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의 길을 실천한 소재(疏齋) 이이명의 삶은 오늘날 교육이 지향해야 할 '사람됨' 가치를 다시 일깨워준다.
학문과 신념, 실천과 책임을 삶으로 보여준 이이명의 생애를 통해 지식보다 먼저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본질을 되새긴다
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04일(금)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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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정치적 격랑 속에서 세 차례 유배를 겪으면서도 굳건한 학문과 신념을 지킨 인물이 있다. 바로 소재(疏齋) 이이명(1658~1722) 선생이다. 그의 삶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굴곡진 여정을 넘어,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지조를 지켜낸 한 선비의 삶으로서 오늘날 교육 현장에 깊은 성찰과 교훈을 던진다.
한성부(현 서울)에서 태어난 이이명은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 이민적(李敏迪)의 학식과 절의를 본받으며 성장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문장력과 인품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병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조정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여러 차례 시련을 맞았으며, 세 번의 유배를 피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유배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였다.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된 그는 1692년 남해(南海)로 이배되었다. 두 번째는 형 이사명(李師命)의 억울함을 변론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공주(公州)로 유배된 일이었다. 이후 사면되어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정치적 갈등은 그를 또다시 시련으로 몰아넣었다. 세 번째는 1721년(경종 1)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둘러싼 정쟁 속에 또 한번 남해로 이배된 경우였다. 이듬해 신임사화에 휘말린 이이명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사되었다. 이처럼 그는 세 차례의 유배 중 두 번을 남해에서 보냈으나, 적소(謫所)에서도 깊은 사색과 성찰을 이어가며 선비로서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적소(謫所)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문집 『소재집(疏齋集)』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며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선비의 삶과 고뇌가 담겨 있다.
특히 『전산촬요(典算撮要)』에서는 회계와 재정 행정에 대한 실무적 관심과 관료로서의 책임감을 엿볼 수 있으며,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에서는 조선의 영토와 지리에 대한 깊은 식견과 국가에 대한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다. 그는 학문을 공허한 말 잔치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을 바로잡고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는 실천적 지식으로 삼고자 했다. 이이명은 평소 청렴한 관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병조판서 재임 시절에는 주로 상민과 하층민에게 부과되던 군포(軍布)를 사대부에게도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재정과 병역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왔고,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의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정의를 향한 실천이 때로 외롭고 험난할 수 있음을 그의 삶은 보여준다.
오늘날 교육에서도 이러한 실천적 용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정의와 공동체 의식, 책임 있는 시민성을 길러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 경쟁과 성적 중심의 현실에서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이명의 생애는 우리에게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게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교육의 가치일 것이다. 이이명의 장인(丈人)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선생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기에 남해 유배라는 시련을 겪었지만, 남해라는 공간과 유배의 경험은 두 사람의 삶을 잇는 특별한 인연이 되었다. 김만중이 사랑했던 매화와 관련하여 이이명은 「매부(梅賦)」를 남겼다. 이 작품은 단순한 글을 넘어 꺾이지 않는 절개와 인내,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생명력과 회복을 상징한다.
남해에 두 차례 유배되었던 이이명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남해 유림은 훗날 봉천사(鳳川祠)를 세우고 그의 영정을 모셔 제향하였다. 그의 삶과 「매부」에 담긴 의미는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하다. 실패와 좌절을 겪는 학생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위로와 용기를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금기시하기보다, 시련을 딛고 성장하는 회복탄력성과 인내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그는 외교 사절로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임금의 부고(訃告)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과 역할을 살피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육이 세계시민 의식과 넓은 시야를 강조하듯, 이이명의 삶에서도 국내 현실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계와 시대를 바라보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충(忠)'은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충성과 헌신을, '문(文)'은 학문과 글을 통해 드러난 인격과 품격을 상징한다. 충문이라는 두 글자에는 한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삶과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입시제도와 학력주의, 교육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 바탕이 되는 사람됨과 인성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기 쉽다. 이이명의 삶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하나의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고자 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교육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재 이이명의 삶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곤경 속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뜻을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교육 역시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교육이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는 잃지 말아야 한다.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삶과 지혜에서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소재 이이명의 생애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군자의 길을 지키려는 마음, 학인으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자세, 그리고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자의 정신은 시대를 넘어 이어져야 할 가치이다. 교육은 결국 사람을 길러내고, 그 사람이 다시 시대와 사회를 만들어간다. 소재 이이명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한 선현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교육은 다시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답은 지식을 넘어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람을 바르게 세우고, 그 사람이 자신의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소재 이이명의 삶은 오늘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그 오래된 물음을 다시 던지고 있다.
한성부(현 서울)에서 태어난 이이명은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 이민적(李敏迪)의 학식과 절의를 본받으며 성장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문장력과 인품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병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조정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여러 차례 시련을 맞았으며, 세 번의 유배를 피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유배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였다.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된 그는 1692년 남해(南海)로 이배되었다. 두 번째는 형 이사명(李師命)의 억울함을 변론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공주(公州)로 유배된 일이었다. 이후 사면되어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정치적 갈등은 그를 또다시 시련으로 몰아넣었다. 세 번째는 1721년(경종 1)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둘러싼 정쟁 속에 또 한번 남해로 이배된 경우였다. 이듬해 신임사화에 휘말린 이이명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사되었다. 이처럼 그는 세 차례의 유배 중 두 번을 남해에서 보냈으나, 적소(謫所)에서도 깊은 사색과 성찰을 이어가며 선비로서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적소(謫所)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문집 『소재집(疏齋集)』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며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선비의 삶과 고뇌가 담겨 있다.
특히 『전산촬요(典算撮要)』에서는 회계와 재정 행정에 대한 실무적 관심과 관료로서의 책임감을 엿볼 수 있으며,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에서는 조선의 영토와 지리에 대한 깊은 식견과 국가에 대한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다. 그는 학문을 공허한 말 잔치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을 바로잡고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는 실천적 지식으로 삼고자 했다. 이이명은 평소 청렴한 관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병조판서 재임 시절에는 주로 상민과 하층민에게 부과되던 군포(軍布)를 사대부에게도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재정과 병역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왔고,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의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정의를 향한 실천이 때로 외롭고 험난할 수 있음을 그의 삶은 보여준다.
오늘날 교육에서도 이러한 실천적 용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정의와 공동체 의식, 책임 있는 시민성을 길러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 경쟁과 성적 중심의 현실에서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이명의 생애는 우리에게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게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교육의 가치일 것이다. 이이명의 장인(丈人)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선생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기에 남해 유배라는 시련을 겪었지만, 남해라는 공간과 유배의 경험은 두 사람의 삶을 잇는 특별한 인연이 되었다. 김만중이 사랑했던 매화와 관련하여 이이명은 「매부(梅賦)」를 남겼다. 이 작품은 단순한 글을 넘어 꺾이지 않는 절개와 인내,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생명력과 회복을 상징한다.
남해에 두 차례 유배되었던 이이명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남해 유림은 훗날 봉천사(鳳川祠)를 세우고 그의 영정을 모셔 제향하였다. 그의 삶과 「매부」에 담긴 의미는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하다. 실패와 좌절을 겪는 학생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위로와 용기를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금기시하기보다, 시련을 딛고 성장하는 회복탄력성과 인내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그는 외교 사절로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임금의 부고(訃告)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과 역할을 살피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육이 세계시민 의식과 넓은 시야를 강조하듯, 이이명의 삶에서도 국내 현실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계와 시대를 바라보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충(忠)'은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충성과 헌신을, '문(文)'은 학문과 글을 통해 드러난 인격과 품격을 상징한다. 충문이라는 두 글자에는 한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삶과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입시제도와 학력주의, 교육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 바탕이 되는 사람됨과 인성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기 쉽다. 이이명의 삶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하나의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고자 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교육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재 이이명의 삶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곤경 속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뜻을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교육 역시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교육이 지향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는 잃지 말아야 한다.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삶과 지혜에서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소재 이이명의 생애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군자의 길을 지키려는 마음, 학인으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자세, 그리고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자의 정신은 시대를 넘어 이어져야 할 가치이다. 교육은 결국 사람을 길러내고, 그 사람이 다시 시대와 사회를 만들어간다. 소재 이이명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한 선현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교육은 다시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답은 지식을 넘어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람을 바르게 세우고, 그 사람이 자신의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소재 이이명의 삶은 오늘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그 오래된 물음을 다시 던지고 있다.

2026.09.04(금) 21: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