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 즐겨찾기 추가
  • 2026.09.04(금) 21:50
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425년 『경상도지리지』 「곤남군(昆南郡)」 속 남해의 역사
『경상도지리지』 「곤남군」 기록은 왜구의 침략으로 붕괴된 남해안 질서를 재건하려는
조선 초기의 국방·행정 전략과 지역사적 변동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425년 곤남군 체제는 육지와 섬을 연계한 통합 방어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남해를 다시 국가 해양 방어의 전초기지로 복원해 나간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9월 04일(금) 21:14
▲ 『경상도지리지』 표지 & 남해 관련 기록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남해지도



역사(歷史)는 승자의 기록이기 이전에 생존의 기록이다. 왕조(王朝)가 기틀을 잡고 문물을 정비하던 조선 초기, 조정(朝廷)이 가장 먼저 추진한 국책사업 가운데 하나는 전국의 지리 정보를 면밀히 조사하여 각 도의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의 크기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려 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탈(侵奪)로 국방의 전선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확인하고 파괴된 세원(稅源)과 행정망을 복원하려는 처절한 국가적 생존 전략이었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편집자 주>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는 그러한 시대적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거울이다.
특히 본 지리지에 수록된 '곤남군(昆南郡)' 조항은 조선 초기의 극심했던 행정 개편과 국방 체제의 재정비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핵심 사료이다.
당시 남해현(南海縣)은 왜구의 노략질로 주민들이 육지로 철수하는 공도(空島)의 아픔을 겪은 후, 육지의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져 통합 행정구역인 '곤남군(昆南郡)'의 한 축을 이루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새로운 행정 체제 아래 방어선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본 글에서는 『1425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곤남군(昆南郡)」의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남해현과 곤명현의 역사적 실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건치연혁(建置沿革)과 행정구역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성곽과 진보(鎭堡)를 중심으로 한 군사시설 및 관방(關防) 체계를 분석하여 남해안 방어선에서 곤남군이 차지한 전략적 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봉수망(烽燧網)과 역(驛)을 중심으로 한 교통·통신 체계, 호구와 토산물 기록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실상을 검토함으로써 지역민들의 삶과 재건 과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여, 곤남군 체제가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남해안을 복구하고 조선 초기 해방(海防) 체제를 정비하는 데 수행한 역사적 역할과 지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전란(戰亂)의 파고가 낳은 행정의 연금술: 건치연혁과 변천 과정


『경상도지리지』 곤남군(昆南郡) 조항은 크게 육지의 곤명현과 바다의 남해현이라는 두 축의 연혁을 상세히 다루며, 이들이 하나의 군(郡)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고려 말 조선 초 남해안 일대가 겪은 극심한 군사적 격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서막은 고려 말 공민왕 시대 지정(至正, 중국 원나라 順帝 연호) 무술년(戊戌年, 1358)에 시작되었다.
끈질기게 밀려드는 왜구의 살육과 약탈을 견디지 못한 조정은 바다 한가운데의 섬(海中島)이었던 남해현의 인물(人物, 주민과 물자)을 통째로 육지인 진주 임내(任內) '대야천 부곡(大也川部曲)'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말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이로 인해 유서 깊은 고을이었던 남해현은 한순간에 주민이 없는 유령의 섬으로 전락했고 명칭만 육지의 이주지에 남겨진 채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들어선 후에도 공도화된 남해섬을 육지와 어떻게 연결해 효율적으로 통치할 것인가를 두고 조정의 치열한 고심이 이어지며 방랑과 재편이 계속되었다.
태종 14년(1414, 甲午)에는 남해현을 육지의 하동현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했으나, 불과 이듬해인 태종 15년(1415, 乙未)에 이를 다시 해체하고 진주 임내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쳐 '해양현(海陽縣)'으로 개편하였다.
다행히 태종 17년(1417, 丁酉)에 이르러 해양현을 혁파하고 남해현령을 복구함으로써 마침내 독립된 관(官)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반복된 행정구역의 잦은 개편은 당시 남해안 일대의 국방 장비와 통치 체제가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독립된 관(官)이 된 지 불과 2년 만인 세종 원년(1419, 己亥)에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본래 진주의 속현이었던 곤명현(昆明縣) 북쪽의 소곡산(所谷山)에 태종의 왕자(훗날 세종) 태(胎)를 묻게(安御胎) 된 것이다. 왕실의 태실 조성이라는 최고의 경사를 맞아 고을의 위상을 격상시키고자, 조정은 곤명현과 바다 건너 남해현을 전격 통합하여 품격이 한 단계 높은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참고로 『세종실록』 제3권 세종 1년(1419)의 기록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제목: 제목: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을 남해현에 합하여 곤남군으로 승격시키다』, 「국역: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현(昆明縣)을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승격시켜 곤남군(昆南郡)을 만들었다.
처음에 왕의 태(胎)를 곤명 땅에 매안(埋安)하여, 곤명 사람들이 따로 고을을 설치하자는 주청이 있으므로,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가부를 살펴서 알리라고 했던 것인데, 요새 와서 감사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곤명을 남해현과 합하여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울러 지도를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으로 보면, 곤명이 당연히 남해와 합해야 하겠으나, 곤명을 빼앗아서 남해에게 주면, 진주 사람이 반드시 원통하다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느냐." 고 하니, 호조판서 권진(權軫)·공조 판서 이적(李迹) 등이 아뢰기를, "진주는 일찍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진되었는데 목(牧)으로 내려졌으니, 지금 어태(御胎)를 매안한 연고로써 다시 그전대로 올려 주는 것이 편의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원숙·김익정 등이 아뢰기를, "곤명이 진주 사람의 횡포에 시달리어 따로 고을을 만들려고 한 적이 오래였고, 또 진주는 토지도 넓고 인물도 많아서, 남방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니, 백 호쯤 되는 곤명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별 영향이 없을 것이며, 하물며 지금 어태를 그 땅에 매안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곤명은 남해에 합쳐, 따로 곤남군을 만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줄 아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숙 등의 제안에 따랐다.」
사료가 집필된 1425년(세종 7)은 바로 이 곤남군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며 육지와 바다가 서로의 방어선을 보완하던 시기였다.
이후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변방 방어의 최선책은 결국 섬을 직접 채우고 지키는 것에 있음을 깨닫고, 곤남군(昆南郡)을 다시 분리·독립(復析之)시켜 각각 본래의 곤명현과 남해현령으로 환원함으로써 이 장대한 국방 복원사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2) 주인이 사라진 영토와 묵묵한 산천:군사시설과 관방 체계


1425년 당시 곤남군 체제하의 남해현은 행정적인 복구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수십 년간 이어진 공도화(空島化)의 상흔이 군사시설과 토지와 주민의 실태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해현의 두 속현(屬縣)인 '난포(蘭浦)'와 '평산(平山)'이다. 난포는 옛 내포현(內浦縣)이며, 평산 역시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고을들이었으나, 사료는 "두 현 모두 섬 가운데에 있는데 왜구로 인해 인물이 망하여 없어지고 단지 토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因倭人物亡 但有土地耳, 인왜인물망 단유토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지 토지만 남았다'라는 여덟 글자는 당시 남해섬이 직면한 비극을 강렬하게 웅변한다.
백성들의 삶과 고을은 왜구의 칼날 앞에 증발했고, 섬의 군사적 치소(鎭)로 기재된 '구등산(仇等山)'조차 밀려드는 외적을 육탄으로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황량한 초소에 불과했다.
이처럼 인간의 방어선은 무너졌을지언정, 남해의 거대한 산천은 천혜의 요새로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료가 남해현의 명산(名山)으로 꼽은 동쪽의 금산(錦山)과 남쪽의 망운산(望雲山)은 단순한 명승지(名勝地)가 아니라, 주민들이 사라진 암흑의 시기에도 바다 저편에서 밀려오는 왜적의 동태를 가장 먼저 감시할 수 있는 천혜의 방어 기지였다.
여기에 육지부인 곤명현(昆明縣) 역시 명산인 '서봉산(棲鳳山)'과 지리산(智異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거대한 하천인 '달계탄(達界灘)'을 품고 있어 배후에서 섬을 지원할 단단한 육지 기지의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인간이 쌓아 올린 시설은 왜구의 침략과 전란으로 사라졌을지라도, 금산과 망운산이라는 거대한 자연 요새와 곤명의 배후 지형이 건재하였기에 조선은 다시 이 섬의 관방(關防)을 복원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남해지도


3) 암흑 속을 밝히는 세 줄기 불꽃: 봉수망(烽燧網)과 통신망


 사람이 살지 않는 섬,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영토라는 모순적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朝鮮)의 조정이 선택한 핵심 군사 전략은 촘촘하고 과학적인 '봉수망(烽燧網)' 구축이었다. 1425년 『경상도지리지』 「곤남군」 남해조항의 백미는 섬 전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육지까지 신호를 도달하게 만든 세 줄기 봉수 시스템에 대한 기록이다.
 사료에 나타난 남해현의 봉수망은 도서 지역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육지 방어선까지 신속하게 신호를 전달하도록 설계된 통신체계였다.
 이는 비록 남해섬에 민간인이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국가의 정예 봉수군(烽卒)들이 목숨을 걸고 섬의 높은 봉우리에 상주하며 최전방에서 적의 동향을 감시하는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봉수망의 구체적인 경로는 사료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추적된다.
 신호의 첫 출발지는 섬 동쪽에 위치한 금산 연대봉화(錦山烟臺烽火)로, 외해(外海)에서 접근하는 왜구의 선단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최전방 감시초소였다.
 금산(錦山)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섬 내부를 관통하여 육로로 30리 떨어진 중간 거점인 소흘산(所屹山) 연대 봉화로 전달되었고, 소흘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30리를 달려 남해의 최고봉이자 최종 서북단 요충지인 망운산 봉화(望雲山烽火)로 신속하게 이어졌다.
 망운산에 집결된 국방의 신호는 마침내 북쪽으로 26리 바다를 건너 육지부인 진주 임내 금양부곡의 양둔산(陽芚山) 봉화로 이첩되었다. 오늘날 하동과 진주 접경 지역인 양둔산에 신호가 도달하는 순간, 육지의 관군과 지휘부는 남해 앞바다의 비상사태를 즉각 인지하고 출동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반면, 일반적인 교통·통신망인 역(驛)의 기록에서는 공도정책이 남긴 처절한 상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곤남군 조항의 역(驛) 항목에는 '완사역(完沙驛)' 단 한 곳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사료는 이에 대해 "완사역은 옛 남해현의 덕신역(德新驛)이며, 왜구로 인하여 육지로 나왔다(因倭寇, 出陸)"라는 가슴 아픈 연혁을 덧붙이고 있다.
 본래 남해섬 북단에서 육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덕신역이 왜구의 창궐 탓에 섬 내부에서 운영되지 못하고, 아예 사천·진주 방면의 내륙인 완사 지역으로 밀려 나와 재배치된 것이다. 이처럼 일반 행정 통신망마저 육지로 후퇴해야 했던 암담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조선은 '금산 → 소흘산 → 망운산'으로 이어지는 세 줄기 봉수의 불꽃을 통해 남해 바다의 영토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사료는 엄연히 증명하고 있다.



4) 빈집에서 캐낸 귀한 진상물: 인구 현황과 경제 활동


『경상도지리지』에 수록된 1425년 당시 곤남군의 인구 현황은 육지부와 도서부 간의 극심한 불균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행정의 중심이자 육지 거점이었던 곤명현(昆明縣)은 210호에 총 3,062명(남 1,229명, 여 1,833명)이 거주하며 다양한 성씨가 분포해 있었던 반면, 왜구의 침탈로 공도화(空島化) 과정을 겪은 남해현(南海縣)은 61호에 총 171명(남 71명, 여 100명)에 불과하여 극명한 인구 격차를 보였다.
 한 고을의 인구가 성인 남녀를 통틀어 171명뿐이었다는 사실은 상시적인 행정과 군역(軍役)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음을 뜻한다. 결국 이 극명한 격차는 전란의 깊은 상흔을 증명하며, 군사를 지휘할 현령과 방어선 및 봉수를 지킬 최소한의 정예 인력, 그리고 이들의 수발을 들 소수의 가구만이 섬의 명맥을 간당간당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변방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이 남해현을 버리지 않고 철저히 관리한 이유는 이 섬이 가진 풍부한 생산력과 공부(貢賦)·특산물의 가치 때문이었다.
 당시 남해현은 목면(木綿), 저포(紵布), 정오승포(正五升布, 공인한 표준 규격의 삼베) 같은 고급 직물류와 함께 갱미(更米, 멥쌀), 백미(白米), 조미(造米, 현미) 등 다양한 종류의 곡물을 공물로 바쳤다. 비록 인구는 171명에 불과했으나, 섬을 떠난 주민들이 낮에는 배를 타고 들어와 농사를 짓는 출륙농경(出陸農耕)을 행하거나 군사들이 직접 둔전(屯田)을 일구어 상당한 양의 곡물을 수확했다.
 또한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도 적합했기에 사료는 토의경종(土宜耕種) 품목으로 석류(榴), 기장(黍), 조(粟), 콩(菽), 삼베(麻), 목화(木綿)를 제시하며 이 황량해진 섬이 국가 재정을 뒷받침하는 요긴한 농업 기반이었음을 증명한다.
 특히 남해현의 토산공물(土産貢物)과 약재(藥材) 목록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기 제작과 수리에 사용되는 전칠(全漆)과 법유(法油), 진임자(眞荏子, 참깨)를 비롯해 표고 등이 생산되었으며, 생지황(生地黃), 파고지(破古紙), 천문동(天門冬)과 같은 귀한 약재도 함께 생산되었다.
 주인이 사라진 섬은 역설적으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금산과 망운산을 중심으로 야생 동물과 약초가 번성하는 공간이 되었고, 그곳에서 채취된 사슴 가죽(鹿皮)과 노루 가죽(獐皮) 등은 조정이 탐내는 고급 물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육지부인 곤명현이 바친 꿀(淸蜜)이나 문어(文魚), 홍합(紅蛤), 그리고 무려 249좌에 달하는 도자기 가마(貢監盆 二百四十九坐)의 위세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가치였다.
 조선(朝鮮)은 이 풍요로운 자원의 보고를 왜구에게 통째로 넘겨줄 수 없었기에, 소수 정예로 섬을 지켜내며 끈질기게 영토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5) 솥발의 복원을 위한 전초기지: 국가 안보적 의의와 가치


 1425년 『경상도지리지』 속 곤남군의 기록은 조선이 왜구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국방과 행정의 주춧돌을 다시 놓던 '재건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남해현은 속현들이 황폐화되고 인구가 2백여 명도 못 되는 처참한 실정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4단계로 연계된 봉수망을 운영하는 한편, 귀한 토산물과 약재를 생산하며 국가 안보와 재정 기반을 뒷받침하는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배후의 곤명현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의 태실(胎室)을 품은 상징적 공간이자, 섬에서 밀려난 역(驛)과 행정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방공호가 되어주었다.
 이처럼 육지와 섬을 잇는 곤남군 체제는 영구적인 정착지가 아닌 남해안 방어선을 복원하기 위한 가교였으며, 조선 조정은 이 통합 운영의 경험을 통해 섬의 경제적 저력과 지리적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결국 세종 19년(1437)에 곤남군을 해체하고 남해현령을 독립·복원(復析之)시킨 조치는, 남해현이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더불어 남해안을 지탱해야 할 세 개의 솥발(鼎峙) 중 하나라는 안보적 확신이 섰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세종 7년(1425)의 황량한 수치 뒤에는 고향을 빼앗긴 백성들의 눈물과 '단지 토지만 남았다(但有土地耳)'라는 냉혹한 현실이 무겁게 깔려 있지만, 이 사료는 영토를 끝까지 지켜내려 한 조선의 치열한 집념을 전하기에 큰 울림을 준다.
 덕신역이 육지로 밀려나고 삶의 터전이 허물어졌어도 금산과 망운산의 봉수군들은 매일 밤, 불을 피우며 육지와 소통했고, 이들이 지켜낸 1425년의 불꽃이 있었기에 훗날, 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이라는 위대한 역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결국 1425년 곤남군(昆南郡)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토의 진정한 가치는 주민 수나 외형적 번영이 아니라, 그 땅을 끝까지 지키려는 국가와 공동체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준다.
인기기사 TOP 5
남해
자치행정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