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남해현읍지』재정(財政)기록으로 본 남해의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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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남해현읍지』재정(財政)기록으로 본 남해의 조세

1895년 『남해현읍지』 재정기록은 당시 시장가격인 시가(時價)를 정밀하게 반영,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던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의 합리성과 개혁 의지를 보여준다
1895년 재정기록은 가혹한 조달과 진상(進上)의 부담 속에서도 외교 기금의
이자를 활용해 세금을 감면하는 등 백성의 생계를 고려한 재정운용을 보여준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8월 28일(금) 16:58
▲ 1895년 『영남읍지』 「남해현」 지도

역사(歷史)의 거대한 흐름은 흔히 왕조의 교체나 영웅들의 결단, 전장을 누빈 장군들의 활약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한 시대를 살아간 민초(民草)들의 삶과 이를 뒷받침한 지방 행정의 실상은 오히려 먼지 쌓인 행정문서와 재정 장부 속에 더욱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고종 32년(1895) 편찬 『영남읍지(嶺南邑誌)』 「남해읍지(南海邑誌)」는 단순한 지방 읍지를 넘어 조선 말기 남해현(南海縣)의 재정 운영과 군사 체계, 주민들의 경제 활동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관청십이삭입(官廳十二朔入)」, 「공방십이삭입(工房十二朔入)」, 「무역소십이삭입(貿易所十二朔入)」을 비롯해 공례방(公禮房), 수병방(水兵房), 대동창(大同倉)에 수록된 세부 명세는 남해현이 한 해 동안 어떤 물자를 확보하고, 이를 각 관청과 군사 조직 운영에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읍지 속에 축적된 수많은 숫자는 단순한 회계 수치가 아니라, 조세를 부담했던 농민과 어민, 그리고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향리와 관원들의 삶이 녹아있는 지방 사회의 생생한 흔적이다.
특히 이 기록이 작성된 1895년은 갑오·을미개혁(甲午·乙未改革)을 통해 조선의 정치·사회·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오랜 세월 지속된 신분제가 폐지되고 중앙과 지방 행정 조직이 근대적 체제로 개편되면서 조세제도 역시 현물 중심에서 화폐 납부를 바탕으로 하는 금납화(金納化)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해읍지」의 재정 항목은 단순한 수입과 지출 내역을 넘어, 전통적인 지방 행정 체계가 근대적 제도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자료이다.
중앙에서 추진된 개혁의 흐름이 남해라는 해양 지역의 행정 현장과 주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실행되었는지를 구체적인 물목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조선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모습을 지역의 시선으로 밝혀주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1) 관청십이삭입(官廳十二朔入), 숫자로 읽는 조선 후기 남해현의 살림


지방 행정의 중심 기관인 관청의 12개월 세입·세출 내역을 기록한 '관청십이삭입(官廳十二朔入)'은 남해현 재정 구조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항목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정해진 세액을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시장 가격인 종시가(從時價)를 반영하여 재정 지출을 조정했다는 점이다.
수령과 관청 운영에 필요한 기본 경비인 원관수미(元官需米)는 매월 18석 1두 2승 5합이라는 세밀한 단위로 산정되었으며, 기록에는 "원관수미는 당시 시가를 따라 매월 18석 1두 2승 5합을 지출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지방재정이 중앙의 규정만을 따르는 고정적 체계가 아니라, 지역 시장의 변화와 물가 상황을 반영하며 조정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향리의 녹봉에 해당하는 아록미(衙錄米) 역시 "매월 12두 3승 6합 6석 6리"까지 세분하여 지급한 사실은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의 회계 관리 수준을 잘 보여준다.
관청 소유 토지인 둔전(屯田)의 관리 방식에서는 재정 원칙과 민생 배려가 함께 작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관청은 49두락의 둔답(屯畓)에서 1두락당 벼 1석을 거두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껍질과 쭉정이가 많은 피면(皮面)에 대해서는 예멸(例滅)을 적용하여 관례적으로 2석을 감액하였다.
더 나아가 재해나 흉년으로 백성들의 정소(呈訴)가 받아들여지면 정해진 세액을 고수하지 않고, 실제 감면된 수량에 따라 월별 부담을 조정하는 종수배삭(從數排朔)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이는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의 현실적 어려움을 반영한 행정적 완충 장치였다.
결국 '관청십이삭입'은 조선 후기 지방재정이 단순한 수취 체계가 아니라, 시장의 흐름과 백성의 형편을 함께 고려했던 합리적 행정 시스템이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2) 토산물 장부가 말하는 조선 후기 남해의 살림살이


남해현 관청의 장부에는 곡물뿐만 아니라 계란, 버섯, 소금, 과일 등 다양한 토산물의 확보 방식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물목의 수취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이 시장 가격과 현물 경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어떤 부담을 감당했는지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간 2,520개에 이르는 계란(鷄卵)이다. 기록에는 "계란 2,520개는 2개당 가격이 1분이며, 면주인이 밑천 없이 의무로 납부하고 매월 210개를 수납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일정한 가격 기준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조달 비용은 별도로 지급하지 않고 면주인(面主人, 면 행정 담당자)에게 납부 책임을 맡긴 방식이었다.
이러한 무본전당납(無本錢當納)은 관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대신 지역 실무자와 주민에게 경제적 책임이 집중되는 현물 수취 방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 확보가 어렵거나 전문 생산이 필요한 물품은 관청이 일정한 밑천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조달하였다.
연간 12두를 수납한 표고버섯은 "표고버섯 12두는 말당 본전 소금 2두로 바꾸어 오게 하며, 수별과 창고자가 밑천을 받아 책임지고 납부하고 매월 1두를 수납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염(本鹽)을 지급해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도록 한 뒤 수별(穗別)과 창고자(倉庫子)가 관리 책임을 맡는 수본당납(受本當納) 방식이었다.
또한 소금(鹽)은 염부처(鹽釜處)에 밑천을 제공하고 봄과 가을에 거두는 춘추수봉(春秋收捧) 체계로 운영되었으며, 일부는 향청(鄕廳)과 향교(鄕校)에 관례적으로 지급되었다.
이처럼 남해현의 토산물 조달은 주민 부담에 의존하는 방식과 관청의 재정 지원을 통한 방식이 병존하는 구조였으며, 이는 조선 후기 지방재정이 지닌 현실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록이다.

▲ 1895년 『영남읍지』 「남해현」 조세(租稅) 항목
▲ 1895년 『영남읍지』 「남해현」 조세(租稅) 항목


3) 1895년 「남해읍지」가 기록한 지방재정 운영의 변화


군수품 제작과 청사 보수를 담당했던 공방의 12개월 생산 명세인 '공방십이삭입(工房十二朔入)'은 단순한 물품 조달 목록을 넘어, 남해 지역 지방재정 운영의 변화와 제도 개선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특히 연간 300근을 조달해야 했던 목화(木花), 즉 면화 항목은 당시 조달 방식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장부에는 "목화 300근은 10근당 가격이 1량이다. 이전에는 백성들의 결세로 거두어 폐단이 적지 않았는데, 관원 이신우와 최경 등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관청 안에서 본전을 마련하여 권농에게 나누어 주고 구매하여 수납하게 하였다(木花 三百斤 十斤價一兩… 前此以民結捧用 其弊不些 官員李身宇崔敬等 爲其弊內辨出本錢 … 分排勸農收納)"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을사년 이전까지 토지에 부과하는 민결(民結) 방식으로 면화를 조달하면서 발생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방관이 관청 자금인 본전(本錢)을 마련하여 운영하는 내변출본전(內辨出本錢) 방식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관청이 직접 자금을 운용하고 이자 수익을 활용하는 식리(殖利) 제도가 지방재정 운영의 한 방식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청은 면화뿐 아니라 생마(生麻)와 황밀(黃蜜) 조달에도 본전의 이자인 본전이삼십량(本錢利三十兩)을 활용하여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무용(貿用) 방식을 시행하였다.
다만 활과 선박 수리에 필요한 어교(魚膠)는 선소(船所), 호을포(湖乙浦), 염해(鹽海) 등 세 포구에서 본전 지원 없이 납부하는 무본전당납(無本錢當納) 방식이 유지되었다.
결국 1895년 『영남읍지』 「남해읍지」의 공방 기록은 전통적인 현물 징수와 새로운 시장 활용 방식이 공존하던 조선 말기 지방 행정의 변화상을 보여주며, 특히 이신우와 최경의 개혁 사례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재정 운영을 합리화하려 했던 지방 사회 내부의 자생적 변화 노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4) 「공례방」에 기록된 남해 해산물 진상의 현장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남해 어민들에게 관청의 조세와 왕실 진상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관청십이삭입(官廳十二朔入)」과 「공례방(公禮房)」 기록에 등장하는 홍합(紅蛤), 해삼(海蔘), 미역(斤藿), 전복(全鰒) 등의 해산물은 남해의 주요 포구인 미조(彌助), 상주(尙州), 곡포(曲浦) 등에 배정되어 조달되었다.
 홍합 2석 8두는 미조와 상주 두 포구가 관청의 밑천을 받아 책임지는 수본당납(受本當納) 방식으로 납부했고, 해삼 100접은 곡포리가 전담하였다.
 미역 40단 역시 대부분 미조와 상주에서 마련했으나, 그중 6단 20개는 마도(麻島)의 조항에 따라 어촌이 본전 지원 없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무본당납(無本當納) 방식이 적용되었다.
 특히 이 해산물들은 단순한 관청 소비품이 아니라 조정에 올리는 진상품이었기 때문에, 채취 시기마다 관청의 엄격한 관리와 검수를 거쳐야 했다.
 남해에서 생산된 귀한 해산물과 과실은 「공례방」을 통해 왕실과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정리되었다.
 기록에는 "왕대비전 탄일에는 통전복 1접 1꼬치를 정월 초사일에 봉인한다(王大妃殿誕日 通全鰒一貼一串 正月初四日封)"라고 명시되어 있어, 왕실 행사를 위한 진상품이 정해진 일정과 절차에 따라 준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임금의 탄일에도 품질 좋은 통전복을 올렸으며, 왕실 수라와 제례에 사용되는 삭선(朔膳) 역시 계절에 맞춰 마련되었다.
 특히 11월 삭선용 유자 662개를 10월 10일에 봉인하고, 운송을 위한 나무 궤짝 3개를 준비했다는 기록은 남해 특산물이 생산에서 포장, 운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관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궁궐의 풍요로운 식탁에 오르는 진상품 뒤에는 거친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하고 유자를 수확하며 국가적 의무를 감당했던 남해 어민들의 고된 노동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5) 남해현 재정의 두 축, 수군 방위와 백성 구휼을 잇다
 

 남해는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영의 지휘 아래 수군진이 배치된 해상 방어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군사 재정을 담당한 '수병방(水兵房)'과 대동법 관련 재정을 관리한 '대동창(大同倉)'의 운영은 지역 방위 체계를 유지하는 핵심 기반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삼도수군통제영의 지시에 따라 어장과 소금 배에 부과한 균세(均稅)는 총 70량이었다.
 이 가운데 18량은 관내 토착 행정 조직인 3향소(三鄕所)의 운영비인 삭례급(朔例給)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실전(實錢) 52량 6전 3분은 군선 수리와 군기 정비 등 군사 목적에 사용하였다.
 이는 군사 재원을 지역 행정 조직과 함께 운용하며 해상 방어에 필요한 협력 체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대동창의 왜공어가전(倭供魚價錢) 운영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재정이 고정된 용도에 머물지 않고 지역 상황에 맞게 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왜공어가전은 본래 왜관 운영과 대일 외교에 필요한 수산물 교역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기금이었다.
 그러나 기록에는 "대동창 왜공어가전 중 30량은 동래로 수송하고, 나머지는 작청무역전으로 돌려 가호의 군포를 대신 납부한다(大同倉 倭供魚價錢… 三十兩東萊輸送… 其餘除梢於作廳貿易錢 爲入任人戶布代納)"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기금에서 발생한 이자 75량 가운데 30량은 동래로 보내고, 남은 재원은 작청무역전에 편입하여 주민에게 부과된 군포 부담을 덜어주는 데 활용한 것이다.
 이는 외교 목적의 재원이 지역사회의 조세 부담 완화로 전환된 사례이며,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이 군사·외교·민생이라는 여러 목적을 조율하며 재정을 운용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6) 세금 한 푼의 무게, 1895년 남해 재정 기록이 남긴 유산
 

 1895년 『영남읍지』 「남해읍지」의 재정 장부를 역주(譯註)하며 마주한 것은 낡은 옛 기록의 잔해가 아니라,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조선 지방 행정의 생생한 모습이다.
 창고 출납 때 수수료로 2되씩 공제한 색조(色條)의 관리, 군자곡과 상진곡의 곡모(穀耗) 수입을 국가 귀속분인 회록(會錄)과 관청 운영비인 관용(官用)으로 구분한 방식은 조선 후기 회계 운영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물론 면주인에게 무본전으로 계란을 부담시키는 조달 관행의 한계도 있었지만, 시가를 반영한 종시가(從時價) 원칙과 이신우·최경의 목화 세제 개선처럼 폐단을 줄이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결국 1895년 남해의 재정(財政) 장부는 국가 운영, 지방 관청의 유지, 백성의 생계를 조율하려 했던 고민의 산물이다. 횃불 하나의 가치를 땔나무로 환산하고 꿩 다리 수까지 기록한 치밀함은 재정 관리가 곧 백성의 삶을 지키는 책임이라는 인식과 연결된다.
 현물 징수의 전통과 시장경제(市場經濟)의 변화가 교차하던 이 장부는 오늘날 재정 건전성과 복지의 균형이라는 과제에도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조세 부담의 형평성을 기하며 세금 한 푼의 무게를 헤아리던 130년 전 남해현 아전(衙前)들의 붓끝은 국가 재정과 공공성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7) 1895년 영남읍지 남해현(조세 항목)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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