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 『해동지도(海東地圖)』로 본 남해, 국방과 민생을 함께 지켜낸 삶의 터전
해동지도 속 남해현은 국방과 경제, 행정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남해안 방어 체제의 중심지였다
끊임없는 외침의 위협 속에서도 주민들의 삶과 국가 안보를 함께 지켜낸 조선 해양 방어의 핵심 요새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18일(금)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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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어 온 섬은 바다의 요새이자 지리적 요충지였다. 한반도 남해안의 중심에 자리한 남해현 역시 서쪽으로는 전라도, 동쪽으로는 경상도 수군 본영을 잇는 해상 장벽으로서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막아내야 했던 최전방 보루였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란 이후 조선은 남해안 국방 체계를 전면 재편했고, 이에 따라 남해현의 전략적 가치도 함께 격상되었다. 영조 24년(1748)에 제작된 관찬 군현 지도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남해현(南海縣)」 조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탄생한 지도로, 지도와 지리 정보를 결합해 조선 후기 남해의 공간 구조와 군사 체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군사·행정·경제·인문 지리적 요소가 한 장의 지도 안에 집약되어 있어, 18세기 남해 지역의 실상을 가장 입체적이고도 정밀하게 보여주는 기념비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본 글은 해동지도에 기록된 텍스트와 지리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남해현의 역사적 위상과 독특한 지역적 정체성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삼국시대 이래 변화를 거듭해 온 건치연혁(建置沿革)과 그에 따른 행정적 변천 과정이며, 둘째는 읍성(邑城)과 요새(要塞)의 배치를 통해 지역 방어의 기반이 된 군사적 시설과 다층적인 관방 체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셋째, 해상 방어의 눈 역할을 했던 봉수망(烽燧網)과 더불어 육로·수로를 아우르는 교통·통신망의 운영 양상, 넷째는 호구와 토지, 그리고 풍부한 물산의 기록을 통해 변방의 삼엄함 속에 가려진 주민들의 구체적인 경제 활동과 독특한 풍속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남해현이 조선의 안보에서 차지했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 오늘날 지역사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남해(南海)가 지닌 해양 방어의 역사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1) 건치연혁(建置沿革)과 행정적 변천 과정
남해현은 본래 바다 한가운데 자리한 외로운 섬이었으나, 삼국시대 이래 국방과 행정의 중요성이 더해지며 점차 중앙 권력의 핵심 통제 구역으로 탈바꿈하였다.
기록에는 신라 신문왕(神文王) 초기에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경덕왕(景德王) 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해(南海)'라는 고유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대에는 현령(縣令)이 배치되면서 지방 행정 단위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도서 지역을 넘어 국가의 해상 방어와 조세 수취를 담당하는 중요한 행정 단위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방의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는 외세의 침략에 극히 취약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시기에는 극심해진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향촌 사회가 완전히 붕괴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이때 남해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육지인 진주(晉州)의 대야천 부곡으로 피난하여 얹혀사는 '교우(僑寓)'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과 맞물려 상당 기간 남해현이 이름만 존재하고 실제 영토는 비어 있는 유령의 군현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한때 사람이 떠난 빈 섬이 되었던 남해는 이후 국가의 적극적인 복구 정책 속에서 재건(再建)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개창된 이후에야 남해현은 복구와 재편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태종 대에는 해안 방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하동과 합쳐져 '하남현'으로 불렸고, 이후 진주의 금양 부곡을 편입하면서 '해양현'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세종(世宗) 대에는 다시 곤명현과 합쳐졌다가 분리되는 등 행정구역의 통합과 분할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이는 왜구의 가시적인 위협으로부터 유민(流民)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국가의 세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남방 방어선을 재구축하려는 조정의 고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본 지도의 기록 중 중종 때 현감으로 강등되었다는 서술은 실제 연산군 대의 역사적 사실을 오기(誤記)한 것이며, 이후 남해현은 안정적인 고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1748년 당시 남해현은 관아가 자리한 현내면을 비롯하여 이동면, 삼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설천면 등 총 7개의 면으로 편제되어 관치(官治)의 그물망을 촘촘히 뻗치고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 남해가 행정과 군사 기능을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완성도 높은 지방 통치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군사적 시설과 관방(關防) 체계
남해현은 영토의 남쪽 울타리를 책임지는 국방의 요체였다.
지도의 관방과 성곽 조에 나타난 구체적인 수치와 배치는 이 지역이 단순한 지방 행정구역을 넘어 철저한 전시(戰時) 동원 태세를 갖춘 거대한 군사 기지였음을 증명한다.
남해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축에 위치하였기에, 이곳이 무너질 경우 남해안 전체의 방어선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남해를 남방 해역 방어의 전초기지로 인식하고 성곽과 수군 진영을 집중적으로 정비하였다.
고을의 중심이자 수령이 정무를 보던 남해읍성(南海邑城)은 둘레가 2,806척에 달하는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비록 지도 본문에는 성벽 높이가 3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여장(女墻)의 높이로 추정되며, 『문종실록(文宗實錄)』 이후 석축의 규모와 성문의 개수 변화 등을 비교해 보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읍성이 지속적으로 보수되고 확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성안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 하나와 샘 다섯 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적에게 포위당하는 장기전 상황에서도 고을 주민과 군사들이 내부에서 자급자족(自給自足)하며 버틸 수 있는 생명선(生命線)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남해읍성은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유사시 주민과 군사가 함께 입보(入保)하여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종합 방어 기지였다.
더욱 주목할 점은 남해 서남부와 동남부 해안선을 따라 배치된 촘촘한 진보(鎭堡) 체계이다. 평산진(平山鎭), 곡포진(曲浦鎭), 상주진(尙州鎭), 미조항진(彌助項鎭)으로 연결되는 4대 진보는 남해안으로 진입하는 왜선의 길목을 완벽히 차단하는 격자형 방어망이었다.
특히 미조항진은 성곽 둘레가 2,146척, 높이가 11척에 이르는 거대한 석성으로,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使)가 파견되어 주변 해역을 총괄하는 거진(巨鎭)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4개 진보에는 각각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의 주력 군선들이 상시 편제되어 있어 해상에서 적을 일차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막강한 수군 기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각 진보는 봉수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적선의 출현을 신속하게 중앙과 인근 수군진에 전달함으로써, 해상 감시와 방어, 반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입체적인 방위 체계를 구축하였다.
아울러 고현산성이나 관당성, 그리고 옛 미조항의 성곽 유적 등은 오랜 세월 동안 남해가 겪어온 전란의 상흔이자 다층적인 방어벽의 역사적 흔적이라 할 수 있다.
3) 봉수망(烽燧網)과 교통·통신망의 운영 양상
급박하게 전개되는 해상의 군사정보를 전국의 병영과 한양의 중앙 정부에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남해현은 유기적인 봉수망과 유통로를 긴밀하게 가동하였다.
남해의 통신망은 행정적인 경계를 넘어 국방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목적 안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고을의 동쪽에 우뚝 솟은 금산(錦山) 봉수는 남해 해상 방어의 눈이었다.
금산 봉수는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진주의 대방산(현 창선 대방산) 봉수와 통하였고, 서쪽으로는 고을 내의 소흘산 및 원산 봉수와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또한 남쪽으로는 미조항진 위의 별망(別望)과 육로로 직접 연결되어 최전방의 감시탑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흘산과 원산의 봉수들은 동쪽 금산에서 전달된 신호를 받아 이를 다시 바다 건너 전라도 순천부의 돌산(突山) 봉수로 신속히 전파하며 군사정보를 이어 갔다.
이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 체계가 남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삼아 하나의 거대한 연안 방어 통신망으로 묶여 있었음을 방증한다.
동시에 이러한 봉수 체계는 단순한 경보 기능을 넘어, 전시 상황에서 수군과 육군이 동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 차원의 조기경보 시스템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통신망은 잘 정비된 육로와 수로의 교통망이 결합되어 그 효율성을 더욱 높였다. 읍치(邑治)를 기준으로, 사방으로 뻗은 도로의 거리가 리(里) 단위로 정밀하게 파악되어 있었으며, 한양까지는 1,045리의 원거리였으나 내부적인 기동성은 매우 뛰어났다.
북쪽으로 35리 거리에는 덕신역(德新驛)이 존재하여 7필의 역마를 상시 관리하며 공문서의 신속한 수송과 관원의 출장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육지와 섬을 이어 주는 가장 좁은 목인 노량의 남쪽 기슭에는 노량원(露梁院)과 대규모 나루터가 설치되어 인적·물적 교류의 관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물살이 험하고 군사적으로 요해처(要害處)였던 지족암진과 관음포 등에는 각각 전용 진선(津船)을 상시 배치하여 통행을 엄격히 통제하고 해안의 방어력을 한층 더 보강하였다. 이처럼 봉수·역참·수로·진보가 하나의 체계로 결합된 남해의 통신·교통 구조는 평시에는 행정의 효율성을, 전시에는 즉각적인 군사적인 대응력을 동시에 보장하는 복합 방위망이었다.
4) 지역의 풍속, 경제 활동, 그리고 특산물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상세히 기록된 인구(人口)와 토지(土地) 면적, 그리고 다채로운 물산(物産)의 현황은 군사 기지라는 삼엄한 풍경 뒤에 숨겨진 남해 민초들의 역동적인 삶과 땀내 나는 경제 활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남해현의 호구(戶口)는 총 4,210호였으며, 인구는 남성 8,125명, 여성 11,248명을 합쳐 도합(都合) 19,373명에 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여성 인구가 남성보다 많다는 점이다.
이는 해상 어업과 군역 동원으로 인한 남성의 장기 부재 및 희생이 반영된 섬 지역 특유의 인구구조(人口構造)로 이해된다. 고을의 총 토지 면적은 논과 밭을 합쳐 2,933결에 달했으나, 자연재해로 면세된 토지를 제외하면 실제 수취 대상은 실전(實田) 1,027결과 실답(實畓) 1,269결을 합한 2,296결이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산지를 개간하고 해안 간척을 통해 생계를 이어 가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해는 자연이 선사한 풍부한 토산물 덕분에 지역 경제의 자생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동지도의 기록에는 토산물의 목록이 매우 다채롭게 나타난다.
해산물로는 조정의 진상품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요주(江瑤柱, 키조개 관자)를 비롯하여 문어, 홍어, 오징어, 전복, 대구, 청어, 상어, 홍합, 해삼 등이 풍부하게 채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기후가 온화한 남부 지방의 특성을 살려 석류와 유자, 치자 같은 고급 과실과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주요한 경제 자원이 되었다. 산지에서는 표고버섯과 송이버섯, 그리고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와 비자가 생산되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방패선을 건조하는 데 필수적인 소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금산(錦山)·고동산(顧東山)·차면산(車面山) 등 3개의 산을 국가가 지정한 '선재봉산(船材封山)'으로 묶어 철저히 벌목을 금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남해가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라 국가 해군력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던 전략적 산림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관아 내부의 읍창(邑倉) 외에도 선소(船所) 인근 해창(海倉)에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별도로 비축함으로써, 해양 경제와 군사 운영이 하나의 체계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국가 안보적 의의와 지역사적 가치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1748년의 남해현은 단순한 경상도의 변방 섬이 아니라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명운을 좌우하던 국가 안보의 핵심 보루이자 인문학적 자산이 집약된 '천남(天南)의 승지(勝地)'였다.
지도의 '형승(形勝)' 조에서는 남해의 지리적 위상을 두고 전라도의 진도, 경상도의 거제도와 함께 바다 위에서 솥발처럼 세 방향으로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남해안 전체 방어선에서 남해현이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가 얼마나 막중했는지를 단적으로 웅변하는 대목이다. 남해가 뚫리면 국가의 남쪽 바다가 모두 열린다는 위기감에, 조정은 이 작은 섬에 방대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한양의 각 관청에 소속된 여러 부류의 군인부터 시작하여 경상감영과 진주진에 소속된 군병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영(三島水軍統制營)에 직속된 1,962명의 장정까지 감안하면 남해의 주민들은 사실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대한 군사 조직의 일원으로 기능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해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충절(忠節)과 승전(勝戰)의 기억을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무공사우(忠武公祠宇, 현 충렬사)'가 노량 연안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관음포는 고려 말 정지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왜구의 대선단을 섬멸한 역사적 현장이자, 충무공이 조국을 구하고 순국한 눈물의 바다였다. 금산의 보리암을 비롯한 유서 깊은 사찰들이 남쪽 바다를 굽어보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모습은 이곳이 지닌 정신 문화적 깊이를 더해 준다.
결론적으로 1748년 『해동지도(海東地圖)』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남해현의 기록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행정과 군사 체계를 공고히 정비하고, 풍부한 해양 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삶의 양식을 일구어낸 남해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를 증명한다.
지도 위 촘촘히 그려진 진보와 봉수, 방전과 염분의 흔적은 단순한 지리 정보의 배치가 아니라 변방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투쟁이자 집념의 산물이다.
남해현은 한반도의 외딴 변방이 아니라, 거친 파도를 다스리며 남해안을 굳건히 지켜냄으로써 조선왕조의 안위를 최종적으로 담보했던 국방의 핵심 기지이자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지역 문화의 요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다져진 물적·인적 토대는 훗날 임진왜란의 대재앙 속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바다를 사수하고 노량해전의 위대한 승리를 일궈내는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해동지도』 남해현이 보여주는 남해의 풍경은 과거의 박제된 기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울 때 국토의 경계를 채워나가는 안보의 중요성과 변함없는 향토애(鄕土愛)의 가치를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생생하게 웅변하고 있다

2026.09.18(금) 16: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