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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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 목장과 성곽 사이에서 피어난 민초(民草)의 기록
남해 관방성비는 관방성과 목장성 기능이 중첩된 성곽의 성격 논쟁과
마정(馬政) 속에서 전개된 지역민의 생존권 갈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남해미래신문
발행연월일 : 2026년 04월 10일(금) 16:10
▲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

이번 주부터 5회에 걸쳐 남해군에 현존하는 주요 금석문(金石文)을 중심으로, 그 안에 담긴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그 첫 여정은 1705년(숙종 31년) 건립된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다. 이 비석은 성곽(城郭)의 성격을 둘러싼 관방(군사 방어)과 목장 기능의 충돌, 그리고 조선 후기 마정(馬政) 운영 과정에서 표출된 지역민의 생존권 갈등을 생생히 전한다. 관방성비는 국가 권력과 지역 주민 사이의 긴장과 교섭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남해군 성곽 유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상징적 지표이기도 하다. 남해미래신문은 남해,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재발견 재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꺼이 뜻을 모아 그간 함께한 연구를 지면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전 남해해성고· 전 창선고 최성기 교장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편집자 주>




현재, 이 비석은 남해군 이동면 난음마을, 고즈넉한 난곡사(蘭谷祠) 뒤 느티나무 아래에서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서 있다.
높이 150cm, 너비 58cm의 단정한 자태를 지닌 이 비석은 단순한 석조물을 넘어, 300여 년 전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는 엄숙한 증언자다.
그 안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던 국방 의식과 말[馬]을 길러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던 국가의 마정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의 부담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지역민들의 절박한 현실이 겹겹이 새겨져 있다.
본고(本稿)는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에 담긴 역사적 층위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관방(關防)과 목장(牧場)이라는 이중적 기능이 빚어낸 갈등의 실체를 밝히고, 조선 중·후기 남해 지역사가 지닌 복합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 관방성과 목장성, 기능의 중첩과 경계의 모호함



관방성(關防城)은 국경이나 해안의 요충지에 설치해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군사 시설이지만, 목장성(牧場城)은 국가가 관리하는 말(馬)의 이탈을 막고 경계를 짓기 위해 쌓은 담장이다.
남해의 역사 속에서 이 두 시설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며 독특한 구조를 형성했다.
비문에 따르면, 난포(蘭浦)에서 유천(柳川)에 이르는 구간에 돌로 쌓은 일자형 석성이 존재했으며, 이는 오래전부터 왜적을 방어하는 관방성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일찍부터 국가 목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 전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단종(端宗) 연간에 이미 남해 금산곶(錦山串)을 비롯한 여러 곳에 목장을 설치했음을 전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거치며 방치되었던 목장성 일부가 자연스럽게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전란 이후 이를 바라보는 국가와 주민의 시각 차이가 '관방'과 '목장'이라는 기능적 중첩을 낳게 된 것이다.



△ 남해 금산 목장성의 구조와 고유한 축조 수법
▲ 남해 「금산 목장성」 외벽 모습

현재 '남해 금산 목장성'이라 명명된 이 성곽은 금산에서 지족리 수장포, 물건리 대지포를 잇는 이른바 '팔(八)'자 형태의 장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둘레가 약 15km에 이르며, 해안선과 맞닿아 입체적인 경계망을 형성했다.
평지 구간은 오랜 세월 농경지와 민가에 밀려 훼손되었으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임야 구간은 비교적 온전한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성벽의 축조 방식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다.
30~50cm 내외의 자연 할석(割席)을 옆으로 뉘어 쌓는 협축법(夾築法)을 사용했으며, 석재를 '품(品)'자 모양으로 맞물리게 배치해 구조적 안정성을 꾀했다.
이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축성 기법이다. 성벽의 높이가 1~2m 내외로 비교적 낮고 폭이 좁은 점은, 본격적인 공성전(攻城戰)을 대비한 성곽이라기보다 넓은 구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말의 탈출을 막기 위한 목장성(牧場城)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 특징이라 하겠다.



△ 국가의 마정(馬政)과 백성의 삶, 그 치열한 갈등



조선시대에 말은 오늘날의 전차와 같은 핵심 전략 자산이었다.
사복시(司僕寺)를 두어 엄격히 관리했던 마정(馬政)은 효종(孝宗) 대 북벌 정책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었다.
국가가 도서 지역의 황무지를 목장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대를 이어 땅을 일구며 살던 백성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읍지(邑誌)들을 모아 엮은 지리서인 『경상도여지집성(慶尙道輿地集成)』에 기록된 태복시(太僕寺)와 주민 간의 갈등은 이를 생생히 증언한다.
동천(凍川) 일대를 점유한 마정 관원들이 말을 기른다는 명분으로 민간의 전답을 잠식하자, 주민들은 생계의 터전을 잃고 도탄에 빠졌다.
특히 1655년 창선도(昌善島)의 말을 금산곶과 동천곶(凍川串)으로 옮겼을 때 발생한 농경지 피해는 극에 달했다.
관방성비에 새겨진 "수백 년 전해오는 전답을 앉아서 잃어버려 원통함이 골수에 사무쳤다"라는 문구는, 국가의 대의명분 아래 희생되어야 했던 백성의 피눈물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 남해안 방어 체계 속에서의 위상과 역사적 재평가

조선 중·후기 남해는 읍성과 관방성, 목장성, 그리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의 흔적인 왜성(倭城)이 공존하는 '성곽의 박물관'이었다. 성종(成宗) 대에 수군의 육전(陸戰) 능력을 강화하면서 방어 체계가 정비되었으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성곽의 운명도 엇갈렸다.
주민 보호가 주목적인 관방성(關防城)은 왜구의 활동 수위에 따라 존폐가 결정되는 유동성을 보였지만, 목장성(牧場城)은 국가 시설로서 비교적 고정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이 지점에서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비문은 태복시 관원들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관방성을 마성(馬城)이라 우기며 백성의 전답(田畓)을 빼앗으려 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맞서 정양길, 정효영 등 지역 인사들이 조정에 호소하고, 영의정과 조사관들이 공정하게 판결하여 마침내 '마성이 아닌 관방성'임을 확정 지은 과정은 지방관과 중앙 정부, 지역 주민이 엮어낸 정의의 기록이다.
남해 관방성비는 차가운 돌에 새겨진 과거의 화석이 아니다.
그것은 목장과 관방, 군사와 농경이라는 상이한 가치가 충돌하고 조정되던 역동적인 현장의 증거다. 과거 '남해장성(南海長城)'이라 막연히 불리던 유적이 이제 '금산 목장성'이라는 이름을 찾고, 다시 그 성곽이 백성들을 지켜낸 '관방성'으로 공인받기까지의 과정은 남해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동력이 되었다.오늘날 우리가 이 비석 앞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국가의 정책이 백성의 삶을 외면했을 때 일어나는 갈등과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선조들의 용기다.
아울러 지역민이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았다. 관방성비는 남해의 산천이 품고 있는 수많은 성곽이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숨결과 치열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스며있는 살아있는 역사(歷史) 공간임을 우리에게 깊이 일깨워 주고 있다.



△ 관방성비(關防城碑) 전문 번역

지리지(輿地)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 난포(蘭浦)에 내포현(內浦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삼국이 서로 대립하여 끊임없이 침략과 전쟁을 벌였으므로, 각 군현의 병력은 저마다 살아남을 방도를 꾀하였다.
혹은 산봉우리마다 산성을 쌓기도 하고, 혹은 중요한 길목에 성을 쌓아 경계를 정하여 적의 침입을 피하였다.
이러한 흔적은 해안 일대에 두루 남아 있다. 섬의 동쪽과 서쪽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뉘어 각각 적을 막았다. 난포에서 유천(柳川)에 이르기까지 돌로 쌓은 일자형 성이 있어, 그 머리와 꼬리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그 길이는 5리를 넘지 않았으며 이에 그 이름을 관방성이라 하였다.
성의 북쪽 끝에는 병영이 있고, 산성의 허리 중 가장 높은 곳에는 성현보(城峴堡)가 있다. 보(堡)의 남쪽에는 연대(煙臺, 봉수대)가 있어 경보(警報)를 알리던 곳이다.
 성 안쪽으로는 북쪽이 난포현(蘭浦縣)이고, 남쪽이 태주현(台州縣)이며, 동쪽으로는 미조항에 수군진(水軍鎭)을 설치하여, 서로 의지하며 삼각으로 버티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적을 막기 위한 관방의 유적임은 지금까지도 분명하여, 한 번 보면 의심할 수 없다.
 이 성안에는 또 팔자형 성(城)이 있는데, 그 머리는 관방성의 중턱에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한 갈래는 대지포(大池浦) 바닷가로 들어가며, 다른 한 갈래는 수장포(水杖浦)에 이른다.
 어느 시대 어느 해에 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지역은 곧 소금산(小錦山), 동천(凍川), 고천(古川), 적량(赤梁), 대지(大地) 일대이다.
 지난 정유년(丁酉年)에 그곳의 논밭을 태복시(太僕寺)가 함부로 점유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고,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생업을 잃게 되었다.
 그 원통함이 지금까지도 뼛속 깊이 사무쳐 있다. 아,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면서 남의 것을 빼앗는 풍조가 성행하니, 목자(牧子) 무리들이 이를 본받아 은밀히 억제되지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앞서 말한 관방성, 즉 적을 막던 성을 다시 마성(馬城)이라 부르며, 그 안의 논밭을 모두 차지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태복시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말을 기르기 위한 별도의 목장을 설치한다고 속였고, 관청에서 조사하자 관청 측은 백성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본사(本寺)에 이익을 더하는 데에만 힘써 임금의 판단을 속였다.
 장차 그 땅을 떼어 넘기려는 처사는 그 사람의 편벽(偏僻)되고 어두운 소행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에 고을 사람들, 전 만호 정양길(鄭梁吉), 유학 정요형(鄭堯衡), 최준걸(崔儁傑) 등이 분개하여 호소하였고, 마침내 임금의 윤허를 받아 본도(경상도)에서 강직하고 명철한 관리를 따로 정해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관은 사천현감 조유석(趙裕錫)으로, 이 일을 주관하였다. 우리 태수 김만상(金萬相, 자암 김구 6대손)과 감목관 김중윤(金重潤)도 함께 순시하며 살폈다.
 갑신년(甲申年, 1704) 겨울 중순에 함께 난포에 도착하여 성터를 오가며 여러 차례 자세히 조사한 결과, 이것이 적을 막기 위한 관방임이 분명하며 결코 마성이 아님을 밝혀내어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최준걸이 다시 상경하여 영의정 신상국(申相國)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니, 기꺼이 허락을 받아 우리 변방의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고 옛 땅도 잃지 않게 되었다.
 백성들이 날마다 탄식하며 말하길, "아, 누구의 은덕이 이처럼 큰가?" 하니, 이는 상국의 애민정신과 조사관의 강직함, 태수와 목관의 공정함 덕분으로, 치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 변방 백성들이 다시 살아난 때라 할 것이다. 이에 돌을 다듬어 이 사실을 새겨 길이 썩지 않게 하고자 한다.
 강희 44년(1705) 을유년 11월 28일, 상주 이정(里正) 유학 강적주(姜適周), 김진우(金振佑), 일면 풍헌 유학 하윤옥(河潤沃), 미조 이정 김여생(金汝生), 도감 유학 강수(姜璲), 신전 이정 이준석(李俊碩), 시문 이정 하여행(河汝行), 감관 송시망(宋時望), 편수 각자 승 법수(法守).
 

▲ 난곡사 느티나무 모습

△ 남해 관방성비, '백성을 지키는 성'의 가치를 되찾다

 
 남해 관방성비(關防城碑)는 단순한 석조 유물을 넘어, 조선 후기 국가의 마정(馬政) 정책과 지역민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역동적인 역사의 현장을 증언한다.
 이 비석은 국가가 사리사욕을 앞세워 관방성(關防城)을 마성(馬城)이라 칭하며 민초들의 전답을 수탈하려 했던 부당함에 맞서, 지역 인사들과 조정이 협력하여 정의를 바로 세운 승리의 기록이다.
 결국 이 비는 관방과 목장이라는 기능적 중첩 속에서 피어난 갈등을 해결하고, '백성을 지키는 성벽'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확정 지음으로써 남해의 지역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해 관방성비는 차가운 유적이 아니라, 시대의 모순을 넘어 진실을 지켜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살아있는 역사 공간이다.
 특히 비석 앞에서 690년(2026년 기준)의 세월을 견뎌온 느티나무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이 고목은 수백 년간 비바람을 맞으며 민초들의 고통과 환희를 묵묵히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다.
 느티나무의 깊은 뿌리가 땅을 지탱하듯, 권력의 횡포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조들의 기개가 이 땅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나무는 전한다.
 잎새를 흔드는 바람 소리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켜낸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승리를 나직이 읊조리며, 진정한 정의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생명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지금 이곳을 무심히 지나치는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이끼 낀, 오래된 비석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침묵의 돌에는 18세기 초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며 끝내 정의를 바로 세운 지역민들의 목소리가 고요하고도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중한 기록이 풍화 속에 잊히지 않도록 주변을 정비하고, 글자가 더 이상 마모되지 않게 보존하며, 그 뜻을 전하는 안내를 세워 오래도록 기억되게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과거의 정의를 오늘의 책임으로 잇고, 미래로 온전히 전하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세월을 건너 우리의 마음마다 잔잔히 스며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빛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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