이자 주민 생활의 핵심 공간으로, 『문종실록』과 『영남읍지』는 성곽 규모, 구조, 성내 수원과 장시 운영 등 생활상을 상세히 전한다. 이는 남해읍성이 단순 방어 시설이 아닌, 지역 공동체를 담보한 복합 공간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또한 남해읍성은 조선 성곽사뿐 아니라 지역 생활사 연구에서도 핵심 사례로 평가되며, 오늘날에도 매우 높은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비록 남해읍성터가 현재 남해군청의 신청사로 새로 지어지고 있지만, 새 청사 내에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남해읍성의 축소 모형이라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해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역사의 숨결을 가까이서 마주하길 바라며,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그 시절의 울림을 가슴 깊이 품었으면 한다. 옛 선현들의 삶이 깃든 남해읍성의 모습이,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함께 숨쉬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