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배움인가 - 고산 윤선도가 오늘날 교실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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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9(금) 11:49
무엇을 위한 배움인가 - 고산 윤선도가 오늘날 교실에 던지는 질문

·윤선도는 반복된 유배와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 성찰을
실천으로 이어가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조선 중기의 실천적 지식인이자 교육자였다.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인간 내면을 기르는 그의 삶과 교육 철학은,
성취 중심의 오늘날 교육에 성찰과 인간다움이라는 본질적 방향을 다시 묻는다.

2026년 01월 09일(금) 11:16
최 성 기 前) 남해해성고·창선고 교장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 그리고 유배지에서 시(詩)를 읊은 시인으로 기억되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는 1587년 서울 동부 연화방(蓮花坊, 오늘날 종로구 연지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삶은 단순히 자연과 벗하며 은둔한 문인의 모습에만 머물지 않았다. 정치적 격랑 속에서 여러 차례 유배를 겪으며 시대와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사색, 창작을 통해 깊은 교육적 통찰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고산 윤선도를 단순히 인물사나 문학적 유산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식인의 태도와 교육 철학을 교육적 성찰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광해군(光海君) 시절 벼슬에 올라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권력자와 맞섰고, 그로 인해 네 차례에 걸쳐 유배를 당했다.



그는 1616년 함경도 경원, 1617년 부산 기장, 1638년 경북 영덕, 그리고 1659년 함경도 삼수에서 각각 유배 생활을 했다. 관직보다는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자기 성찰의 길을 걸었으며, 강직한 성품과 정의감으로 부조리한 권력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쫓기고 갇히는 삶을 감내해야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학문과 예술, 교육 면에서는 깊은 성취를 이룬 시기였다.



그의 삶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시대를 통찰한 사상가이자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인조의 청나라 항복 이후 이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윤선도는 관직을 버리고 은거할 결심을 하였다. 제주로 은거하러 가던 길에 전남 보길도(甫吉島)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그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樂書齋)를 세워 시와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보길도 생활은 유배지가 아니라 귀향 후 자발적으로 은거한 곳으로, 학문과 예술의 터전이 되어 문학적 절정기를 이룬 시기였다. 그는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등 자연과 철학, 예술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조성하고,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후손과 지역 청년들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고 교유하였다. 이 시기에 완성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단순한 계절의 묘사를 넘어,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삶의 이치와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성찰하는 문학작품으로, 그가 꿈꾼 이상향(理想鄕)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윤선도는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무엇보다 삶을 실천하는 교육자였다. 그는 인간 내면을 가꾸는 교육을 중시하며, 시를 통해 그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전하고자 했다.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修辭)대신 담백(淡白)하고 절제된 언어로 진실을 담아내며, 독자에게 깊은 성찰의 여지를 남겼다. 이는 오늘날 교육에서 강조하는 '비판적 사고'와 '성찰'이라는 핵심 역량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시로 가르치고, 가르침으로 시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고산(孤山)은 학문에 몰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 교육에도 큰 가치를 두었다. 유학자 가문의 전통을 이어 증손자 윤두서(尹斗緖, 1668~1715)에게 철저한 교육을 펼쳤으며, 이는 단순한 성리학적 교리 주입을 넘어 예술, 자연, 철학이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 교육이었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화家)로 성장했고, 그의 작품 세계에는 고산이 심어준 예술적(藝術的) 감성과 깊은 내면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고산의 교육은 성과를 위한 수단이 아닌, 사람을 길러내는 참된 교육이었다.



그는 시대와 불화(不和)하면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학문과 문학, 교육으로 이어갔다. 그의 삶은 시대적 불운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불운을 지식과 사유, 자연과의 교감으로 승화시켜 진정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생애는 오늘날 교육이 종종 간과하는 인문학적(人文學的) 성찰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며, 배움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오늘날 교육은 여전히 성취 지향적이고 결과 중심적이다. 시험과 평가, 수치화된 성적 속에서 인간다운 교육은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甫吉島) 생활은 '느리지만 깊은 교육'의 모델처럼 다가온다. 보길도는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을 위한 공부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자연과 함께 깊이 사유(思惟)하고, 시를 읊으며, 자신과 타인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보길도의 진정한 의미다.



우리는 윤선도의 생애를 따라가며 오늘날 교실에 묻는다. 진정한 학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교육은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제도와 경쟁, 효율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고산은 단순한 답 대신 질문 자체를 몸소 살아냈다. 그에게 유배지(流配地)는 고통이 아니라 배움의 공간이었고, 정치는 곧 교육의 문제이자 인간을 바라보는 거울이었다. 오늘날의 교실도 그런 질문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



고산 윤선도는 완전한 인물도, 시대를 초월한 성인(聖人)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가 허락한 방식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자신만의 교육 철학을 실천했다. 유배지에서의 독서와 시 짓기, 제자들과의 대화, 자연과의 교감은 오늘날 학교가 잃어버린 교육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고산(孤山)의 보길도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교육의 섬'으로 읽혀야 한다.



고산 윤선도의 삶은 단절보다 연속, 비판보다 성찰, 흠결보다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은 오늘날 교실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산의 삶을 다시 읽고, 그의 교육적 흔적을 새롭게 조명해 가르쳐야 한다. 시대가 변해도 진정한 교육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임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그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본질과 방향을 조용히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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